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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는 이야기

지리산둘레길 - 하나

아침 7시가 되는 것을 보고 부천의 동생 집을 나섰다. 걸어서 30분 걸릴 것으로 예상한 부천 소풍 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7시 20분경으로 시간이 한참 남았다. 남원행 직행버스는 예정된 7시 50분에서 1분도 틀리지 않게 출발했다.


처음부터 ‘지리산둘레길’을 걷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대전에 들려 아는 사람을 만나고 전주나 군산을 거쳐 목포에서 섬 두어 개를 둘러보겠다고 막연하게 작정한 것은 한국에 태어난 사람이 전라도 지방을 여행한 경험이 별로 없다는 것이 이유이었다. 인터넷으로 코스를 대충이라도 정하려고 조카 컴퓨터 책상에 앉았고, 책상 위에 있는 탁상달력을 우연히 보았다. ‘한국의 걷기 좋은 곳’이라는 타이틀의 달력 첫 장이 ‘지리산둘레길’이었다.


60년 넘게 열심히 산 것에 대해 스스로에게 기념적인 이벤트를 하고 싶었고 그것이 걷기였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도저히 걸을 수 없을 때까지 걸어보겠다는 발상이었다. 제주에서 만난 C선생은 몇 년 전에 텐트를 짊어지고 제주 올레길을 쉬지 않고 걸었는데, 연속해서 오륙 일을 걸으니까 발에 물집이 생기고 저녁이 되면 몹시 아팠으나 다시 아침에는 걸을 만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분은 48년생이었다.


제주 올레길과 비슷하게 총 21개 코스, 285Km로 이루어진 ‘지리산둘레길’을 한 번에 다 걸을 수는 없을 거였다. 미리 남원에 거주하는 ‘낙향’님에게 연락했다. ‘낙향’님은 최근에 카페에 가입한 분으로, 이미 역이민하여 남원에 살고 있다고 가입인사에 적혀 있었다. ‘낙향’이라는 닉으로 보아 고향으로 돌아온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말에는 사투리가 전혀 없어서 의아했다. 정오인 예정시간보다 15분 정도 늦게 도착한 버스에 내리니 처음 보는 분이 반갑게 맞이했다.


친구가 한다는 추어탕 집에 점심을 예약했다며 조금 멀지만 그곳으로 가자고 했다. 차에서는 새 차 특유의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고 남아 있었다.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국에서는 30년 가까이 지냈으며 SF에서 살다가 귀국했다는 그분의 아버님 역시 이북 출신으로 경찰에 투신하여 지리산 공비를 토벌하러 남원에 부임하는 바람에 고향이 되었다는 소설에 읽은 듯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우연의 일치로 그분의 아버님과 내 선친의 고향도 평양 근처로 동갑이었으며 낙향님도 나와 같은 나이로 부모님이 사투리를 쓰지 않아 자신도 그렇게 되었다며 내 의문을 풀어주었다.


이야기를 나누자면 끝이 없겠지만, 다시 만나기로 하고 맛있는 점심을 끝냈다. 식사를 한 곳은 ‘인월’이라는 ‘지리산둘레길’ 3코스 시작점이어서 의도치 않게 3코스부터 걷게 되었다. 1코스 시작점으로 데려다 주겠다는 고마운 제의를 어차피 완주할 것도 아닌데 아무 곳에서나 출발해도 상관없다는 말로 사양했다. ‘낙향’님과 헤어져 걷기 시작했을 때는 두 시가 가까웠다.


식당주인이 알려준 대로 방향을 잡았으나 이상하게 아스팔트길만 계속되었다. 밭에서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본 뒤에야 ‘지리산둘레길’에 제대로 들어설 수 있었다. 걸으면서 비로소 주위를 살폈다. 어디를 보아도 높고 낮은 산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었다. 살면서 웬만한 산은 거의 가보았지만 이상하게도 지리산은 기회가 없었다. 아니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때마다 무슨 일이 생겨 가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날씨였다. 3월 말이라 진달래도 만개하고 웬만큼 포근할 줄 알았다. 남원의 새벽기온은 여전히 영하이었다. 껴입을 옷을 사 넣는 바람에 배낭만 무거워졌다. 이른 봄이라 볼 것은 별로 없으나 걷는 즐거움으로 충분했다. 한참을 걸어도 걷는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산길로 접어들었다. 걸을수록 땀이 나고 배낭의 무게가 어깨에 느껴졌다. 계곡의 시냇물에서 세수를 하고 옷을 하나 벗어 모자와 함께 배낭에 쑤셔 넣었다.


걷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골짜기를 타고 부는 바람은 상쾌했다. 걷는 사람을 처음 마주치기도 했다. 산등성이를 넘어가는데 두 명의 젊은이가 산행차림으로 쉬고 있었다. 그들과 눈인사만 하고 계속 걸었다. 주막을 보니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났다. 목이 그만큼 말랐다. 그러나 철이 이른 탓일까. 아무도 없었다.


그 바람에 아까 보았던 두 젊은이가 뒤따라 와서 함께 걷게 되었다. 어디서 왔는지, 언제부터 걷는지, 어디로 가는지 등으로 대화하다가 사람이 있는 주막을 만나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막걸리와 함께 나온 산나물이 입맛을 돋우었다. 35살, 45살의 젊은이들과의 동행은 이렇게 시작했다. 거기서부터 다음 마을까지 거리가 꽤나 길었다. 6시가 훨씬 넘어 어느 마을에 다다랐다. 민박이든 펜션이든 들어가서 하룻밤을 묵어가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다.


두시부터 걸었으니 네 시간이 훨씬 넘었다. 천천히 걸으려했으나 지랄 같은 성질 탓인지, 길만 나서면 걸음이 빨라진다. 계산해보니 평균적으로 시간당 4킬로의 속도로 걸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마을에 있는 벽보나 현수막을 보고 전화해보니 황토방이라 잘 수가 없다는 거다. 지금 불을 때면 내일 아침에나 따뜻해진다며 다음 마을에서 숙소를 찾으라고 한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3~40분 걸린다는 다음 마을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산길로 들어섰을 때는 깜깜해서 손전등 없이는 걸을 수가 없었는데, 한쪽이 터진 줄도 모르고 배낭 옆 포켓에 쑤셔 넣었던 작은 손전등은 그곳에 없었다.


날은 깜깜하고 산속의 오솔길은 올라가기만 하고 당황스러웠다. 젊은이들의 손전등에 의지해 걸으니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당황이 걱정으로 바뀔 즈음 무사히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막걸리를 샀기 때문일까. 젊은이들은 괜찮으면 같이 묵자고 했다. 흔쾌히 승낙하고 샤워를 하는 사이에 그들은 소주와 라면을 사와 라면을 끓였다. 또 주인에게 식은 밥과 김치를 몇 쪽 얻어와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그들이 따라주는 소주를 한잔 받으며 오늘 하루도 쉬 잊히지 않는 추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피곤한 몸을 뉘였지만 잠은 쉽게 들지 않았다. 이런 저런 꿈을 꾸며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아침을 맞았다. 두시부터 여덟시까지 여섯 시간 동안 전라북도 ‘인월’에서 경상남도 ‘금계’까지 19.3킬로의 ‘지리산둘레길’ 3코스를 그렇게 끝냈다. 지도에는 8시간 거리로 표시되어 있었다. 제주의 올레길은 이곳에 비하면 평평한 신작로를 걷는 셈이었다. 그만큼 힘들었다. 최용석과 원일재 두 젊은 친구의 이름은 쉬 잊겠지만 오늘의 추억은 오래 기억할 것 같다.


▼ ‘지리산둘레길’의 표시다. 붉은색 화살표가 순방향, 검은색이 역방향이다.


▼ 숲속의 오솔길은 마른 낙엽만이 수북이 쌓여 있을 뿐, 나무들은 잎을 달고 있지 않아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 산속에 무슨 갤러리가 있는지는 몰라도 길을 안내하고 있다. 나는 그냥 지나쳤다.


▼ 봄을 알리는 꽃들이 드문드문 나타나 외로운 길손의 마음을 달래준다.


▼ 이런 모습으로 음악을 들으며 정처 없이 나선 길이었다.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갈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떠난 길이었으나 큰 오산이었음이 곧 밝혀진다.


<후기>

지난 목요일인 3월 24일의 일입니다. 지난 5년 동안 한국에서 살면서 인터넷이 되지 않는 곳은 처음입니다. 그만큼 오지입니다. 오늘 3일 만에 인터넷이 되는 숙소에 들어와 글을 올려봅니다.

첫날부터 고생을 좀 했습니다. 6시간 만에 20킬로 가까이 걸은 것입니다. 평지라면 별 것 아니겠으나 쉽지 않은 재(고개)를 세 개나 넘었습니다. 스틱이 귀찮아서 갖고 다니지 않는데, 이곳은 스틱이 꼭 필요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힘이 들었습니다. 가을이 아닌 게 아쉽지만 그래도 눈에 들어오는 경치는 아주 좋았습니다. 며칠을 걸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소 일주일은 걸으려고 합니다. 보름을 걸을 수 있으면 더 좋겠지요.

인터넷이 느린 탓에 사진을 올리는 것이나 글 쓰는 것도 불편하지만, 피곤한 것이 더 커서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참, '낙향'님에게 점심으로 추어탕 잘 먹었다는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을 빼먹었네요. 감사합니다. 다음날 더 큰 신세를 지게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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