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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는 이야기

지리산둘레길 - 여덟

천왕봉에 오르다


8일째 아침이다. 민박보다는 모텔이 편하다. 인터넷, TV, 욕실, 면도기부터 생수나 커피까지 비치되어 불편이 별로 없다. 민박은 화장실이 떨어져 있거나, 인터넷이 안 되거나 항상 불편한 게 있었다. 면도까지 말끔히 하고 여장을 챙겼다. 잠도 그런대로 잘 잤다. 문제는 여행경로였다. 여행 첫날에 걷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인월’이었다. 앞으로도 걸었고 뒤로도 걸었다. ‘낙향’님이 점심 때 온다고 했으니, Y선생과 헤어졌던 장소까지 데려다 달라고 해서 끊어진 길을 계속 걸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점심때까지 3코스 시작점에서 일주일 전 걸었던 곳까지와, 어제 길표시를 놓치는 바람에 엉뚱한 길로 들어섰으니 그 끊어진 길까지 걸으며 시간을 보낼 요량으로 9시 가까이 되서 느지막하게 모텔을 나섰다. 몇 걸음 걸었을까, 둘레길 안내소 표시가 눈에 띄었다. 이상한 것은 둘레길 안내소가 둘레길 코스에 있지 않고 엉뚱한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여기서 덕산(Y선생과 헤어진 곳)까지의 대중교통이었다.


말을 하다가 엉뚱하게 지리산 천왕봉을 등산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이곳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백무동으로 가면 된다고 했다. 순간 천왕봉을 올랐다가 중산리 쪽으로 하산하면 바로 덕산으로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9코스를 걸을 때, 중산리로 가는 안내사인을 본 것이 생각난 것이었다. 이번 기회에 천왕봉을 오르기로 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다. 1,950미터의 한라산도 1년에 몇 번씩 오르는데, 1,915미터의 지리산쯤이야!


다시 모텔로 돌아갔다. 모텔비를 주고 전날 사용했던 방을 하루 더 사용하기로 하고 배낭을 두고 나왔다. 3코스 시작점을 2킬로쯤 걸으니, 일주일 전에 지나갔던 중산마을이 나왔다. 빽빽이 소나무가 들어서있는 모습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양쪽의 산세가 우람했다. 잠깐 서서 산세를 감상하다가 돌아섰다. 2코스를 거꾸로 들어섰다. 그 사이에 ‘낙향’님의 전화를 받았다. 만날 장소로 길을 잃어버린 장소로 정하고 그곳까지 부지런히 걸었다.


우리는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서로 비슷한 아버님을 가진 우연에 대해 화제로 삼았다. 평양근처 출신으로 1·4 후퇴 때 이북에 처자식과 부모님을 두고 단신 월남한 우리들의 아버지! 그분들이 왜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그토록 술을 마셨는지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와서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때늦은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할 뿐이다.


‘낙향’님이 돌아간 후, 여행기를 쓰며 내일의 산행을 위해 쉬기로 했다. 그래도 오전에 10킬로 정도는 걸었다. 저녁에 버스시간을 알아볼 겸 터미널에 들렸다가 읍내를 어슬렁거렸다. 터미널 이층에 '휴(休)제작소'라는 이름의 안내센터 사인이 있어 들렸는데, 둘레길 주변의 숙박업소를 안내한다고 했다. 3코스뿐만 아니라 전 코스를 다한다는 거다. 이곳의 전화번호만 알면 숙박업소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저녁은 모텔 방으로 간단한 안주와 소주를 시켜 방에서 저녁을 때웠다. 다음날은 새벽에 일어나 준비를 끝낸 다음 6시 반에 일찍 방을 나섰다. 터미널 옆의 허름한 식당에서 국밥으로 아침을 때우고 7시 반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백무동에 내렸을 때는 8시가 채 못 되었다. 바로 산행을 시작했다. 한라산과 다르게 처음부터 무척 가팔랐다. 아니 가파른 정도가 아니라 평탄한 곳도 거의 없었다. 점점 아무 일없이 산행을 끝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해발 750미터 부근의 성판악에서 시작해서 1,950미터의 한라산 백록담까지는 8.9킬로나 되어, 경사가 급한 구간은 일부에 불과하다. 반면에 지리산을 600미터도 못되는 곳에서 출발하여 천왕봉까지 7.5킬로에 불과하다. 지리산이 훨씬 가파를 수밖에 없다. 한라산보다 낮다고 만만히 본 내 불찰이 컸다. 이 정도면 어제 ‘인월’에서 숙박할 것이 아니라 이 근처에서 숙박하고 일찍 산에 올라야했다. 게다가 나는 배낭이 지금 훨씬 무겁다. 한라산에 갈 때는 노트북도 필요 없고 옷가지도 불필요하다. 그것뿐인가? 지난 8일 동안 계속 걸었던 터다. 그래도 장터목까지 5.8킬로는 4시간만인 12시 즈음에 도착했다. 거기서 천왕봉까지는 1.7킬로다.


갈등이 생겼다. 그대로 하산할까? 그랬다가는 나중에 많이 후회할 것 같았다. 마음을 모질게 먹고 천왕봉으로 방향을 잡았다. 시작부터 밧줄을 잡고 올라야 할 정도로 가팔랐다. 배낭을 장터목에다 놓고 오지 못한 것이 금방 후회되었다. 어차피 천왕봉에 올랐다가 다시 장터목으로 와서 중산리로 하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휴,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꼭 그 꼴이다. 나는 배낭을 벗어 근처 바위 뒤에 숨기고 물만 하나 챙겼다. 머리가 아주 나쁜 것은 아닌가 보다.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천왕봉까지 가는 1.7킬로는 매우 험했다. 배낭을 두고 오지 않았다면 중도에서 포기할 뻔했다. 아직 녹지 않은 눈과 얼음까지 있어서 정말 조심스러웠다. 왼쪽으로 미끄러지면 그냥 낭떠러지다. 밧줄을 잡고 오르고, 바위를 잡고 기면서 1.7킬로를 가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어느 부부가 먹을 것(배낭)도 없이 쩔쩔매는 나를 보고 측은했는지(?) 점심식사를 했느냐고 묻고는 두유를 하나 주고 갔다.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날씨는 기막히게 좋았다. 1,915미터 정상에는 바람도 거의 불지 않았다. 눈앞에는 끝없는 산자락이 색깔만 희미하게 바뀌며 펼쳐졌다. 얼른 기념사진을 찍고, 주변을 동영상과 사진에 담았다.


숨겨둔 배낭을 찾아 장터목으로 내려오니 2시가 넘었다. 이제는 내려갈 일이 걱정이었다. 요기할 것이 있을까하고 매점에 가니 어떤 청년이 라면을 사고 있었다. 그는 내게 라면을 먹고 싶으면 라면만 사라고 권했다. 같이 끓이겠다는 고마운 제안이었다. 역시 불감청이나 고소원이었다. 원주에서 왔다는 청년은 내 아들 또래였다. 그는 장터목 대피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내일 산행을 계속한다고 했다. 그는 장터목까지 오는데도 힘들었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다리보다는 무릎에 통증이 약간 느껴져, 하산이 걱정이 된 나는 오래 있을 수도 없었다. 청년에게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하산을 재촉했다. 잘못해서 하산하기 전에 어두워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무엇보다도 부상을 입어서는 안 되기에 조심해서 내려가야 한다. 길이 얼마나 험한지 1.6킬로 내려오는데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5.3킬로를 내려가야 한다. 다행인 것은 가끔 걷기 좋은 길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6시가 다 되어 중산리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스스로에게 대견하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천왕봉 근처 눈길에서 한 번, 내려오다 바위에서 한 번, 두 번 미끄러졌지만 옷만 버렸을 뿐 다치지는 않았다. 거기서 2킬로를 더 내려와 민박집이 보이기에 인터넷이 되는지만 확인하고 들어왔다. 방은 엄청 좁고 화장실과 욕실도 방 밖으로 나가야했다. 식당도 없고 밥도 주지 않았다. 다행이 컵라면이 있어 요기할 수 있었다. 컵라면 두 개를 한꺼번에 먹은 것도 난생 처음이었다. 그만큼 배가 고팠다.


<후기>

산행을 하다가 ‘경주애인’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대구로 갔다가 내일 여수로 가는데 같이 가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일은 여수로 갈 것 같습니다. 거기에 가게 되면 섬을 둘러볼 생각입니다.

사진은 나중에 따로 올리겠습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자칭 글쟁이라는 사람이 퇴고도 하지 않고 성의 없이 올립니다. 오늘보다 힘든 산행을 언제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거의 10시간을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9일째 걷기를 마쳤습니다.


▼ 천왕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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