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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는 이야기

지리산둘레길 - 셋

한창 청년이네! 그렇게 걸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새벽 1시에 밖에 있는 화장실을 다녀온 이후부터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6시에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일어나 출발준비를 했다. 화장실에 갈 때의 한밤중 날씨는 오한이 느껴질 정도로 추웠으나 아침의 날씨는 예상보다 포근했다. 할머니가 차려주는 아침을 맛있게 먹으며 아들 자랑을 들었다. 56살의 셋째 아들이 판사라며 어릴 때부터 착하기 그지없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엊저녁 전화로 흥정할 때는 방값 3만원에 아침 식사비를 포함하기로 했는데, 할머니는 그게 영 서운하다며 불만을 늘어놓았다.


식사비를 Y선생이 냈다. 8시 30분 여장을 챙기고 길을 나섰다. 설악산 오색약수 코스가 연상될 만큼 가파른 길이 계속되었다. 그래도 힘만 드는 오르막이 낫다. 어제 고생해서인지 나중에 나타날 내리막이 더 걱정되었다. 큰 폭포는 아니지만 상쾌한 아침공기 속에서 경쾌하게 떨어지는 물줄기가 보기에 그만이었다. 힘들 때는 배낭의 어깨띠에 걸어놓은 수건으로 이마에 배어나는 땀을 훔치며 바라보는, 경쾌한 소음과 함께 시원스레 떨어지는 물줄기에 힘들다는 생각은 순간 사라졌다.


가파른 산길에서 쉬기를 반복하며 올라 산등성이에 이르니 천막으로 지어진 찻집이 있었다. Y선생은 오미자차, 나는 칡차를 마시고 이번에는 내가 찻값을 계산했다. 아침식사나 차나 값이 같았다. 충분히 땀을 식힌 뒤에 산불 감시원이 있는 봉우리에 도달하기까지 두 시간이 걸렸다. 또 다시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좁을 길을 따라 오르고 내리기를 몇 번 거친 후에 도로를 만났다. 다행하게도 내리막은 어제와 달랐다. 편한 길이었다.


정오 무렵에 산 중간에 있는 매점에서 비빔밥을 시켰다. Y선생은 전에 지날 때 이미 들렸던 곳이어서인지 잘 아는 듯했다. 식당 아주머니는 상을 차리면서 묻지도 않는 딸 자랑을 했다. 의사라고 했다. 어디 가나 자식 자랑을 듣는다. 효도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부모가 자랑할 수 있게 해주는 자식이 예나 지금이나 효자고 효녀다. 이런 산골에서도 훌륭하게 자란 자식들이 있다는 것에, 아이들에게 항상 미안했던 마음이 다소나마(?) 가벼워진다. 비빔밥은 한참 만에 나왔다. 나물 몇 가지로 채워진 것치고는 음식 값 만원은 비싸 보였다. 식사 후 걷는 길에 더 이상의 산속 길은 나타나지 않았다. 고속도로 밑을 지나 산청이라는 작은 읍내가 보였고 꽤 큰 공장건물도 볼 수 있었다. 걷는 동안에 Y선생과 계속 대화했다.


그는 충북 오성이 고향이라고 했다. 일찍부터 서울에 유학했으나 공부는 잘하지 못했다고 한다. 겨우 대학을 졸업하고 조미료를 만드는 회사에 잠깐 근무하다가 시작한 사업은, 백화점에 납품해서 큰 성공은 아니더라도 견실한 중소기업으로 키웠으며 2년 전에 동생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은퇴했다. 이분이 들려주는 부인과의 사소한 갈등이 재미있었다. 무엇이든 아끼고 절약하는 부인의 습관이 불만이었다. 서울 여상을 2등으로 졸업해서 외환은행에 근무했다는 부인은, 무엇이든 최고급만 찾는 남편에게 비비 꼬는 소리를 잘한다는 거다. 정동진에 여행을 가서 24만원짜리 호텔에 들려고 했는데 부인이 펄쩍 뛰는 바람에 6만원짜리로 옮겼다는 에피소드를 들으며, 그 부인은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우리는 두 코스를 걸었다. 방곡에서 수철이라는 마을까지 5코스를 지나 수철에서 6코스 종점을 지나 어천마을이라는 곳까지 가기로 했다. 물론 이미 경험이 있는 Y선생의 결정이었다. 어천마을로 가는 길을 잘못 들어 잠시 헤맸다. 내가 처음에 제시했던 길이 맞는 길이었다. 길을 물으려 근처 집에 들어가 큰 소리로 사람을 찾았으나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근처 주차장이 있는 공터에서 아주머니를 발견하고 길을 물었다. 자신은 차만 타고 다녀서 가는 길을 잘 모른다며 길로 나가서 택시를 타라고 했다. 걸어갈 것이라고 하자 몇 살이냐고 물었다.


- 한창 청년이구먼. 그렇게 걸어다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노인용 보행보조기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다리가 불편한 노인들이 잡고 다니는 보조보행기가 옆에 있었다. 손으로 잡고 밀고 다니는 그 보행기는 제주에서나 서울 변두리에서 흔히 보는 것이었다. 작은 의자가 있어 앉을 수도 있고, 의자 밑에는 무얼 넣어두는 공간도 있다.


방향을 틀어 걷기 시작했다. Y선생은 다리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자주 쉬려고 했다. 겨우내 운동하지 않은 탓이라고 했다가 어제 펜션에서 운기조식(註: 호흡을 통해 기를 조절하는 건강관리법)을 너무 오래한 부작용이라고 했다. 걷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아무 문제가 없는 나도 덩달아 쉬었다. 성심원을 지나 ‘프란치스코’ 수도원 근처에서 쉬고 있는데 수도원에서 소나타가 나왔다. Y선생은 차를 세우고 어천마을 가는 길을 물었다. 중년 여성이 태워주겠다고 했다. 이정표로는 2킬로 정도 밖에 남지 않아서 내키지는 않았으나, 다리가 불편한 Y선생을 위해 동승했다. 동행이 있으면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 아닌가. 어촌마을 입구에서 내렸다.


광고판을 보고 몇 군데 전화했으나 영업하지 않았다. 물어서 찾아간 곳은 ‘Wild Flower’라는 펜션이었다. 깨끗했지만 가격이 너무 비쌌다. 아침을 포함 5만원에 합의해서 들어갔지만 둘이 함께 써도 충분한 크기였다. 샤워만 하고 하룻밤 자고 나오는데 5만원은 불만이었다. 어차피 따로 방을 쓰니까 이 양반하고 같이 다니게 되면 앞으로는 나는 다른 곳에 묵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와이파이가 잡히지 않는 바람에 주인을 찾았고 증폭기를 빌려 겨우 연결할 수 있었다. 첫 번째 글을 올리고 나서 잠을 청했으나 몸은 파처럼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았다. 방바닥이 너무 뜨거웠고 히터가 드나들 때 나는 잡음이 숙면을 방해했다. 엎치락뒤치락하며 두어 시간이나 잤을까.


이날 우리는 10시간 동안 25킬로를 걸었다. 거기에는 점심을 먹은 한 시간과 소나타를 얻어 탄 2킬로가 포함되었지만.


3일째 토요일이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피곤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은 아침식사를 방으로 갖다 주며 식사비를 달라고 했다. 무슨 소리냐며 방값에 포함되었다고 하자 주인 여자는 펄쩍 뛰었다.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치사하게 밥값 가지고 왈가왈부하며 싸울 수는 없었다. 어제 점심값은 Y선생이 냈으니 이번은 내가 치렀다. 문제는 또 있었다. 주인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길래, 7코스의 종점인 '운리'로 간다고 했더니 펜션 뒤의 계단을 가리키며, '저리로 가세요. 길을 따라 죽 올라가면 됩니다.'고 했다. - 어천마을에 있는 'Wild Flower(야생화)'라는 펜션은 이용하지 마시기를.


그리로 가면 '지리산둘레길' 표시가 나오는 줄 알았다. 아, 그들은 전혀 불필요한 친절을 베푼 것이었다. 우리는 둘레길을 따라 가는 것이 목적인데, 그들은 편한 지름길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지나는 차를 세워 물어보려고 했으나 세워주는 차가 없었다. 결국 스마트폰으로 한참 궁리한 끝에 산속으로 들어간 후에야 겨우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 아침에 산속에서 만난 물줄기가 경쾌한 음악을 연주하며 떨어지고 있다.


▼ 흐르는 물은 투명하고 맑았다.


▼ Y선생도 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 산불 감시원이 찍어준 사진. Y선생은 자신의 모습이 공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 제일 뒤에 보이는 봉우리가 천왕봉이다.

▼ 저 멀리 아래에 마을들이 보인다.


▼ 점심으로 산채비빔밥을 먹은 가게. 식당은 밑으로 한참 내려가야 했다.


▼ 지나는 논밭에는 일년 농사를 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펜션 부근에 쌓여있는 술병들. 펜션의 투숙객들이 마셨을 거다.


▼ 묵었던 펜션의 전경


▼ 불필요한 친절 때문에 한참을 돌았지만, 길은 걷기에 편했다. 마침내 둘레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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