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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나은 세상을 위하여/노스텔지어의 글 (퍼온 글)

SSIBALNOMA

12.13.2013.

 

시간은 흘러가고 그리움은 쌓이고, 기억은 흐려지지만, 추억은 생생해집니다. 주변 사람이 어느 날 레테의 강을 건너면, 신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이 사람은 천국으로 갈까, 지옥으로 갈까? 오늘 풀무질은 종교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저의 종교는 시루떡 종교라고 저 스스로 규정합니다. 저는 로만 가톨릭이지만, 막걸리 신자입니다. 주말에 늦잠자다 성당의 종소리를 못 들으면 못 들어서 안가고, 바람이 많이 불어도 안가고, 온갖 핑계와 남 탓으로 돌리고 자주 빠집니다. 가톨릭은 성당에 빠진 것도 죄이기에 신부 앞에서 고백성사 해야 영성체 빵인 ‘하느님의 몸’을 앞에 나가서 받아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매번 영어로 신부 앞에서 고백해도 마치 김치를 안 먹은 것처럼 죄가 깨끗하게 지워지지 않은 것 같고, 예쁜 여자만 보면 또 딴생각이 납니다. 여자를 보고 딴생각을 하는 것도 죄라고 하기에 이제는 하느님이 아시기 전에 재빨리 마음속에서 딜리트 시켜버립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본능까지 거세시키려 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죄라고 하니, 하긴 저만 그럴 겁니다.

 

제가 기독교에서 제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주로 ‘사도신경’을 외우는데 미국 성당에서는 ‘니케아신경’(The Nicene Creed)을 외웁니다. 사도신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니케아신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We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the Almighty, Maker of all that is, seen and unseen.”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Believe”(믿음)이라는 단어입니다. 아시다시피 ‘믿음’이란 확신이 없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강요된 긍정적 사고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성경을 최초로 쓴 유대인들도 솔직히 하느님이 있는지 없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 ‘믿음’이라는 말을 사용했는지 후대 사람들이 번역하면서 적당한 단어가 없어서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뭔가 확실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생각 없이 외우기만 했는데 영어를 보니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번역서보다 원어 서적이 이해가 잘 되는지도 모릅니다.

 

젊은 시절 우리가 흔히 썼던 말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오빠 믿지?”입니다. 더 엉큼한 것은 여성입니다. “오빠, 손만 잡을 거지?”

 

부모님을 자신의 부모가 아니라고 의심해 본 사람이 있을까요? ‘당연한 것’입니다. 나는 우리 부모가 나의 부모라는 것을 ‘믿는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것에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내 아내를 내 아내라고 믿는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는 예외입니다. 결혼 생활이 오래되다 보니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따라 남편이 밤에 잠만 자자 아내의 불만이 쌓여가고 급기야 아내는 용하다는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스님이 아내의 이야기를 듣더니 부적을 써주면서 아내는 절대 보지 말고 남편에게 전해주면서 밤마다 열 번씩 외우고 자라고 했습니다. 다음날부터 당장 효과가 나타나자 아내는 너무 궁금한 나머지 어느 날 밤 남편이 부적을 외우는 것을 엿들었는데 그것은 ‘이 여자는 내 아내가 아니다’였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만 확실하게 정립한다면, 기독교는 ‘불신 지옥 믿음 천국’이라는 말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당연히 있는데 기독교 신자가 아닐 사람이 있을까요? 세상을 창조한 전지전능함을 믿고, 예수가 신의 아들로서 우리를 구원하러 온 구세주라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를 믿고 의지하면 예수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구원을 믿습니다. 그러나 신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존재할 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신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진리독점입니다. 창조신학으로 진화론을 부정하고 과학을 배척하기에 니체는 일찍이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을 죽인 것입니다. 500여 년 전 오직 성서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며 루터는 종교개혁에 앞장섰습니다. 중세기독교에선 교황이 해석권을 가졌다면 개신교에선 교파마다 그들이 만든 교리가 해석권을 가져 성서해석자마다 유신헌법처럼 자기만이 유일한 성서 수호자라고 주장하게 됐습니다.

 

인간들의 욕심에 의해 온갖 타락으로 신을 죽인 이 시점에서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제2의 종교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을 바탕으로 하는 ‘인문학 경전’인 성경이 아닌 ‘인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당이 아닌 ‘인문학당’으로 부르고 실력 없는 목사는 모조리 도태시키고 인문학과 동시에 신학 박사학위자만을 자격을 주고 목사가 아닌 소피스트(여기서는 현명한 사람), 철학자로 부르며 존경해야 합니다. 주일마다 두꺼운 성경책 옆에 끼고 교회 가며 과시할 게 아니라, 평생 교육원인 인문학당에서 신과 대화하며 자신의 인격을 수양한다면 인간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국의 목사들이 대거 실직하게 됩니다. 걱정 없습니다. 본래 목사란 양치기였습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기에 한국 사람은 양고기를 잘 먹지 않으므로 흑염소를 키워서 팔면 됩니다. 그리고 한국에는 정말 실력자가 많습니다. 바로 대학 시간 강사들입니다. 이들은 돈 없고 줄 없어 평생을 고생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보고 경험과 이론까지 다 갖추었으니 인문학당의 소피스트, 철학자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대통령도 해결하지 못하는 시간 강사들의 처우를 일시에 해결하고 국민은 그들로부터 인격을 함양하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한국의 인문학당에서 인문학의 르네상스가 꽃피우기를 기대합니다.

 

제 종교가 시루떡 종교라고 스스로 규정한 이유는 저의 마음속 깊이에는 불교적 가치관 위에 천주교가 쌓이고 또 그 위에 무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가 켜켜이 쌓여 있고 맨 위에는 묵은 김치의 윗부분이 산소와 접촉하여 곰팡이 비슷하게 덮고 있는 것처럼 개똥철학이 덮고 있습니다. 요즘 같으면 카페테리아 종교, 또는 뷔페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모든 종교를 존중합니다.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신자의 눈으로 본다면, 이단자입니다.

 

제가 가톨릭 신자지만 제 마음속 근저에 불교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한국 불교는 종교를 떠나 철학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선(禪)불교이기에 그렇습니다. 석가모니는 현존했던 인물이지만, ‘네 안에 부처가 있고 네가 바로 부처다’라고 함으로써 우상 숭배를 경계하면서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철학으로 바꾼 것입니다. 현재의 불상도 석가모니 입적 300년 후에 인간들이 만든 것입니다.

 

무엇보다 위에서 언급한 ‘믿음’이라는 말을 ‘생각’(想)이나 ‘마음’으로 바꾸면 신이 내 안으로 들어옵니다. 생각 ‘상’자를 보면 나무에 기대어 눈으로 마음을 보라는 뜻입니다. 마음 ‘심’자를 떼어내면 서로 ‘상’자가 됩니다. 서로의 마음을 보라는 뜻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사자성어를 한 글자로 표현한 것이 서로 ‘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상상(Image)을 소리와 형태의 약속인 말과 글로 상대에게 표현하고 의사를 전달합니다. 이것이 생각이고, 생각은 글로 쓰거나 말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한 언어영역에 포함되어 있지만, 생각과 가장 밀접한 마음은 언어로 또렷이 표현할 수도 있지만 표현하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생각에는 없는 감성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을 마음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할 때 “네 생각을 말해 봐”라는 표현은 해도 “네 마음을 말해 봐”라는 표현은 잘 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언어영역 이외의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 미치겠네, 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네, 버선처럼 뒤집어 보여줄 수도 없고” 등등.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은 가슴에 있지 않습니다. 머리에 있습니다. 흔히들 생각은 머리에 있고 마음은 가슴에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성들이 마음이 엄청나게 넓겠지만, 그렇지 않을 걸 보면 모두 머리에 있는 게 확실합니다. 이렇게 증거를 대야 하는 겁니다. 무조건 믿으라면 의심부터 합니다.

 

기도문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할 게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해야 신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게 됩니다. 하늘은 실체가 없지만, 나 자신은 개인의 인격만큼 실체가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은 무조건 믿는 대상이 아니라 두 개의 보이지 않는 실체, 즉 하느님과 내 마음속에 있는 양심과 끊임없이 교감하면서 실체가 있는 내 인격을 살찌게 하는 것이 진정한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신은 인간이 만든 인식체계 속의 약속이 아니기에 보이지 않지만, 인격은 행동에서, 말에서, 글에서 나타나는 실체입니다.

 

일찍이 자본주의의 단군 할아버지인 애덤 스미스도 도덕감정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기적인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도덕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공명정대한 관찰자”(The real and impartial spectator)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양심입니다. 그 공명정대한 관찰자가 인간의 이기심을 조절하여 행복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복은 인간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공명정대한 관찰자의 크기에 따라 비례할 것입니다.

 

신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교회의 첨탑 안에 있지 않고 더구나 미국처럼 물질 안에 있지 않습니다. 달러 지폐를 꺼내 보십시오. “IN GOD WE TRUST”라고 모든 지폐에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신을 믿는다” 여기서는 Believe가 아닌 Trust를 써서 신의 이름으로 지급할 것을 약속한다고 합니다. 이 문구는 1956년에 연방의회가 미국의 공식적 모토로 채택합니다. 정치와 종교가 철저히 분리된 미국이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경제활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질의 교환 수단인 지폐에 신을 파는 것을 보면 얼마나 물질 만능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한국 역시 한국 전쟁 후 미국 남부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복음이 전해져 ‘허영 복음’ ‘물질 복음’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너도나도 대형 교회에 나가야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건물이 커야 하느님 눈에 잘 띄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제까지 바벨탑을 쌓아야 할까요? 목사들은 “믿습니까?”하고 “아멘”을 유도하면서 순진한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최면을 겁니다.

 

이제 마치 질로 들어갑니다. 중국 선불교 역사에서 유명한 육조대사(六祖大師) 혜능(慧能·638~713) 선사의 설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바람에 깃발이 세게 펄럭이는 것을 보고 두 스님이 논쟁을 벌였습니다.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했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혜능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움직이는 건 두 사람의 마음이라고 일갈했답니다.

 

한동네에 사는 스티브란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말다툼을 하다 약이 올라 욕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영어로 하면 듣는 사람이 화도 낼 것이며 기분도 좋지 않아 할 것 같고 내 인격에 물어보니 욕을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또 한국말이 아닌 영어로 욕을 해봐야 하는 나도 시원치 않고 친한 사이라 듣는 이도 별로 화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밥 먹고 김치 대신 버터를 먹는 것처럼 말입니다. 장난기가 생긴 나는 종이에 이렇게 써주며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SSIBALNOMA”

 

그가 큰 소리로 나에게 대고 읽었습니다. 웬걸, 내가 그에게 해주고 싶었던 나쁜 말이 내가 다시 받은 꼴이라니, 그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고 나는 오히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웃으며 뜻을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상대가 나를 한 대 때렸을 때 내가 똑같이 상대를 한 대 때려 주면 나의 아픔이 사라질까요?

 

마지막 담금질입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신도 물질도 마음에 있습니다. 선불교에서 무심(無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구속되지 않은 마음, 어디에 고정되지 않은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마음이 없는 상태, 즉 욕심을 버리는 것일 겁니다. 기독교 신자가 조용한 산사(山寺)의 천 년 묵은 고목나무에 기대어 가슴에 생각 想을 세기며 묵상을 할 때 산사는 교회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스 여자와 결혼하러 그리스에 간다고 만날 때마다 자랑하던 스티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는 갔습니다. 영원히. 온 동네 일 다 관여하며 이집 저집 다니면서 온갖 잔 고장 난 것을 다 고쳐주던 그도 자신의 심장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오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는 없습니다. 그와 나는 동갑이었습니다. 역시 인생은 무상한 것 같습니다.

 

“친구 스티브, 잘 가게. 자네는 그래도 행복한 걸세. 전 세계인이 참여한 만델라만큼 마지막은 아니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자네를 위해 한 줄의 글을 써줄 수 있는 친구를 뒀다는 걸로 만족하게. 그리고 가는 길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나? 그리스 여자 연락처 보내주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