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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는 이야기

지리산둘레길 - 다섯

길에서 만난 사람, 길에서 헤어지다


올레길을 다니면서는 숙박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제주에서는 아무리 먼 곳이라도 차로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면서 오랜만에 숙박을 찾게 되었다. 민박이나 펜션의 의미와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미국에서 여행할 때는 주로 모텔을 찾았고 출장 가서는 호텔에서 숙박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이번에 ‘지리산둘레길’ 주변의 숙소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았다.


- 민박: 현지인들이 집을 개조하거나 증축하여 올레꾼(제주 올레를 걷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나 둘레꾼들에게 숙박을 제공함.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보통 식사를 포함하며 일인이면 3만원, 2인이면 4만원을 받는다. 물론 비수기 때의 가격이며, 한여름의 성수기에는 장소에 따라 부르는 게 값이다.


- 펜션(Pension): 주로 외지인들이 수익을 위해 적당한 장소에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용어라 생소하다. 요리할 수 있는 시설과 도구를 갖추었다. 1박에 6만원이나 민박과 마찬가지로 성수기에는 10~15만 원 이상이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이용할 수 있다. 펜션(Pension)은 유럽에서 사용하는 용어라고 한다. 도시에서 은퇴한 노인들이 농촌에 살면서 부족한 연금을 충당하는 방법으로 여행객들에게 호텔보다 싼 숙소를 제공한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인데, 그럴 듯하지만 확실한지는 출처가 불분명하다.


- 모텔: 한국에서의 모텔은 ‘원 나잇 스탠드’를 위한 장소라고 여겨진다. 요상한 침대가 있고 콘돔과 같은 피임기구이 준비되어 있는 곳도 있다. 남녀가 같이 들어가면 카운터에서 자고 갈 건지, 쉬다(?) 갈 건지 물을 수도 있다. 그것에 따라 가격도 달라진다. 마사지를 부를 수 있는 전화번호까지 비치되어 있다.


민박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전화로 가격과 식사, 화장실 구조를 물었다. 따로 방을 쓰는 조건으로 일인당 3만원에 아침을 포함하기로 했다. 샤워를 할 수 있는 화장실이 실내에 있다고 설명하는 주인여자의 목소리가 밝고 경쾌하게 들렸다. 실제로 가보니 거실에 방이 두 개 딸려있는 가정집 구조였다. 지금까지 들었던 숙박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는 무리하게 먹은 점심이 그때까지도 꺼지지 않았다. Y선생은 교장선생 댁을 나오자마자 가게에 들러 활명수를 사먹을 정도이었다. 마당에는 골프스윙을 연습할 수 있도록 작은 네트가 있었다.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으니 레인지에 가려면 진주까지 나가야 한단다. 이런 시골 사람들까지 골프를 친다는 것을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소화도 시킬 겸 오랜만에 클럽을 휘둘러보았다.


Y선생은 밖으로 나가더니 소주와 새우깡을 사왔다. 자신은 마시지 않으면서 나를 위해 사온 것이어서 고마웠다. 사업 때문에 술을 많이 마셨으나 은퇴 후에는 건강에 문제가 있어 끊었다고 한다. 이명으로 고생해서 지금도 듣는데 문제가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소주를 비웠을 때는 8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모처럼 인터넷이 잘 되는 곳에 왔으니 카페에 여행기를 올렸다.


그 덕분에 잘 시간을 놓쳤고 녹이 슨 머리를 쓰느라 머릿속이 복잡해진 탓인지, 글을 끝내고 나서도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 두세 시에는 닭 우는 소리가 요란했다.


- 이 동네에서는 50대 중반인 제가 가장 어린 축에 들어요. 여기서는 60대는 청년이며 70대도 여전히 농사일을 합니다. 80은 되어야 비로소 노인 축에 들어서 앉아 하는 일을 합니다. 감 수확철이 되어도 일할 사람이 없고, 사람을 사 쓰면 인건비가 비싸서 남는 게 없습니다.


아침을 먹으며 주인여자에게 들은 이야기다. 어제 뜯은 쑥으로 끓였다는 쑥국에는 봄의 기운이 가득한 향기로 입맛을 유혹했다. 새벽에 뜯어 무쳤다는 어떤 야채는 얼어서 맛이 어떨지 모르겠다고 걱정했지만, 상위에 있는 모든 게 다 맛있어서 그릇마다 깨끗이 비워졌다.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주인여자의 통통한 얼굴에 어울리는 미소를 한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경남 산청군 덕산읍 사리 조미원 민박집 010-5188-7316)


주인여자와 정겹게 인사를 나누고 민박집을 나선 것은 8시 50분경이었다. 5분도 안 되어 ‘Andrew’님에게 안부전화가 왔다. 많은 분들로부터 관심을 받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덕산 읍내는 꽤 컸다. 장터가 보이고 고등학교도 보였다. ‘중산리’ 방향을 가리키는 안내표시를 보니 천왕봉 생각이 간절했다. 천왕봉에 오르는 가장 가까운 코스가 ‘중산리’라는 말을 Y선생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Y선생이 보이지 않기에 두리번거리는데, 그가 엉뚱한 방향에서 오더니 스틱은 아니지만 철물점에서 지팡이를 파니까 그걸 사라고 조언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하루 반나절 동안 그의 스틱 한 짝을 빌려 사용했었다. 어제는 한 짝을 내게 주더니 오늘은 두 짝을 다 가져간 이유를 이제야 이해했다. 이미 그곳을 지나간 적이 있는 그는 지팡이를 살 수 있는 곳을 알았던 것이다. 노인용 지팡이는 5천원이었다. 읍내를 지나 덕천강을 따라 한참 갔다. 하늘은 맑고 기온은 선선하고 바람까지 적당해서 걷기에는 최적이었다. 5일째 걷기가 시작된 것이다.


별로 걷지도 않았는데 쉬어가자는 말에 배낭을 벗었다. 바위에 앉은 Y선생은 서있는 내게, 자신은 오늘부터 하루에 한 코스만 걷겠다고 했다. 아침에 인터넷으로 조사를 했는데 오늘 두 코스는 모두 쉬운 코스로 거리도 짧았다. 어제와 그제는 거리도 길고 난이도도 높았는데도 하루에 두 코스를 걸었기 때문에 그 의도가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지난 이틀간 모든 일정을  계획한 것도 그분이었고 나는 따라 다녔을 뿐이었다. 겨우내 걷지 않아서 너무 힘들다는 이유를 말했다. 또 운기조식할 시간을 충분히 갖고 싶다고 했다.


헤어져야 할 때가 온 것인가. 오늘 걷는 9코스의 종점인 ‘위태’는 이 속도라면 1시 이전에 충분히 도착할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혼란스러울 때, ‘낙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톨게이트를 나와 덕산 쪽으로 가고 있으니 정확한 위치를 알려달라고 했다. 통화하는 것을 들은 Y선생이 내게 조언했다. 하동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화개장터를 구경하고 다시 이곳에 데려달라고 해서 걸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가는 방향이 같으니 다시 만날 거라고.


순간, 어떤 감이 왔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된 것이었다. 길에서 만난 사람이니 길에서 헤어지는 건 당연하다. 그도 나도 서로의 전화번호를 묻지 않았다. 길에서 우연히 만났던 것처럼 길에서 그렇게 헤어졌다. 의례적으로 그동안 즐거웠다며 손을 굳게 잡았을 뿐이었다. 지난 3일간 같이 걷고 숙식을 같이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한 친구 사이라도 쉽게 하지 못할 부부간 이야기까지 나누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길에서 만나 다시는 볼 것 같지 않았기에 스스럼없이 사적인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베트남 사파에서 일행이 되었던 영국여인 아그네스가 생각났다. 그녀도 처음 보는 사람들과 별별 이야기를 다했었다. 길에서 만난 남자와 섹스할 뻔한 이야기까지. 나는 그로부터 많은 사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부부관계의 사소한 갈등에서부터, 그의 고향 오성에 과학단지가 조성되면서 7남매가 전부, 부모가 물려준 땅으로 부자가 되었다는 것까지. 길에서 만난 사람이지만, 교훈을 받기도 하고 주기도 했다. 길에서 만난 사람이기에 그것으로 충분했다.


▼ 덕산 읍내 전경. 왼쪽에 덕천강이 흐르고 있다. 강물은 지리산에서 내려온 것이다.


▼ 앞에 보이는 다리를 건너, 'ㄷ'자로 걸어야 한다.


▼ 덕산 오일장. 장날은 아니지만 약재상은 열었다.


▼ Y선생이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예상 외의 곳에서 오고 있다.


▼ 이곳에 골프 동호회가 있는 것 같다. 동호인들이 연습할 수 있는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관리가 안 되어 연습이 될까 싶었다.


▼ 내게 한국이 싫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런 쓰레기들이다. 제주올레길이나 지리산둘레길이나 이런 쓰레기를 치우는 것이 최우선일 것 같다.


▼ 경쟁에서 이기려면 이름부터 튀어야 한다. '여펜네'라는 펜션이름이 재밌다. '여기 펜션이 있었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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