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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는 이야기

지리산둘레길 - 둘

젊은이들은 느지막이 떠난다고 했다. 그들은 아침을 컵라면으로 때울 요량인지 커다란 라면 두 개를 사놓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어차피 자기들 자는데 돈을 낸 것이니 필요없다고 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만원짜리를 놓고 나왔다. 숙소는 식당과 가게를 겸하고 있었기에, 아주 쉽게 생각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사람을 불렀다. 대답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는 내실로 보이는 곳까지 들어가 방문을 두드려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래도 별로 걱정하지는 않았다. 사람이 사는 곳이니 가다보면 다른 가게가 있을 걸로 생각하고 둘레길 표시를 따라 홀로 길을 나섰다. 아침은 굶는다고 해도 마실 물은 필요했다. 하룻밤을 자고 났더니 다리는 말짱히 회복되어 있었고 시간은 8시 45분이었다. 


작은 마을이라 그런 것인가. 가게는 더 이상 없었고 바로 둘레길의 방향을 가리키는 빨간색 화살표는 곧바로 가파른 소로를 가리켰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만큼 좁은 길은 급경사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가다보면 뭔가 나오겠지 하고 생각하며 무작정 산속으로 들어갔다. 금방 숨이 차고 땀이 흘렀다. 10분도 못 되어 옷을 하나 벗고 거추장스러운 모자와 함께 배낭에 넣었다.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을 보면, 어떻게 이곳을 벗어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산등성이를 오르락내리락하며 4~50분 걸었을까. 겁이 나려고 할 무렵에 도로가 나타났다.


내가 어디쯤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전날 식당에서 받은 지도를 폈다. 목적지는 4코스의 끝점인 동강이었는데, 지도를 보니 나는 벽송사에 와있고 동강에 가기 위해서는 다시 내려가서 다른 길로 가야했다. 허탈했다. 벽송사라는 절은 일종의 특별코스였다. 다시 그길로 내려가기는 싫었지만 할 수 없었다. 이왕 온 김에 절에 들려 물이나 실컷 마시고 싶었다. 절까지 한참 걸어 올라가 대충 둘러보고 샘에서 물을 마신 후, 다시 내려가는 중에 한 분이 등산복 차림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분에게 말을 걸며 길이 없다고 하자, 무슨 소리를 하느냐며 앞장섰다. 벽송사 입구의 오른쪽에 산으로 들어가는 둘레길 표시가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지도는 2년 전의 구버전으로 정확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게 동행하게 된 Y선생은 54년생이었다. 자신은 둘레길 21코스 300킬로를 전부 돌았다는 말과 함께 이번이 두 번째라며 둘레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제주 올레길처럼 쉬운 길이 아니었다. 물을 살 수 있는 가게도 없고, 음식을 사먹을 곳도 쉽지 않다고 했다. 한참을 오르다가 내리막이 시작되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내리막길은 한라산만큼 심하지는 않았지만 빨리 내려갈 수가 없었다. 전날의 무리한 산행 탓이었을까. 한참을 내려가자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했고, 스틱도 없이 걷는 것도 쉽지 않아 자꾸 쳐졌다.


숲에서 튼실하게 보이는 나무를 주어 지팡이 삼아 내려오다 부러지는 바람에 넘어졌다. 크고 작은 바위에서 크게 다친 줄 알았으나, 천만다행으로 무릎에 찰과상만 입었을 뿐이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낙향’님이었다. 점심을 같이 하자며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를 물었다. 산중에 있으니 장소를 알 길이 없으나, ‘용유담’이 몇 백 미터 남았다고 적힌 팻말을 본 기억은 있었다. 설명할 길이 없어 결국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가겠다고 했다.


용유담까지 내려온 우리는 평상에 앉아 쉬며 잡담을 나누며 쉬다가 출발했다. Y선생은 물과 먹을 것을 건네주며 아침을 굶은 것을 염려해주었다. 그리고 먼저 산행의 이 장소에서 RV를 가진 사람을 만나 진기한 음식을 얻어먹은 이야기를 했다. 강을 따라서 얼마를 걸었을까. ‘낙향’님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용유담에 거의 다 왔다고 했다. 맙소사! 어딘지 몰라 포기하고 돌아가겠다는 양반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아침을 거르기도 했지만 조금 전까지 피로에 지친 나로서는 말 그대로 ‘불감청이나 고소원’이었다.


그분을 만나 차를 타고 식당을 찾았다. 보이는 식당을 들어가면 문이 닫힌 채 아무도 없었다. 10분쯤 가다가 지나는 노인을 만나 물어 찾아간 식당에서 낙향님은 오리를 시켰고 나는 아침, 점심, 저녁을 한자리에서 해결했다. 미안하고 죄송스런 마음에 계산은 내가 하겠다고 우겼으나, 낙향님은 자신의 '나와바리'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물까지 몇 병을 얻었고 그분은 돌아갔다. 마을사람에게 물어보니 그곳이 바로 오늘의 목적지인 동강이라는 마을이었다.


Y선생과 나는 그곳에서 3킬로 정도를 걸어 ‘방곡’이라는 마을에서 쉬기로 했을 때는 오후 3시였다. 그곳에는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이 있었다. 내가 추모공원을 둘러보는 동안에 Y선생은 숙소를 전화로 알아보았다. 1951년 공비를 소탕한다며 국군 1개 대대가 무고한 산청, 함양 주민 700명 이상을 학살했다고 한다. 제주 4.3사건과 다를 게 없었다. 그놈의 이데올로기는 아직도 살아서 민족을 양분하여 종북이니 좌빨이니 하며 서로를 손가락질하는 것을 보면 정말 끈질긴 생명력이다. 열 도둑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선량한 한 사람을 도둑으로 누명을 씌우면 안 된다는 것이 법 논리인데, 4.3사건이나 산청함양사건은 몇 명의 공비를 잡기위해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니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낙향’님 덕분에 예정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숙소에 들어 어제의 피곤함을 다소나마 풀 수 있게 되었다. 차를 타고 온 구간은 강을 따라 평지를 걷는 구간이라 특별할 것도 없었다. 망외의 소득도 있었다. 남원에서 점심을 사기위해 차를 갖고 온 ‘낙향’님의 정성에 Y선생은 나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 분과 계속 동행하게 되었으며, 사업을 해서 돈을 벌고 풍족하게 살게 된, 나와는 다른 인생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 양반이 방을 같이 쓰기를 원하지 않는 바람에, 숙박비를 절약할 수 있겠다는 내 희망을 무참히(?) 짓밟혔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잠자기 전에 '운기조식'이라는 무협지에 등장하는 호흡을 하는 분이었다.


샤워를 하면서 땀에 전 속옷을 세수비누로 빨아 널었다. 첩첩산중의 낯선 동네 방곡에서 이틀째 밤을 맞는다.


▼ 잠을 자고 난 후 아침에 숙소에서 바라본 금계 마을


▼ 아침과 생수 사는 것을 포기하고 건넌 다리. 전라북도 남원읍에서 출발한 걷기가 하룻만에 바뀌어 경상남도 함양군이라고 쓰인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 다리를 건너자마자 곧 이런 숲길로 접어들었다.


▼ 이런 멋진 길도 만났다.


▼ 가파란 길이 연속되었다. 공기는 차가왔지만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 숨이 턱에 바쳤을 때 갑자기 이런 길이 나타났다.


▼ 길 양편에 쓰인 글귀가 멋졌다.


▼ 친절하게도 글귀에 대한 해설도 있었다.


▼ 지도를 보고 잘못 왔다고 판단하고 돌아가려다 물을 마시기 위해 절에 들렸다.


▼ 벽송사의 모습


▼ 국군이 산청, 함양의 무고한 주민 705명을 살해한 사건을 추모하기 위한 공원


▼ 하루 머문 민박집의 마당에 핀 매화와 산수유가 봄이 목전에 왔음을 알리고 있다.


▼ 숙소의 전경. Y선생이 작년에도 머물렀다고 한다. 화장실과 샤워실에 가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 숙소 근처에서 본 기념비와 동상.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답게 가는 곳곳마다 역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 숙소의 입구. 형제펜션이라고 되어 있다.


▼ 4만원짜리 방. 3만원으로 깎아서 들었다. 아침식사를 포함했는데 비수기라 가능했다.


<후기>

여행 중에 쓰는 글입니다. 문맥상의 오류나 맞춤법에 문제가 있더라도 양해를 바랍니다. 집에 돌아간 후에 천천히 고치겠습니다.

차로 다녀도 찾기 힘들었던 음식점을, 만약 걸어서 찾았다면 불가능해서 저녁 때까지 굶었을 겁니다. 그러나 '낙향'님 덕분에 하루종일 굶는 것을 면한 셈이지요. 에이구, 그저 감사했다는 말 외에 할 말이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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