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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사는 이야기

지리산둘레길 - 일곱

지리산둘레길 1, 2코스를 한 번에 걷다


엿새 째 아침이다. 저녁에는 지치고 아프고 땀에 잔뜩 절어 피곤하지만, 아침이 되면 말끔히 회복되어서 다시 나서는 길이 상쾌하다. 오늘 걷는 코스는 전남 구례 산동에서 전북 남원 주천으로 이어지는 ‘지리산둘레길’ 마지막 15킬로 구간이다. 산동에 못 미치는 곳에서 숙박했으니까 17킬로 정도를 걸어야 한다. 더 갈 수 있어도 주천까지만 가기로 했다. 빨래도 밀렸고 일찍 쉬고 싶었다.


길표시가 나타나지 않아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등 헤매다가 겨우 코스에 들어설 수 있었다. 산동면이라는 동네로 들어섰다. 돼지머리 국밥이라는 간판이 정겹게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6천 원짜리 국밥을 시켜놓고 주변을 돌아보니 예쁘게 생긴 병에 붉은 색이 도는 말간 액체가 담겼다. ‘산수유주’라고 했다. 산수유로 유명한 고장의 지역 술인 것이다. 아침이긴 하지만 술꾼이 생전 처음 보는 술을 놓칠 수는 없다. 국밥을 안주로 해장술을 했다.


혼자 걷는 길도 나쁘지 않다. 바람을 벗 삼아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다. 생전 처음 와본 곳이지만 낯설지가 않았다. 구불구불한 소나무도 오히려 다정스럽다. 제주에는 쭉쭉 뻗은 곧게 자란 삼나무가 많다. 보기에 좋을지는 몰라도 무언가 어색해서 정겨운 느낌이 없었다. 미국에 살면서 보는 나무들도 그랬다. 왠지 친근감이 없고 낯설었다. 이곳은 달랐다. 눈길이 닿는 모든 것이 친근했다.


전남과 전북을 가르는 ‘밤재’로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기는 했으나 길은 넓고 편했다. 가는 동안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했다는 기념공원도 있었고, 수령이 천 년이 되었다는 이곳 산수유 조상 나무도 보았다. 가면서 갑자기 어떤 생각이 스쳤다.


어제의 일이다. 고개를 오르다가 산책을 하는 부부를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상 좋은 남자는 50년생, 범띠라고 했다. 경치도 멋지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라고 느낌을 말하며, 집값은 어떤지를 물었다. 1~2천만 원이면 살 수 있는 빈집들도 있다는 거였다. ‘비영리 법인’을 만들어 그런 집들을 구입해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수리한 후, 역이민하는 분들에게 분양을 한다면 자금이 없어 돌아오고 싶어도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젊은이들은 도시로만 몰리고 농촌은 노인들 차지가 되어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지방의 고민이 된지 오래되었다. 심지어 농촌으로 새로 전입하는 인구가 있으면 지방정부는 중앙정부로부터 예산지원까지 받을 수 있다고 하니, 그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번 총선도 인구비례로 국회의원 수를 조정하다 보니 영호남은 의원 수가 줄고 도시는 늘어났다. 한 마을에 서너 가구씩만 은퇴한 교민들을 위해 조성하면 서로 의지하며 노후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밤재’를 넘어 내려오는 길도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좁고 가파른 산길이 나타났다. 얼마나 가파른지 줄을 잡고 겨우 올랐고, 어떤 곳에서는 네발로 기다시피 올라야 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1코스 시작점이자 마지막 코스 종점인 주천에 도착해서 시간을 보니 3시 반경이었다. 아무도 없는 안내소에서 ‘송림산장’이라는 민박집 전화번호를 알아내 연락하니, 주인은 한참 후에 들어갈 거라며 나보고 먼저 이층 202호로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 빨래는 나중에 자기가 가서 세탁기를 돌릴 것이고, 방에서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샤워를 하고 아래층에 있는 식당에 가서 이른 저녁을 먹으며 소주 한 병과 안주를 시켰더니 양이 너무 많았다. 불필요한 안주 때문에 미련스레 많이 먹고 말았다. 언제나 철이 들까.


주인아주머니는 빨래를 말려서 개주기까지 해서 아침에 주었다. 너무 고마워서 약간이나마 수고비를 주려고 했더니, 자기는 세탁소가 아니라며 펄쩍 뛰었다. 숙박비조차 ₩25,000원으로 지금까지 가장 쌌다. 잠도 모처럼 아주 잘 잤다. 나는 이 민박을 블로그에 올리겠다고 했고, 아주머니는 그렇게 해달라며 기분 좋게 웃었다. (1코스 시작점에서 송림산장 010-2751-3689 을 많이 이용해주세요. 숙소는 2층이고 괜찮은 식당이 1층에 있어 아주 편합니다.)


이제 일주일째다. 주천에서 운봉까지 14.7킬로인 1코스는 초반 4킬로 정도가 무척 힘들었다. 가파르고 좁은 산길은 아슬아슬하기까지 했다. 그곳을 벗어나자 다음부터는 쉬웠다. 길도 넓고 평탄하게 완만한 내리막이었다. 커다란 저수지를 끼고 걷는 길이 끝나자 무인 카페가 있었다. 2천원짜리 막걸리를 마시고 3천원을 돈 통에 넣었다. 운봉 마을에 도착하니 1시를 약간 넘었을 뿐이었다. 막걸리 탓인지 시장기가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식당이 언제 또 있을지 몰라, 짬뽕전문 음식점을 만나 맛있게 먹고 다시 2코스 끝점인 ‘인월’을 향했다.


‘인월’에서 금계까지 3코스 첫날 ‘낙향’님과 점심을 먹은 추어탕 집에서 출발해서 중간부터 걸은 코스다. 일단 어떻게 되든 지간에 그곳까지 가보기로 했다. 중간에 힘들어서 쉴 생각도 없지 않아 민박집에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인터넷이 안 된다는 말에 포기했다. 2코스는 지금까지 걸은 중에 가장 재미없는 길이었다. 그냥 평지를 하천을 따라 지루하게 걷는 곳이었다. 지나는 길에 국창이라는 명칭을 얻은 판소리 명창 ‘송흥록’ 기념관이 있었다.


중간에 24번 국도를 건너는 길이 있었다. 거기서 그만 길을 놓치고 말았다. 차가 많이 다는 길이라 조심하라는 안내문이 있어 국도를 따라가면 길표시가 있다고 판단했는데 착오였다. 국도가 계속되었지만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결국 물어서 둘레길 코스를 찾아간 것은 2코스의 끝 무렵이었다. 이곳에서 민박집을 알아보았으나 역시 인터넷이 되는 곳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모텔을 찾아들었다.


7일째의 일정으로 1코스와 2코스를 합해 24.6킬로를 8시간 반에 걸쳐 끝냈다. 이로써 ‘지리산둘레길’은 1, 2, 3, 4, 5, 6, 7, 8코스와 20, 21 코스를 합쳐 10개 코스를 걸은 셈이 되었다. 물론 중간에 차를 얻어 타기도 했지만 말이다. 7일 동안 124킬로를 걸었다. 험한 산길도 있었고, 강변을 따라 걷는 편한 길도 있었으며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마을도 지났다. 오래도록 이 기억을 간직할 것이다.


▼ 하룻밤 묵었던 모텔이다. Steamy한 분위기의 곳이었지만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 이곳에서 아침을 먹었다. '돼지머리국밥'이라고 적은 사인판이 정겨웠다.


▼ 전라도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반찬이 정갈하고 맛있다. 식사가 6천원, 산수유 술이 6천원이다.


▼ 이런 팔각정은 제주에서 걸을 때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비스듬히 뻗은 소나무가 더욱 정취를 더하고 있다.


▼ 산수유가 가득한 집


▼ 이 산수유의 수령이 천 년이라고 한다. 이 지방 모든 산수유의 조상나무라고 적혀 있었다.


▼ 충무공의 백의종군을 기념하는 공원.


▼ 산자락의 이곳 저곳에서는 이렇게 맑은 물이 어디서나 흐른다.


▼ 대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이 참 멋드러진다.


▼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산등성이를 넘은 것이 어제 일이다.

▼ 밤재. 이 고개가 전남과 전북을 구분한다.


▼ 제주도 아닌데 왠 돌 하루방?


▼ 두 그루의 산수유 나무가 터널을 만들었다.


▼ 드디어 '지리산둘레길' 시작 코스이자 마지막 코스이 끝점에 왔다.


▼ 1코스에 있는 안내소. 아무도 없었지만 이곳에서 민박집 '송림산장'의 전화번호를 얻었다.


▼ 송림산장. 2층이 민박집이고 아랫층은 음식점이라 편리하다. 6천원짜리 음식에 반찬이 9가지나 딸려 나왔다. 다 맛있었다. 주인은 다른 사람이었다.


▼ 1코스를 시작한지 30분도 안 되어 만난 산길은 아주 험난하고 힘들었다.


▼ 마을 정경이 아름답고 정답다.


▼ 저수지의 이름은 모르겠으나 두루미가 날고 새들의 소리와 함께 평화롭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 강을 따라 이런 벚나무 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 곧 꽃이 피려는 듯, 꽃봉오리가 잔뜩 도톰해져 있다.


▼ 운봉읍내의 모습


▼ 2코스가 시작되는 지점. 바로 직전에 짬뽕 점심을 먹었다.


▼ 이성계가 이곳에서 왜구를 물리쳤다는 공적이 적혀있다.


▼ 국창 송흥록 선생의 생가


▼ 고생은 했지만, 그리고 혼자 걸었지만 1, 2코스를 완주한 즐거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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