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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삶과 죽음

(2013년 10월13일에 작성한 글)

 

(묵직한 주제입니다. 이 글은 어떤 분이 보여주신 친구의 이메일을 보고, 저의 상상력을 더한 것입니다. 고등학교 동창인 세 분이 등장합니다. ㄱ분은 한국에서 종합병원을 하는 의사, ㄴ분은 간 이식을 받지 못하면 얼마 살지 못하는 친구 환자, ㄷ분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지만 은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ㄷ은 ㄴ과는 졸업 후 계속 연락하며 친하게 지내는 사이나, ㄱ과는 오랜동안 잊고 지내다가 미국에서 만나 다시 친하게 된 사이입니다.)

 

잘 지내지?

지난 봄 우리가 만난 것이 40년 만이었나?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면 얼굴도 알아보지 못할 뻔 했네, 그려. 하긴 이제 환갑을 지낸지도 다섯 해가 지났으니 그럴만도 하지. 어쨋든 우리 동창들을 미국에서 만나 부부동반 여행도 하고, 같이 골프도 했으니 늘그막에 그 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었던 듯 싶네.

 

나는 아직도 젊다고 생각하는데, '늘그막'이란 표현이 이상하지만 말야. 내가 의사란 직업이 아니더라도, 요즘은 90은 보통이고 100세까지 사는 세상이니, 앞으로 30년은 더 산다고 생각하면 '늙은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 않겠나? 나도 아직은 병원을 운영하고 있고, 또 환자진료도 하고 있기도 하지만 은퇴는 아직 생각하고 싶지 않다네.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고, 아직 건강하고 일할 수 있으니까 은퇴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네.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서론을 꺼내는 것은 우리 친구 ㄴ 때문이네. 나보다는 자네가 더 친하니까, 자네가 조언한다면 그 친구의 마음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라네. 미리 말해 두지만, 이 글의 내용이 조금 길다네. 자네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으라는 뜻이네, 하하.

 

지난 번에도 잠깐 언급했네만, 그 친구는 간 이식을 받지 못하면 앞으로 1~2년을 넘기기 힘들다네. 나는 우리가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라고 믿고 있네. 이식만 받는다면 앞으로 10년은 물론이고 잘하면 2~30년도 더 살 수 있는데, 삶을 포기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나도 서울대에서 의학을 공부했지만, 장기이식은 한국보다 중국이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네. 웬지 아나? 장기이식은 지식이라기보다 많은 경험이 필요한 기능에 가까운 수술이라네. 서울대 병원에서는 일 년에 기껏 백 건에서 이백 건 정도 장기이식을 하지만, 장기매매가 이루어지는 중국의 큰 병원에서는 하루에도 몇 건씩 장기이식수술을 하고 있네. 내가 잘 아는 북경의 ○○병원에서는 일 년에 천여 건 정도의 장기이식을 하고 있어. 의사들도 대부분 미국의 존스홉킨스나 코넬에서 공부한 실력있는 전문의들이 많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만큼 성공의 확률이 높다는 거야. 중국에서는 교통사고도 흔하지만, 일반 사형수들이 많아서 장기구입도 비교적 쉽다고 하네. 물론 의사로서 그런 장기들이 어떻게 구해지는지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한국에서보다는 구하기 쉬운 것은 틀림없거든. 장기구입에서 시술까지 3천에서 5천만원이면 충분해.

 

요즘 그 정도는 돈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ㄴ이 왜 죽으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네. 병원이나 의사는 내가 알아서 다 준비할 테고, ㄴ은 중국에 가서 수술만 받고 오면 되는데 왜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는지 모르겠네. 옛날이 아니잖는가! 지금은 우리 나이에 죽기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지난 십 수 년 사이에 의학, 아니 의학적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했다네. 비전문인인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의사가 보는 사람 살리는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해서 하루에도 여러 편의 논문들이 쏟아져 나온다네. 의사로써 현재를 사는 우리들은 이런 혜택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네. 아니 누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왜 그런 의술을 지척에 두고도 저렇게 고집을 피우는 그 친구를 이해하지 못하겠네.

 

혹 자네라면 그 친구를 설득할 수 있지 않겠나? 설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주위에서 우리들이 계속 한 목소리로 말한다면, 그 친구의 고집도 조금씩 꺾이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보려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게나. 그리고 절대 환자로서 나를 찾아오는 일은 없도록 하게나.

 

PS: 참, 자네도 사업을 정리하고 은퇴할 계획이라고 했지? 건강에 문제가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왜 잘하고 있는 사업을 접고 은퇴하려는지 나는 잘 이해가 안 된다네. 하긴 모든 사람이 다 같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네, 하하하.

그리고 자네의 이해를 돕기 위해 ㄴ에게 온 메일을 아래에 첨부했네.

 

친구 ㄱ에게,

 

자네의 진심이 담긴 충고 잘 알겠네. 그 뜨거운 우정에 충심으로 고마움을 전하네.

우리가 까까머리 고등학교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으니 그게 벌써 50년이 되었네 그려.

서로 친구가 되어 반세기를 지냈으니 결코 짧은 세월이었다고 할 수 없겠지, 하하.

 

운이 좋아서, 좋은 학교를 나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갖고, 예쁘고 참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 아들 딸 낳고 별 탈없이 살았으니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네. 축복받은 인생이었다고 자부해도 좋겠지, 안 그런가?

 

자네의 말은 눈꼽만치의 의심도 없네. 자네 말대로 하면 10년, 운이 좋으면 조금 더 살 수도 있겠지. 그걸 의심하는 것은 아닐세. 그러나 10년, 20년 더 산다고 그게 무슨 대순가? 영원히 죽지 않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누구나 죽어야 하는 것이 피해갈 수 없는 삼라만상의 법칙이고, 누군가 유서에도 썼듯이 삶도 죽음도 자연의 일부인데 말일세.

 

자네에게는 미안하네만, 내 결심은 확고하다네. 누군지도 모를 사람의 장기까지 몸속에 넣고 삶을 연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네. 그것도 남의 나라에 가서, 어떤 흉칙한 놈들이 어떤 몹쓸 짓을 해서 구한 것인지도 모르는데, 그걸 몸 속에 넣고 남은 생을 찜찜하게 죄의식 속에서 지내고 싶지는 않다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되지, 그게 무슨 큰 일이란 말인가?

 

70 가까이 살았으면 적게 산 것도 아니잖는가? 평균수명이 80이니 어쩌니 해도, 말 그대로 평균수명이니 나처럼 좀 짧게 살다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99세나 100세 넘게 사는 사람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이들도 다 결혼해서 친손주 외손주도 다 보았는데, 더 무얼 바라겠나? 정말이지, 더 바랄 것이 없다네.

 

물론 조금 더 살아서 마누라와 여행도 같이 다니고 이생을 더 즐기고 싶지 않겠는가? 솔직이 그러고 싶기도 하다네. 하지만 내가 평생을 순리대로 살아온 것처럼,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순리대로 하고 싶다네. 의사인 자네 말이니 얼마 못사는 것은 확실할 것 같네만, 나는 나대로 열심히 치료하고 있으니 또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지 남편 금혼식 때까지 살게 하겠다고 마누라가 열심히 해주는 식이요법도 하고, 효험이 있다는 치료도 받다보면 몇 년 더 살게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내가 그렇게 되면 그 땐 자넬 돌팔이라고 부르겠네, 하하하.

 

'야, 이 돌팔이 친구야!' 하고 부를 테니 그 때를 기다리게나!

 

50년 지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