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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는 이야기

지리산둘레길 - 넷

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오늘은 일요일이자 부활절이었다. 몇 년 전부터 신앙생활을 냉담하고 있으니 이렇게 편할 수(?) 없다. 예전 같으면 부활절 특송 연습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주말이라 그런지 많지는 않지만 가족이나 친구 단위로 등산하는 그룹들이 모처럼 보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손자들까지 6명과, 40대로 보이는 4명의 중년들이었다.


둘레길로 들어선 웅석봉 헬기장에서부터는 평탄한 내리막이었다. 즐거운 마음과 행복한 생각으로 '룰루랄라' 흥얼거리며 7코스의 종점인 '운리'를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겨우 차가 한 대 지날 수 있는 길에 차량이 한 대 서있었고, 그 곁에서 무언가 하고 있는 분이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분과 서로 쳐다보며 눈길이 닿은 순간이었다. 마치 부처님의 얼굴을 보는 듯했다. 환하게 웃는 그분의 얼굴 표정이 아주 행복하고, 눈빛은 어린애의 그것처럼 초롱초롱하며 반짝거렸다. 말을 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뭐 하고 계시는 겁니까?


- 아, 고로쇠액을 채취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친구들 하고 호스를 설치했는데 영 별로입니다, 하하하. 설치하는 건 혼자 할 수 없어도 거두는 것은 혼자 할 수 있거든요. 어디서 오셨습니까?


- 이분은 서울에서 오시고, 저는 제주에서 왔습니다.


- 어, 제주요? 실례지만 전직이 무엇이었습니까? 제주에 아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분은 6년 전에 고등학교 교사로 정년했다며 - 나중에 안 것이지만 교장 선생님이었다. - 제주의 많은 현직 교사들을 알고 있다고 했다.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는 중에도 그 환한 웃음과 천진스러운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Y선생은 그분에게 '운리'에 식당이 있는지를 물었다. 1년 전에 없었던 식당이 생겼을 리가 없었고, 예상했던 답변이 돌아왔다. 구멍가게 외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대화를 하느라고 잠시 머물렀던 발길을 다시 아래로 돌리며 그분과는 작별인사를 나눴다.


2~30분 내려왔을까. 뒤에서 찻소리가 나길래 우리는 길 한편으로 비켜서며 차가 지나기를 기다렸다. 그분의 차였다. 차를 세운 그분은 타라고 했다. 멀리서 자기 마을에 방문하는 손님을 식사도 하지 못한 채 그냥 떠나게 할 수는 없다며, 갑자기 반찬을 준비할 수는 없으니 라면이라도 먹고 가라는 거였다. 시간도 마침 12시를 훨씬 넘어 있었다.


3~4 킬로 정도 왔을까. 그분은 '운리' 마을 어귀에 우리를 내려주며 천천히 마을의 유적들을 둘러보고 집으로 오라고 당부했다. 그동안 물을 끓이겠다는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의 탑이 있는 그 동네는 몇 년 전에 문화유적지로 지정되어 증축이나 개조를 할 수 없도록 보호받고 있다는 말을 오는 찻속에서 들었다. 마을에는 이곳저곳에 합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플랭카드가 걸려 있었다. 교장선생의 집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대문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교장선생은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라면 4개를 뜯어 넣었다. 한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 선생님, 4개는 너무 많습니다.


- 아하, 나도 먹을 겁니다. 식은 밥도 있으니까 많이 드세요. 이렇게 줄 수 있어서 내가 행복합니다. 그냥 먹어주시면 됩니다. 이 얼마나 좋습니까. 멀리서 오신 손님을 굶겨 보내지 않으니 좋고, 손님들은 배고프지 않아서 좋고, 이렇게 서로 서로 좋으면 그냥 행복한 것 아닙니까? 하하하.


교사의 정년은 62세니까, 6년 전에 정년퇴임을 했다면 68세인 셈이다. 그분은 라면을 끓이며 음식을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미국과 캐나다에 살고 있는 결혼한 자식들이 있다는 것, 자신은 부모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는 것, 자식들에게 다 주고 죽을 때까지 충분한 연금을 받을 수 있어 걱정이 하나도 없다는 것, 사업에 실패하고 늦은 나이인 32살에 교직에 투신했다는 것, 친구들이 수시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찾아온다는 것, 어느 곳을 가나 제자가 있어 무슨 일이든지 도움을 받는다는 것 등의 이야기 거리가 끊임없었다.


집안 내부를 둘러보니 이층 높이의 내부는 지붕까지 높게 터져있어서 시원스러웠으며, 한쪽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어서 방과 거실로 이어졌다. 아랫층에는 작은 방과 공방 작업실, 부엌과 식당, 약초이름이 적힌 박스들, 악보가 올려진 지휘대, 한약을 제조하는 커다란 중탕기, 업소용과 가정용 냉장고 각 1대 등이 보였다. 마당에는 밭과 여나무 개의 양봉 벌통이 보였다.


막걸리와 원두를 직접 갈아서 만든 커피까지 마시고 나니 배가 빵빵해졌다. 너무 배가 불러 사양하고 싶었으나 사양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양이 적은 Y선생은 자신의 그릇에 담긴 것까지 교장선생의 눈을 피해 내게 덜어주었다. 그만큼 사양할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호의는 한없이 고마웠지만 남길 수도 없어 배가 터지도록 먹는 바람에 걷는데 불편할 정도까지 되었다. 2시 반에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우리는 일어섰다.


헤어질 때에도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냥 나그네일 뿐이다. 나그네는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면 되고, 주인은 주어서 행복하면 된다. 그뿐이다. 계단 근처 벽에 잔뜩 걸려있는 상패나 감사장을 둘러본 Y선생에게 그분의 성함을 물어보았다. 최진원 교장 선생님. 경남 진주의 사립명문 고등학교라고 한다. 교장선생은 그걸 둘러보는 Y선생에게 볼 필요없다고 말렸었다. 이름은 곧 잊겠지만 오늘의 추억은 오래 간직할 것 같다.


거기서부터 덕산까지 14킬로가 8코스다. 거기까지 가기로 했다. 오르막 경사가 심하지는 않았으나 산등성이 높이 걸린 길은 무척 좁았다. 왼쪽은 낭떠러지에 가까운 급경사로 위험한 탓에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돌부리에라도 채이는 날에는 큰일날 것 같았다. 경치는 그만이었다. 네 시간 이상을 걷는 동안에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백운계곡이라는 곳에서 양말을 벗고 물속에 들어갔으나 2~30초 이상을 견디기 힘들 만큼 차가웠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오솔길을 벗어나자 계곡의 물줄기를 따라 아스팔트 내리막 길이 이어졌다.


6킬로가 넘게 이어지는 내리막 길에는 한켠으로 감나무 과수원이 계속되어 이곳이 감과 곶감의 특산지임을 알리고 있었다. 거의 덕산에 이르러 민박집을 찾아들었다. 6시 반이었다. 10시간 동안 25킬로 넘게 걸은 것이다. 게다가 오늘 걸은 코스는 난이도가 둘 다 '상'으로 높았다. 4일째 걷기는 이렇게 행복했다.


▼ 운리로 내려가는 길이 이런 모습으로 계속되었다. 차가 한 대 지나갈 폭이다.


▼ 나는 이런 모습으로 걸었다. 추울까봐 미련스레 옷을 챙기는 바람에 배낭만 무거워졌다.


▼ 멀리 아랫쪽에 커다란 저수지가 보인다.


▼ 운리에서 본 유적 중의 하나.


▼ 매화에도 사연이 있어 보였다.


▼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이것 때문에 이 마을이 문화유적지로 지정되었다.


▼ 교장 선생님 댁. 멋진 모양의 매화 너머로 벌통이 보인다.


▼ 교장선생님 댁 주변


▼ 발을 담갔던 백운계곡

▼ 백운계곡을 건너는 다리


▼ 덕산으로 내려가는 계곡의 감 과수원. 10월 말에 오면 매달린 감으로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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