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에서 사는 이야기

안경

안경과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이 50년 가까이 되었다. 중학 입시생이었던 국민학교 6학년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판자집에서 살 만큼 가난했어도 자식을 명문 중학교에 보내고 싶었던 모친은, 없는 살림에 과외공부까지 시키며 열두 살짜리 꼬마를 새벽 5시부터 자정까지 공부하게 만들었다.


안경을 쓴 아이들이 거의 없었던 시절이라 칠판 글씨가 안 보여도 이유를 알지 못하고, 옆에 앉은 짝의 공책을 보며 칠판을 대신했다. 그렇게 공부하고도 입시에 떨어지고 난 후, 친척집에서 TV를 보는 내 모습을 본 선친의 사촌동생 되는 분의 지적으로 안경을 써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후부터 안경은 인생의 일부분이 되었다.


정확한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최근에 읽었던 기사에 의하면, 아이들의 시력은 수정체의 문제가 아니라 수정체와 망막 사이의 거리가 늘어나는 바람에 망막 앞에 초점이 형성되면서 생기는 현상이라는 것이, 해외 연구진에 의해 밝혀졌다고 한다. 그리고 수정체와 망막 사이의 거리가 늘어나는 주요한 원인이 햇빛 부족이라고 한다. 자연광에 의해 물체를 봐야하는데, 전기불과 같은 인공 조명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아진 것이 원인이라는 거다. 안경을 쓰면 공부 잘하는 아이로 인식되던 50년 전을 떠올리면 일리가 있을 법도 하다.


서울에 온 김에 남대문 시장을 갔다. 목적은 두 가지였다. '순희네 빈대떡'의 녹두지짐은 그 옛날 모친이 만들어주던 지짐과 가장 맛이 비슷했다. 물론 모친의 그것에는 한참 못 미치지지만 부족하나마 맛의 향수를 달래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리고 3년이 넘어 돗수가 맞지 않는 안경을 바꾸고 싶었다. 지금은 안경점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있지만 남대문 안경골목은 일본까지 알려져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미국에서 살 때는 올 때마다 선글라스를 포함 몇 개씩 맞춰가기도 했다. 의료보험에서 1년에 한 개까지 50불 리베이트를 받아도 한국이 훨씬 싸고 간편했다. 거기다가 미국에서는 시력검사비까지도 따로 내지 않았던가.


안경점의 직원은 다초점 렌즈를 적극 권했으나, 미국에서 멀티포컬 렌즈를 처음 맞추었을 때 어지럼과 두통 때문에 포기했던 기억이 있던 나로서는 돈을 낭비하는 리스크를 피하고 싶었다. 그러자 처음 들어보는 안경을 권했다. '데스크탑'과 '오피스' 용 안경이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도 아니고 안경에 무슨 데스크탑이 있고 오피스가 있는지 의아했지만, 점원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럴 듯했다.


일반적인 다초점 렌즈는 안경의 위, 아래, 양 옆, 가운데 등 모든 부분의 돗수가 틀려서 두통이 오지만, 데스크탑 용은 책상에 앉아서 일할 때만 적용되는 다초점 렌즈로 컴퓨터 모니터를 보거나 책상 위에 있는 서류를 볼 때 불편함이 없을 정도만 초점을 다그게 해서 부작용이 적다는 설명이었다. 책상에 앉아 작업하는 시간이 많은 내게는 솔깃한 말이었다. 모니터를 보면서 글을 쓰다가 작은 글씨의 책을 볼 때는 안경을 벗어야했기 때문이었다. 오피스 용은 먼 거리를 제외한 짧은 거리만 포커스를 맞춘 것이다. 최근에 개발되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참, 세상에는 아직도 개발할 것도 많고 아이디어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안이 시작된 40대 중반 이후, 생활이 많이 불편해졌다. 어중간한 거리에 있는 것은 안경을 써도 벗어도 잘 보이지 않는다. 수리를 위해서 컴퓨터 내부를 들여다 볼 때나, 자동차 본넷을 열고 부품을 교체할 때가 그렇다. 그런 일에는 재미까지 있었던 사람이지만, 이제는 흥미를 잃고 점점 만지기 꺼려지는 가장 큰 이유다. 그런 제품이 있는지 처음 알았으니까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이번에는 원래 생각대로 평상시 용과 컴퓨터 작업 용으로 두 개의 안경을 맞췄다. 7만원과 3만원이었다. 작년 태국 여행 시 안경점에 들려 알아보았던 것에 비하면 가격까지 만족스러웠다.


안경이 준비 되는 사이에 빈대떡 가게에서 녹두지짐 한 쪽에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있는데 후드를 뒤집어 쓴 두 젊은 여성이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 후드를 벗으니 코와 눈 언저리에 반창고를 잔뜩 붙인 얼굴이 드러났다. 핏자국까지 보이는 그들은 중국말로 말하고 있었다. 40 전후로 보이는 가게 아주머니가 유창한 중국말로 후드의 여성들과 대화했다. 말은 못 알아들었지만 상황은 분명했다. 한국으로 성형수술을 하러 온 중국의 젊은 여성들이었다. 뉴스로만 보았던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가게의 점원은 중국에서 온 중국교포일 것이다.


새로 한 안경으로 바꿔 쓰고 나오니 거리가 더 환하고 분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남대문시장 거리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이고 많은 외국인들이 보였다. 길거리에 둘러 서서 주전부리를 사먹거나,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거나, 가게주인과 계산기를 두드리며 흥정하는 외국인들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Written by Duke, 3. 21. 2016.

'한국에서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둘레길 - 다섯  (0) 2016.04.13
지리산둘레길 - 넷  (0) 2016.04.13
지리산둘레길 - 셋  (0) 2016.04.13
지리산둘레길 - 둘  (0) 2016.04.13
지리산둘레길 - 하나  (2) 2016.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