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아버지를 회상하며

한국은 참 다이내믹한 나라다. 뉴스만 보고 있어도 감동과 재미가 있고 때로는 울화가 치밀기도 한다. 이번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도 유감없이 한국은 그런 스토리들을 쏟아냈다. 안현수 - 빅토르 안 - 선수의 스토리도 그렇고, 김연아의 은메달 스토리도 그렇다.


이렇듯 많은 사연들을 쏟아내는 올림픽 중에, 가슴 뭉클하게 하는 뉴스가 또 있다. 바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다. 한국전쟁 피난민의 자식인 나는, TV가 전하는 화면을 보며 가슴이 더워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 야, 이제와 만나면 뭐 어카갔어! 거럼, 만날 필요 없디, 뭐하갔다구 만나? 네 할머니인 언니가 보고 싶기는 하다. 그런데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닐기야, 몸이 약해서 병치레가 많았거든.


남한에서 아버지의 유일한 친척은 당신의 이모님이었다. 내 할머니의 성(姓)은 한(韓)씨,이름은 청(淸)자 외자로 1899년생이었다. 그 밑으로 씨름을 했다던 남동생만 셋이었고, 맨 막내가 1914년생으로, 내겐 이모 할머니다. 아버지와는 10살 차이로 어렸을 때는 몸이 약한 언니 집에 거주하며, 부친을 업어 키웠다고 했다. 그 할머니에게 북에 있는 오빠들을 만날 생각이 없느냐는 내 질문에 이렇게 답하셨다.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튼튼한 자손을 얻겠다고, 당시 평양에서 씨름으로 이름난 집안의 딸을 데려왔다는 말을 이모 할아버지에게 들었다. 그런데도 내 할머니는 키는 컸지만, 건강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나 보다. 1987년 부친이 작고한 뒤에, 나는 부친 대신으로 명절이면 당신의 이모님 댁으로 인사를 갔고, 서울 사범대 체육과 교수로 정년을 하신 이모 할아버지는 나를 붙잡고 북한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 네 할아버디는 키가 작았어. 작달막한 분이었지만 참 무서벘디. 나보다 스물 댓이나 많았던 분이라 내게는 형님이 아니라 아바디 같았거든. 네 아바디 결혼할 때, 부조를 조금 했다고 불려가서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몰라. 학교 선생을 하면서도 조금 밖에 안 했다는 거였디.


살기가 어려웠나요? 내가 물었다.


- 시골에서는 그럭더럭 살았디. 논 20 마지기하고 밭떼기가 조금 있었는데, 그 정도면 촌에서는 괜티않게 살 수 있었디. 옛날에는 그런 게 보통 있는 흔한 일이었디, 네 할아버디가 별난 분이라서 기런 건 아니야. 개만(가만) 있어보라우, 네 할아버디 사진이 어디메 있을디 몰라, 찾아 보갔어.


일제시대에 일본 본토에서 열린 전국체전에 나가 육상에서 은메달 두 개, 동메달 하나를 따신 분으로 대한육상연맹에서 이사를 지냈었다. 앨범 속 사진을 뒤적이며 옛날 기억 속에 잠긴 노안에서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사진 설명: 체육계에서 워낙 유명하셨던 분이라, 인터넷에서 그 분의 사진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내 이름도 이분이 지어주셨다.)


1960년대 말,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로 쓰러졌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한 달 가량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었다. - 덕분에 우리집은 그러지 않아도 가난한 집이 엄청난 병원비에 거덜이 났다.


- 야, 요기 신촌역에 가보라우. 계 가믄 옥희가 기대리구 있을기야, 응. 알갔디? 내가 여기 있다 하고 꼭 데려오라우.


중학생이었던 나는 겨울방학 때, 부친의 병실을 지키고 있었는데, 정신이 들락날락하던 아버지는 가끔씩 이상한 말을 하곤 했다. "옥희가 누구지?" 엄마에게 물어보았지만, 모른다고 했다. 그 답은 문병 오신 이모 할머니가 어른들과 하는 말을 엿듣고 알 수 있었다.


- 춘x가 이북에 두고 온 자기 처 이야기를 자꾸 하네.


평양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인민군 장교이었던 매형이 아직 서른 살이 안 된 부친을 징집하기 위해서 찾았고, 위로 누님 셋과 여동생 뿐으로 3대 독자인 부친을, 할아버지는 공동묘지에 굴을 파고 숨겼다고 했다.


- 그 굴 속이 얼마나 좁았는지, 옴싹달싹해기두 힘들었어, 야. 담뱃불을 붙이면 꺼질 정도야!


장질부사에 걸려 소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그만 두는 바람에 못 배운 데다가, 지병으로 몸까지 정상이 아닌 부친은 당신의 이종사촌(이모 할머니의 딸) 남편이 하는 회사에서 야간경비로 일했다. 대학생 때 근처를 지날 일이 있으면, 가끔 저녁에 작은 온돌이 있는 경비실에 들렸고, 옛날 이야기를 물어 보았다.


- 1950년 10월 국방군이 평양에 들어오고 나서야, 굴 속에서 나왔드랬어. 그렇게 통일이 되는 줄만 알았디, 다시 평양을 내줄줄 어드래 알았갔어. 12월 초에 다시 국방군이 남쪽으로 후퇴하는 기야. 거기 기냥 있다간 인민군으로 끌려갈게구, 기래가디구, 오마니 아바디가 잠깐 동안 피난 가라는 기야. 국방군이 다시 올라오면 그때 다시 오겠다구 하구, 피난길에 올랐드랬어.


- 첫 째가 다섯 살이었어. 너와는 이름이 마지막 한 자만 틀려. 걔는 꽃불 영(榮)자를 써. 둘 째는 뱃속에서 나온디 석달도 채 안 되서, 정신이 없어개지구 이름도 못 지었어. 기런데, 한 4~50리쯤 걸어오는데, 애들 엄마가 다리가 퉁퉁 붓는거야. 아마 산후조리 탓어었던가봐. 기래서, 그만 돌아가라구 기랬어. 서너 달쯤 피난 가 있으면, 국방군이 다시 북진할 테고, 길카면 금방 다시 만날 텐데, 뭐하러 고생할 필요가 있갔나 기레 생각한 거디. 이렇게 끝날 줄 알았드랬으면, 가다가 죽더라도 같이 왔을기야, 거럼, 기랬겠디!


어렸을 때는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자주 술을 하시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많이 원망했었다. 지금은 이해한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그렇게 헤어진 처자식과 부모님이 평생 얼마나 그리웠을까! 얼마나 보고팠을까! 그리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TV에서는 병원용 이동침상에 누워 링러를 꽂은 채로, 혹은 휠체어에 앉은 채로, 건강을 이유로 극구 말리는 의료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라도 북에 남겨둔 자식을 만나겠다고 나서는 90이 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었고, 나는 가슴에 뭉클한 통증을 느끼며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 양반도 만약 살아계셨더라면, 비슷한 나이였을 것이고, 기어이 만나보겠다고 그리 하셨을 것 같았다. 세브란스 병실에서 하시던 말이 지금 귀에 들리는 듯하다.


- 야, 간나새끼야! 제발 역에 가서 옥희 좀 데려달라우! 아 새끼레, 내 말이 말 갵디 않네? 날래, 댕겨오라우!


<후기>

이데올로기로 인한 상처가 우리 한민족보다 크고 깊은 민족이 또 있을까요?

권력을 가진 자들은 몰라도, 민초들에게 이데올로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겐 생존이 있고 가족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권력자들에게 이용당하는 서민들과 생존을 위해서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척하는 힘없는 백성들이 있을 뿐이구요.


소련의 붕괴로 진작에 사망선고가 내려진 그런 이데올로기가 끈질긴 생명력으로 우리 민족을 작금에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 극도로 발달한 현대문명 속에서 말입니다.


한국영화 사상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명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며칠전에 다시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이데올로기를 핑계로 골육상잔이 있을 뿐 이데올로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볼 수 있던 것은 오직 생존과 가족 뿐이었습니다.


경비실의 좁은 온돌방에서 부친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피난 내려오는데, 두 갈래 길을 만났드랬어. 어느 길로 갈까 망설이다가 왼쪽 길을 택했어. 나중에 서울에서 오른쪽으로 갔던 사람들을 만나개지구 들어보니, 오른쪽 길로 들어선 사람들은 거반 다 죽었다드만. 왼쪽 길은 국방군이 검문을 했는데, 오른쪽은 미군이 검문을 했던거디. 미군이 공산주의자냐고 물었는데, 생판 모르는 영어를 피난민들이 어케 알아듣갔어. 기래도 '예스'와 '노'는 들어보았으니까 대충 대답을 한기야. 기래가디구 '예스'라고 대답한 사람은 양키들이 끌고 가서 총으로 다 죽였다는 거디.


'Are you communist?' 하고 묻는 말에, 영어를 몰라 'Yes'하면, 공산주의자가 되어 죽임을 당했던 세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자기 세력의 이익만을 위해 민족의 분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편을 종북으로 몰고 있고 그것을 믿고 따라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그렇게 많은 걸 보면.

'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Inequality for All  (0) 2014.03.26
단순한 삶  (0) 2014.03.01
거짓과 기만 (4)  (0) 2014.02.15
마켓팅이 지배하는 세상  (0) 2014.02.08
거짓과 기만 (3)  (1) 2014.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