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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빚 권하는 나라

30여 년 전 결혼했을 때 돈이 필요했다. 몇 년 간의 직장생활에서 번 것은 부모님께 드렸으니 돈이 수중에 있을 턱이 없었다. 두 동생, 부모님과 함께 방 두 칸에 살고 있었다. 세를 놓았던 방을 하나 빼내는데 목돈이 필요했다. 은행에서 결혼자금으로 400만원을 빌렸고, 이 돈으로 방을 빼내 신혼살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월급이 삼십 몇 만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400만원을 빌리는 과정이 얼마나 복잡했던지 다시는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후에 한국의 은행에서 돈을 빌린 경험은 없다.

 

돌아온 한국은 '빚 권하는 사회'가 되어 있었다. TV 광고에는 사금융업체의 '고리(高利) 대출광고'가 홍수를 이루고, 정부에서는 떨어지는 집 값을 지탱하기 위해, 올라가는 전세값을 충당하기 위해 내놓는 정책이라는 것이, 저리(低利)로 빌려줄 테니 '빚내서' 해결하라는 부추김이다. 뉴스에서는 가계대출이 천 조원에 육박한다면서 걱정스러운 기사를 쏟아내면서도 정부는 계속 빚을 부추기는 모순된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나는 맨하튼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의 뉴저지에서 살았다. 간혹 뉴욕이나 맨하튼에 나가면, '이런 형편없는 곳에서 어떻게 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지난 겨울 눈 치우느라 도로는 패여서 누더기가 된 채 울퉁불퉁했고, 곳곳에 공사로 도로는 막혀 꼼짝도 안하고, 또 톨비는 왜 그렇게 비싼지 어쩌다 한 번 뉴욕에 나가려면 링컨터널 입구나 조지 워싱턴 브릿지를 통과 하는데 꽤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 비지니스 카드에 주소가 맨하튼으로 되어 있으면 일단 인정받는 셈이다. 그만큼 '맨하튼'이라는 이름의 위력이 있다. 그래서 맨하튼 빌딩 임대료가 천문학적이더라도 빈 사무실이 없는 거다.

 

뉴저지에 살면서 궁금한 것을 미국인 친구에게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었다. 나는 'Met Life'나 'Pfizer' 같은 세계적 기업들이 맨하튼에서 나오는 이유를 재차 몰었다.

 

- 젊고 유능한 사람을 뽑으려는 거다. 뉴욕은 생활비가 비싸니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높은 임금을 주는 회사를 찾게 되니까, 높은 임금을 줄 수 없는 회사들은 젊고 유능한 사람을 찾아 외곽으로 옮길 수 밖에 없다. 또 젊은 사람은 돈이 없으니 맨하튼 근처에서 살 수가 없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 살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출퇴근 거리가 되는 가까운 곳에 있는 회사를 찾는 겁니다. 그러니 외곽으로 옮기는 회사는 싼 임금으로도 젊고 유능한 사람을 채용할 수 있게 됩니다.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논리에 의해 자연적으로 인구분산과 지역균등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꽤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한동안 살았던 중부 뉴저지 서머셋 카운티의 브릿지워터(Bridgewater)에는 존슨앤존슨(Johnson & Johnson) 헤드쿼터를 비롯한 대형회사들이 많이 있다. 아들 녀석도 이곳에 있는 삼성 USA에서 일하고 있다. 2~30년 전에는 농장만 있던 시골이었다고 한다. 87번 하이웨이와 95번을 이어주는 I-287 하이웨이가 생기면서 회사들이 들어서고 타운이 조성되었다고 들었다.

 

땅 덩어리가 큰 탓인지는 몰라도 미국은 서버번(Suburban: 도시외곽)이 잘 발달되어 있다. 비좁고 복잡한 도시에 비해 쾌적한 주거환경으로 누구든지 살고 싶어하는 곳이다. 쇼핑과 관공서 등 이동거리의 불편이 있지만, 자동차로 해결되는 문제들이다. 직장까지 가깝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로 인한 미국 경제위기의 교훈은 무엇인가?

 

탐욕에 찌든 금융회사들이 모기지 갚을 능력도 없는 사람들의 투기심을 부추겨 고리로 대출을 해주고, 금융공학으로 포장된 부실상품을 그럴 듯하게 만든 후, 속여서 팔았던 것이 원인이 되었다. 부동산 값이 오를 땐 문제가 없는 듯 했지만, 한계를 넘어서자 걷잡을 수 없이 문제가 드러났다. 집값 폭락으로 엄청난 규모의 돈이 허공에 없어져 버렸고 구제금융이라는 명목으로 99%가 낸 세금이 그 빈 곳을 메꾸었으나, 사라진 돈은 이미 1%의 수중으로 사라진 뒤였다.

 

미국의 카피캣 한국이 그것을 흉내내고 있다. 다른 것은 월가의 탐욕이 아니라, 기득권 1%를 위한 정부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택구입연령 인구(30세 이상 50세 이하)가 이미 줄기 시작한 이상,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깨진 한국에서 집값이 떨어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고, 정부는 이미 이런 현상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정책을 세워야 했음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실패한 것뿐만이 아니라, 뉴타운, 재개발 등 그릇된 정책을 남발했다. 그리고 지금 그 잘못을 인정하고 지금이라도 시장에 맡겨 바로 잡는 정책이 아니라, 떨어지는 집값을 억지로 떠받치는 정책만을 고수하고 있다. 종합부동산세를 폐지하려 하고 있고, 취득세를 면제하고, 주택구입자에게는 싼 이자로 위험수위까지 대출을 해주고, 심지어는 집값이 떨어지는 위험부담을 정부에서 일부 대신하겠다는 정책까지 나오고 있다.

 

한국의 전세제도는 전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제도라고 한다. 전세제도란 집값이 오른다는 보장하에서 가능한 제도다. 집값이 오르지 않거나 떨어진다면 전혀 합리적이지 못한 비상식적 제도다. 이자가 아무리 적더라도 은행에 두는 것이 낫지 바보가 아닌 한, 뭐하러 자신이 거주하지도 않고 오르지도 않는 집을 아무 소득도 없이 소유하고 있을 사람이 있겠는가! 월 임대로 가는 것은 아주 당연한 시장의 논리다.

 

문제는 사회가 이런 월 임대 제도를 수용할 준비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주거에 고정적인 비용이 드는 제도를 처음 경험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유럽처럼 공공임대주택도 확보하지 못했고, 미국처럼 세입자를 보호하는 제도도 확보되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적 큰 변혁을 맞이하는 것인데, 이 또한 정부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 살게 되면서 가장 좋은 점은, 작은 집이라도 하나 가지고 있으면 주거에 비용이 별로 들지 않는다는 거다. 브릿지워터의 천 스퀘어 피트도 안 되는 작은 콘도에 4천 불 가까이 재산세를 냈던 것에 비하면 이곳의 세금은 백 불 정도니까 거의 공짜나 다름없다. 물론 나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조건이지만, 미국에서 살아본 사람으러서는 뒤가 캥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집값이 오르지 않는 현상 속에서 기존의 전세는 월세로 전환될 수 밖에 없고, 굳이 전세를 찾는 사람들 때문에 전세는 오를 수 밖에 없는 게 시장의 논리다. 그런데 치솓는 전세값을 위해 정부에서는 또 대출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꺼내 들었다. 빚을 내줄테니 오르는 전세값을 감당하라는 거다. 이런걸 정책이라고 내놓는 정책입안자의 머릿속 구조가 궁금하기만 하다. 1%의 가진 자들만 생각하는 정책일 수 밖에 없는, '언 발에 오줌누기'다.

 

시장의 기능을 최우선시하는 '신자유주의'를 주창하는 국가에서 왜 이런 것은 시장의 논리에 맡기지 않을까!

 

빚 권하는 사회, 한국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수수방관하고 구경이나 할 수 밖에 없다. 은퇴자가 누리는 또 다른 재미다.

 

<후기>

어설픈 뒤늦은 부동산 정책으로 부동산 폭등을 불러일으켰지만, 노무현 시절의 부동산 정책이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부동산에 대한 종합세와 시세에 맞게 재산세를 대폭 올림으로써 투기를 막고, 여러 채의 부동산을 가진 사람에게는 세금으로 처분하게끔 유도하려고 했었지요. 일관되게 이런 정책을 추진했었더라면, 지금의 문제들은 없었겠지요. 물론 지금의 저에게는 다소라도 불리했겠지만 말입니다.

 

그나 저나, '지금 부동산을 구입하면 크게 후회할 것입니다!'하고 열변을 토했던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들을 걸! 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의 글은 왜 볼 수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