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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한국의 롤모델이 미국인가?

(2013년 10월24일에 작성한 글)

 

한국에 돌아와 살면서 예전에는 생소했으나 미국에 살면서 친숙해진 많은 것들을 흔히 보게 되었다. 주택 모기지 제도도 예전엔 없었고, 이마트나 롯데마트, 하이마트 등 대형마트들도 미국에서 보던 것들과 유사하다. 하다못해 미국에서 수시로 이용하던 코스트코, 스타벅스, 아웃백 등 체인점도 그렇고 극장도 미국처럼 멀티 스크린 상영관이 되었다.

 

지난 주말, 박장로님과 함께 제주 해녀촌 회국수 집에 들렸다. 점심 때가 되면 번호표를 받고 2~30분 기다리는 것은 예사인 맛집이라 일찍 찾았다. 홀 내에는 손님 대신 종업원들이 실내에 높이 걸린 TV를 보고 있었는데, LA 다서스와 세인트루이스의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6차전을 중계하고 있었다. 류현진이 등장하지도 않고, 월드시리즈도 아니지만 지상방송에서 중계를 하고 있는 것이었고, 식당의 종업원들은 막 들어선 우리 일행에게 서빙을 하면서도 고개를 TV 쪽을 향하고 있었다.

 

추신수나 류현진의 일거수 일투족은 항상 뉴스거리가 된다. 가까운 일본에 진출한 이대호도 있지만 이대호가 출전하는 경기가 중계되는 것은 보지 못했으나, 추신수나 류현진이 등장하는 경기는 자주 지상파 방송에서 중계하는 것을 보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존재가 한국에서 어떤 것인지 충분히 인식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과연, 미국은 한국의 롤모델일까? 라는 의심이 든다.

 

한국과 미국은 역사적으로나 지리학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그 차이가 너무나 크다. 반 만 년과 250년의 역사도 그렇고, 단일민족과 이민으로 이루어진 나라라는 점도, 땅 덩어리의 크기도 너무나 다르다. 그런데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비롯해서 스포츠까지 미국을 좇아 흉내를 내고 있다.

 

그러나 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내야 한다. 기득권이나 자본에게 유리한 것만 모방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모기지 제도만 해도 그렇다. 미국에서는 주택이 언더워터가 되면 집만 포기하면 그 집으로 인해 모든 부채는 탕감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경매로 처분해서도 남는 빚이 있다면, 그 부채는 계속 남게 된다는 것이다. 약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강자만을 위한 제도다. LTV(Loan to Value)가 미국보다 훨씬 낮다는 데도 말이다. 부시가 감세를 추진하면, 한국도 따라서 금방 감세를 도입하지만, 오바마가 증세를 주장하면 조용하기만 하다.

 

한국에서는 비정규직이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계약직, 임시직 등 비정규직은 기업에게 크게 유리한 제도다. 돈벌이가 좋을 때, 즉 일이 많을 때 데려다 쓰고, 평상시에는 내보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업에 유리한 이 제도를 쓰려면, 같은 직종에서 같은 일을 하는 영구직 직원보다 더 많은 임금을 주도록 법제화를 해야 공평하다. 지금처럼 같은 일을 하면서 복리후생도 없이 적은 임금을 받는다면 불만이 없을 수가 없다. 미국에서 내 딸은 계약직으로 있을 때, 십만 불이 넘는 임금을 받았지만, 레귤러 잡으로 옮기면서 삼만 불 가량이 적어졌다.

 

이련 예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한국에서는 재벌이 문어발식 확장을 하지만, 미국처럼 강력한 독과점 방지법이나 담합을 처벌하는 법이 없다. 그저 솜방망이 처벌에 그칠 뿐이다. 재벌이나 기득권에 유리한 법만 만들어지고, 공정거래위원회나 인권위원회 같은 약자를 위한 기관은 악세서리 정도의 장식품으로 취급받고 있어, 전혀 뉴스의 중심에 있지도 않다.

 미국의 웰페어 제도는 왜 흉내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지 모르겠다. 노인 자살률이 OECD 1위로 OECD 평균의 4배에 이른다는데도 말이다. 그나마 대통령이 후보시절 공약으로 내세운 노인수당 등 노인에 대한 각종 약속도 현 정부에서 파기되고 있다.

 

선진국인 미국을 모방하고 흉내내는 것은, 한편으로 이상할 것이 없고 당연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게다가 우리는 36년이라는 기나긴 식민지 상태를 미국에 의해 해방이 되었고, 해방 후에는 미국에 친근한 인물이 대통령이 되었고, 미국에 유학한 인재들이 나라의 지도층이 되었으니 말이다. 흉내내는 것은 얼마든지 좋지만, 모방을 하려거든 제대로 해야 한다.

 

70년대 군생활을 전방의 포병대대 본부에서 통신 기재계로 복무했다. 통신 기재계의 임무가, 대대의 통신장비 운용에 필요한 각종 소모품과 부품들을 사단으로부터 수령해서 각종 통신장비들을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는 일이었다. 사단 통신부대에서 장비, 부품 및 소모품 수령과 반납에는 D/O(Due-Out), D/I(Due-In)이라고 불리는 서류를 작성해야 했는데, 대부분 영어표기가 있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또한 미군에서 도입된 행정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도서관에 다니며 미국역사에 대한 책을 읽고, 미국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배우며 정말 재밌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한심할 정도로 미국에 대해 모르고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50년도 안 되는 짧은 역사지만, 미국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나 다름이 없었다. 반인륜적인 노예제도 뿐만 아니라, 끔찍한 아동과 여성학대의 시대도 있었고, 처참한 굶주림의 역사도 있었다. 지금과 같은 풍요로움과 각종 합리적인 제도들은 투쟁에 의해 하나씩 쟁취된 것이었다.

 

모두가 아는 것 처럼 링컨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이에 대항하는 남부의 기득권 세력과 전쟁도 불사했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웰페어 및 각종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기득권 세력의 극심한 저항을 이겨내야 했다. 심지어는 용역깡패를 동원하여 조직된 재벌들의 구사대에 의한 노동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연방정부의 군대까지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지금 오바마의 국가의료보험 도입이 연방정부 패쇄라는 저항에 부딪힌 것과 유사하다.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미국의 의료비는 개혁이 되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의 미국 모습만 본다. 미국의 팝송을 듣고, 할리우드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자란 우리는 과거의 미국은 알지 못한 채 현재의 미국 환상만 보고 좇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부모에게 태어난 자식들까지 맹목적으로 미국을 따른다. 그래서 반미는 곧 국가반역이며 종북으로 치부된다. 선진국 수준의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자주국방을 포기하고 '전시 작전권'까지 미국에 맡기는 수치에도 그들이 떳떳한 이유다.

 

더 이상 미국이 한국의 롤모델이 될 수 있을까? 미국보다는 우리와 비슷한 역사와 민족체계를 갖는, 그리고 분단의 아픔까지 극복한 독일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한국의 롤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후기>

주제넘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국에서 사는 지난 몇 년 동안 미국 역사에 관한 책을 보면서 들었던 단상들을 글로 옮겨 보았습니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한국의 짧은 민주주의 역사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혼란은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혼란을 종북세력으로 몰아부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봅니다. 기득권에 반대하는 절반 가까운 국민이 종북으로 몰리고 있는 현실입니다. 물론 국정원, 검찰, 군 같은 국가권력기관 즉 기득권 세력의 장난입니다만, 한국에서 보면 별 것도 아닌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까지 물러나게 한 미국의 모습은 전혀 흉내낼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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