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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내가 만나본 분들 (9) - 나의 꿈

(2013년 9월26일에 작성한 글)

 

- 내 꿈이 뭔지 알어? 1978년이야, 내 나이 서른 두 살에 스물 네살 마누라를 데리고 미국에 왔던 해가. 엘에이 공항에 내렸을 때 주머니에 딱 3백불 있었어. 다음 날부터 개스 스테이션에서 펌핑을 했지. 닥치는 대로 일했어! 세 가지, 어떤 때는 네 가지 파트 타임 잡을 했으니까.


다행인 것은 내가 영어를 좀 할 줄 안다는 거였지. 열 세 살 때부터 파주에서 영외에 거주하는 미국장교들에게 'The Star'라는 신문을 돌렸는데, 그 때 영어를 좀 배웠어. 개스 스테이션에서 일하다가 어떻게 인연이 닿아 자동차 매케닉 써티피케잇을 따게 되어, 자동차 부품가게를 차리고 한 쪽에서는 정비공장도 했지. 한 때는 엘에이에서 한인이 하는 자동차 부품가게로는 제일 크게 했어.


2천년대에 들어서자, 자동차 정비도 전부 컴퓨터로 하게 바뀌더라고. 트러블슈팅도 컴퓨터로 하고 수리도 컴퓨터로 하는데, 메이커들이 서비스를 강화해서 전부 무상으로 수리를 해주는 걸 보고 사업을 접었어. 이제 자동차 부품이나 정비는 끝났다고 판단한 거지. 덕분에 난 다른 사람들 보다 일찍 은퇴한 셈이야.


2006년에 부동산을 6백만불 어치를 정리했어. 그냥 정리하고 싶더라구. 그 때 정리하지 않았으면, 나도 쉽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빅토빌에 있는 농장을 백만불 주고 샀는데, 그게 40만불까지 떨어졌었는데 요즘은 조금 올랐나 몰라. 까짓거 괜찮아. 한국에 IMF 때는, 한국을 돕자고 달러 보내기 운동을 한인 경제인 모임에서 했었거든. 50만불을 보냈더니 백만불이 되서 돌아오더군.


미국이라는 선진국에서 2~30년 살았는데, 내가 조국에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했지. 생각해보면 할 일은 참 많아. 경기도 파주에 영어마을 있지? 그것도 원래는 내 아이디어였어. 내가 재미교포 경제인 협회 이사로 있는 바람에 한국 국회의원들을 만날 기회가 종종 있었거든. 어느 국회의원에게 영어마을에 대한 구상을 이야기했더니, 그게 손학규 당시 경기도지사에게 전해져서 구체화된 거라구, 하하하.


최근에 듣는 바로는 그 영어마을도 적자가 많이 난다고 하더군. 그래서 내가 다시 제안했어. 그걸 미국 교포들에게 팔아라. 교포들이 거기에 가서 살게되면 자연히 영어마을이 되는 것 아니냐? 비용이 드는 직원들을 뭐하러 고용하느냐? 우리가 가서 살면서 미국에서 보고 경험한대로 카페도 하고, 은행이나 우체국도 우리가 직접 일하면 되는 거지, 안 그래? 그런데, 씨도 먹히지 않더라. 


그게 내 꿈이었거든. 미국에서 몇 십 년 살아본 경험을 토대로 내가 태어난 조국에 기여하다가 죽는 것! 그것 뿐이야.


죽을 때까지 써도 다 못 쓸만큼은 있어. 솔직이 난, 한국에서 산 세월보다 미국에서 산 세월이 더 길어서 그런지 한국말 보다 영어가 더 편해. 내 자식들은 여기서 태어나 이곳에서 뿌리 내리고 사니까, 절대로 한국으로 가지는 않을 거야. 내 와이프도 한국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는대.


나도 한국이 좋아서 가겠다는 것도 아냐! 내가 콧수염을 길렀잖아. 언젠가 한국에서 와이프와 여행을 할 때야. 차로 운전하고 가다가 해 떨어지면, 그곳이 숙박하는 곳이야.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저녁에 어느 조그만 카페에서 쉬고 있는데, 어떤 술 취한 녀석이 들어오더니 나를 보고 슬금슬금 다가오는 거야. 그러더니 내 코 앞에다 손가락질을 하며, '어이, 콧수염쟁이?' 이러는 거야.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이 있는 곳이 한국이잖아? 또 운전은 어떤데? 도무지 예의라곤 없지!


그런데도 난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돌아와서 우리끼리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이 나라 사람들에게 선진국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가르쳐주는 거야. 쓰레기도 줍고, 함부로 버리지 않고, 이웃을 배려하고, 또 아이들에게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곳인지 보여줄 수도 있고.


난, 그런 마을이 생기면 조그만 카페를 하려고 해. 완전히 미국식으로 하는 거지. 여기 이 음식점처럼. 젊은이들이 찾아오면 직접 맞이하고 서브도 할 거야. 하우아유? 마이 네임 이즈 에드. 웟 우쥬라익 드링크? 하는 거지, 하하하. 멋있잖아!


뭐, 영어마을에 입소하는데 몇 백 만 원씩 낼 필요가 뭐 있어? 아무나 오다가다 들리면 되는 거지, 안 그래! 그래가지고는 돈 없는 아이들은 평생 미국 근처에도 못 가보는 것 아냐!


삼백 불 가져와서 이만큼 살면 됐잖아, 낼 모레가 칠십인데 뭘 더 바라겠어?


내 생각에는 4~50 가구 정도가 좋을 것 같아. 이번에 전남 광주에서 한상(韓商)대회가 10월 말에 열리거든. 그 때 내가 엘에이 대표로 참석할 거야. 우리 그 때 만나서 다시 이야기 하자구. 어떻든 금년에는 장소만큼은 결정해야 해. 안 그러면 힘들어. 지금 결정을 해도 입주하려면 4~5년은 걸릴 텐데, 그러면 내 나이가 얼마야!


우리 한 번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노력해보자구!


<후기>

에드 형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제대로 옮겼는지는 자신이 없습니다만, 대충 이런 뜻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엘에이를 떠난 것이 목요일 저녁이었는데, 토요일에 북유럽 여행을 위해 모스코바로 떠난다고 들었습니다.

다음달에는 그분의 꿈인 미주교포마을을 위한 진척이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 에드 형님 저택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