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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단순한 삶

1.


단순한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의미할까? 라는 질문에서 이 글을 시작한다.

우선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티아(Wikipedia)에서는 단순한 삶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단순한 삶은 생활양식을 단순화하는 여러 자발적인 실천과 운동을 가리키며, 소유를 줄이거나 자급도를 높이는 것 등이 있다. 단순한 삶이란 원하는 것을 가짐으로써가 아니라 필요한 것을 가짐으로써 만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금욕주의가 일반적으로 단순하게 사는 것을 추구하고 사치와 낭비를 경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꼭 금욕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또한 단순한 삶은 어쩔 수 없는 가난이 아닌, 선택에 의한 자발적인 생활양식이다.


사람들은 종교적 이유나 건강 상의 이유로, 가족 및 친구들과 더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일과 여가의 균형을 위해서, 개인적인 취향을 따라서, 검소하게 살기 위해서, 환경적인 이유로 단순한 삶을 선택한다. 물질주의나 과시적인 소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나타나는 경우도 있으며, 때로 자연환경보호, 탈성장, 사회정의, 인종 다양성, 조세 저항, 지속 가능한 발전 등과 같은 반소비주의나 반전 운동의 사회·정치적 목적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종교적 배경

많은 종교적 전통이 단순한 삶을 지지한다. 철기 인도의 사문 전통이나 석가모니, 성서의 나지르인(특히 세례 요한과 같은)을 예로 들 수 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애먼 헤나시, 레프 톨스토이,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알베르트 슈바이처, 마하트마 간디 등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영감이 그들을 단순한 삶으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소비와 근로 시간과 소유를 줄이기

어떤 사람들은 소비를 줄임으로써 단순한 삶을 실천한다.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지출을 줄임으로써, 돈을 버는 데에 들이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그렇게 확보된 시간은 취미 생활이나 봉사 활동 등에 쓰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남는 시간을 예술이나 공작과 같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에 사용한다. 수엘로나 마크 보일과 같은 사람들은 돈으로부터 분리된 삶을 실천함으로써 아예 돈이 없이 사는 삶을 살아 내기도 했다. 또한 지출을 줄임으로써 저축을 늘려 재정적 독립이나 조기 은퇴가 가능하게 될 수도 있다.


영국의 풀뿌리 운동인 National Downshifting Week은 참가자들에게 적게 가지고 사는 삶을 기쁘게 받아들일 것을 장려한다. 이 캠페인의 창시자이자, 영국에서 다운시프트와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해 글을 쓰고 취재하는 트레이시 스미스는 "더 많은 돈을 쓸수록 돈을 버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하고,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듭니다"라고 말한다. National Downshifting Week은 참가자들이 '느리게 살고 푸르게 살기'(Slow Down and Green Up)를 실천하도록 장려한다. 또한 개인이 친환경적인 정책과 습관을 받아들이고, 기업이 사회적·환경적 책임을 이행하며, 학교에서는 친환경적인 수업 환경이 조성되고 수업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여러 방안을 제시한다.


소유를 줄이거나 집의 크기를 줄이는 것 또한 단순한 삶의 형태가 될 수 있다. 100 Thing Challenge는 딱 100개의 물건만 소유하고 단순하게 살자는 풀뿌리 운동이다. 작은 집 운동은 통나무 집이나 오두막 같이 대출 없이 마련할 수 있고 환경에의 영향도 적은 집에 사는 사람들의 운동이다.


자급도를 높이기

단순하게 사는 하나의 방법은 귀농을 통해 식량을 자급함으로써 돈과 경제에 대한 의존성을 낮추는 것이다. 톰 호지킨슨은 자유롭고 단순한 삶으로 가는 열쇠는 소비를 멈추고 생산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단순한 삶'을 설명하는 것이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간단하지 않은 위 설명에서 키워드만 골라 낸다면, '원하는 만큼 가져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만 지니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것과 '어쩔 수 없는 가난이 아니라, 선택에 의한 자발적인 생활양식'이라는 것이다.


또, 눈에 확 들어오는 문장이 하나 있다. "더 많은 돈을 쓸수록 돈을 버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하고,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든다."라는 말로, 한 주 전에 썼던 '풍요 속의 불행, 빈곤 속의 행복'이란 글에서 말하고 싶었던 주제이기도 하다.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벌기 위해 직업을 가진 엄마는 사랑하는 아이들과 같이 할 시간을 희생할 수 밖에 없다.


사실 내 경우는, '선택에 의한 단순한 삶'을 실천하는 다른 분들과는 달라서, 비자발적인 강요에 의해 선택되어진 단순한 삶이었다. 그러나 행복해서 웃던지, 웃어서 행복하던지 결과는 비슷하다.^^


지금 나는 아무런 직함도 갖고 있지 않다. 굳이 직함을 억지로 만든다면, '역이민 카페지기'라는 직함(?)이 있을 수는 있겠다. 따라서 명함도 없다. 지난날 내가 지녔던 명함에 쓰인 직함들을 기억해 본다. 'H/W 엔지니어'를 시작으로, '보수2과장', '전자통신과장', '전자보수부 과장', '자동화 사업부장', 'IT Manager', 'Associate Director' 등의 직함을 가졌었다.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이름과 회사전화번호 하나만 적혀 있었지만, 나중에는 회사전화번호(DID와 ext.번호), 휴대폰 등 서너 개의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까지 명함의 내용은 점점 복잡해져갔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처음엔 말단 직원노릇으로 충분했지만, 후에는 함께 일할 부하들과 함께 모셔야할 상사들은 더 많아졌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에게는 아들노릇, 아이들에게는 부모노릇, 남편, 형, 오빠, 사위, 형부, 매형 등등 해야 할 역할이 꽤나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단순한 삶을 살기가 쉽지 않았다. 항상 머리 속이 복잡했다. 할 일은 많았고, 시간은 없었다. 어떻게 하면 한 번에 두 가지 혹은 세 가지 일을 처리할 수 있는지 머리를 썼고, 요령을 생각해내야 했다. 출근할 때는 오늘 할 일을 머리속에서 그렸고, 퇴근할 때는 오늘 하지 못한 일이 생각나 후회와 자책감이 들었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종교이자 신앙이었다.


단순함의 법칙(The Laws of Simplicity)의 저자이자 MIT Media Lab 교수인 존 마에다(John Maeda)에 따르면, 체력(Physical Strength), 두뇌능력(Brain Strength), 상상력(Vision),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y), 현명함(Wisdom)과 나이의 상관관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http://tedxseoul.com/wp/talks_content/405 참조)


체력은 20대 중반에서 후반까지 급격히 증가하다가 서서히 쇠퇴해서 죽음에 이르고, 두뇌능력은 50대에 최고가 된다고 한다. 비전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최고조에 다다르는데, 이는 이성을 찾고자 하는 본능 때문에 성적 에너지의 최고점과 일치한다. 사회적 책임은 자식의 출생과 함께 생기고, 자식들이 스무살이 넘어 학교를 졸업하는 싯점에서 급격히 사라진다.(한국인들, 특히 여자 분들에게는 이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지만) 그리고 지혜는 나이듦에 따라 비례해서 계속 증가한다.


여기에 주목하게 만드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사회적 책임감과 현명함을 뜻하는 지혜(Wisdom)다.


지금도 재미를 선사하는 '동물의 왕국'을 보면, - 다른 동물들도 비슷하지만 - 부화한 새끼를 가진 독수리들은 새끼를 보살피기 위해서 부지런히 먹을 것을 잡아 둥지로 나른다. 그리고 새끼가 스스로 비행할 수 있게 되면 다시는 둥지로 돌아오지 않는다.


인간도 비슷하지 않을까? 어떻게 하든 벌어야 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이것 저것 사다 날라야 한다. 아이들에게 방을 하나씩 주려면 넉넉한 주택도 필요하고, 언제 아플지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상비약도 필요하다. 쑥쑥 자라는 아이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할 것도 많으며, 밖에서 무얼 보아도 아이들에게 필요한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세월에 따라 아이들은 성장하여 떠나가고, 나이가 듦에 따라 인간은 현명해진다.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삶 - 물질위주의 삶이 과연 옳았던 것인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계절별로 두 세 벌씩 있던 양복들과 와이셔츠들은 옷장의 공간만 차지한 채, 유행에 뒤떨어진 채 버리기엔 아깝고 그렇다고 입을 기회도 없는 계륵(鷄肋)같은 존재가 된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가 어떻다구? 개떡같은 소리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 더 이상 짱구를 굴릴 필요도 없다. 지난날 넓은 주택을 부러워했던 자신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간다. 두 식구 잠자고, 책 읽고, 밥 먹고, 쉴 공간이면 충분할 것 같다. 졸리면 자고, 창밖이 밝으면 일어나면 된다. 아침에 일어나면, 할 일이라고는 컴퓨터를 켜는 것과 언제 어디를 걸을지 생각하는 일과, 오늘 무엇에 대해 글을 쓸지 생각하는 일뿐이다.


글을 쓰다가 막히면 음악을 듣고, 음악을 듣다가 흥이 나면 큰 소리로 따라 부르기도 하고, 일어나 춤을 추기도 한다. 아마 누가 엿보기라도 한다면, 미친 놈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지난 날이야말로 쓸데없는 무언가에 집착해서 나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살았던 미친 삶(?)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구두보다는 운동화가 필요하고, 정장보다는 츄리닝이 훨씬 더 쓸모가 있다. 매일 샤워하거나 매일 면도할 필요도 없다. 내일 뭣할지 계획할 필요도 없다. 아무 때나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시간 내서 걷기만 하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다. 책을 보거나, 다큐를 보거나 영화를 본다. 영혼을 살찌우는데 쓰는 시간이라면 모든 순간이 다 즐겁다. 마트에 가더라도 살 것이 별로 없다. 가꿔야 할 정원도 없고, 꾸며야 할 공간도 없다. 두 식구 먹을 것만 사면 된다. 


이제는 부하직원도 없고, 윗사람도 없다. 부모님은 더 이상 세상에 안 계시고, 보살펴야 할 자식도 없다. 돈을 벌지 않아도, 별로 쓸 곳도 없고, 어디엔가 구속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영악하게도(?) 제주에 자리잡고 있으니, 귀찮게 하는 사람도 없다. 마음이 통하는 분들이나 가끔씩 만나 담소하면 된다.


나는 점점 더 현명해지고(?) 내 삶은 점점 더 단순해진다.


2.


<생각이 많다면>


생각이 많은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지나간 실패를 생각한다고 당장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나도 모르게 과거가 떠오르더라도 거기에 빠져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육체를 쓰는 활동을 해서 밤에 잠을 잘 자고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산책을 하는 등 기분전환을 할 수 있게 노력해 보세요.


그것이 생각을 많이 하는 것보다 정신과 육체의 건강, 현재와 미래에 도움이 됩니다.


스마트 폰에 '법륜스님의 희망편지' 앱을 깔고난 후, 매일 아침마다 그의 희망편지가 도착한다. 뜻을 음미해가며 두 번 이상 천천히 읽는다. 평범한 듯한 문장 속에 날카로운 지혜가 스며있다. 때로는 퍼뜩 깨달음도 준다. 1954년생으로 거의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 수양의 깊이에 존경심이 우러난다.


지난 2월 25일의 희망편지는 '생각이 많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살아온 내 자신을 되돌아 보게 했다.


논산 훈련소 훈련병 시절, 매 맞지 않고 기합 받지 않으려면 항상 긴장하고 생각을 하고 살아야 했다. 남들보다 앞서서 사고하고 빠릿빠릿하게 행동해야 덜 맞았고 배를 곯지 않았다.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던 최초의 기억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앞뒤 전후 사정을 먼저 파악했고, 일이 끝나면 어떤 일이 이어질지를 생각했다. 바쁠 때는 일의 계획을 짜고, 어떻게 효과적으로 결과를 만들어낼지 꿈에서도 생각했고, 일이 없어 한가할 때는, '무얼 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잊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는 '내가 이러고 있어도 되나?' 라는 생각에 늘 불안했다.


그렇게 수 십 년을 살았고, 버릇처럼 생각했고 잠자리에서까지 습관처럼 오늘 있었던 일, 아니면 어제 그것도 아니면 지나간 과거를 떠올렸다. 보통의 인간들은 자기의 생각에 갇혀 스스로에게 자해를 가하며 살고 있다. 스스로를 괴롭히고, 피곤한 몸에도 불구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의 고통 속에 지내기도 한다.


구상(具常) 시인의 우음(偶吟: 우연히 읊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고. 그렇다. 우리 모두는 자기 생각에 갇힌 죄수일지도 모른다.


법륜의 글을 읽으면서, 퍼뜩 떠오르는 단어가 '단순한 삶'이었다. 나는 과연 단순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자각이었다. 그렇다. 단순한 삶은 생각이 많은 삶이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은퇴했고, 애초의 계획에는 실패했지만, 이렇게나마 살 수 있음에 만족하고 감사해야 한다. 과거에 집착하고 지나간 세월을 기억해내며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 그리고 생각이 많다는 것은 단순한 삶이 아니다. 아직도 불면의 밤을 보낸다는 것이 그 증거다.


다행소사(多行少思).


많이 움직이고 적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지향(志向)해야 할 '단순한 삶'의 자세다. 지난 일을 반성하며 교훈을 얻고 미래를 준비하려는 지금까지의 '생각 많았던 삶'은 더 이상 현명함이 아니다. 흘려보내야 할 어제의 일을 기억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고,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는 내일이 두려워 걱정하는 것은 더 어리석은 일이다.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다 성장하여 사회적 책임도 적어졌으며, 지난 세월이 헛되지 않아 현명함도 더 생겼다.


- 그러니까, 듀크는 재수가 좋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은퇴하고 싶어도 여건이 안 되어 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고, 나처럼 은퇴의 여건은 되는데도 마지못해 일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하하하.


지난 여름 뉴저지에서 골프회동을 주선했던 분의 말이 생각난다. 50대 중반에 직장을 잃고, 실패를 거듭한 끝에 마지못해 은퇴를 택했던 나는, 65세의 연세에도 사업체를 운영하며 현역에서 일하는 그분에게 골프대접을 받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자발적인 은퇴가 아님을 변명했었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후기>

'단순한 삶'이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과거는 아쉬움 없이, 미련도 없이 흘려보내야 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걱정을 없애야 합니다. 용서가 필요하고 물질에서 해방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종교적이지요.


잘 생각해보면 사실 모든 것의 출발은 아주 단순합니다.

두 개의 맛있는 빵이 있습니다.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습니다. 누구나 큰 빵을 선택합니다.

두 개의 빨랫감이 있습니다. 하나는 큰 덩어리고 하나는 작습니다. 누구나 작은 덩어리를 선택합니다.


즉, 즐거움은 많이 누리려 하고, 일하는 고통은 피하려 합니다. 그렇게 단순한 출발이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다보니 얽히고 설켜서 복잡하고 난해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다보니, 우리 모두는 처음과는 많이 다른 이상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단순한 삶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작은 빵과 큰 빨랫감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일이 아닐까요?

그것이 나이를 먹어 조금이나마 현명해진 사람들이 선택해야 하는 '단순한 삶'이 아닐까요?


구상 시인의 '우음'이라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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