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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내가 만난 사람들 (5)

(2013년 8월 22일에 작성한 글)

 

"1970년대에 생긴 일이야, 1974년 9월 말이었지, 아마. 야, 그게 벌써 40년이 다 되어가네! 세월 참 빨라, 헛헛. 여기 LA에 살면 계절변화에 무뎌지니까 세월 가는 것도 사실 잘 몰라.


그 날 내가 어딜 다녀오느라고 좀 늦었어. 내가 가야 마감을 하고 종업원들이 퇴근을 하는데, 미안해서 종업원에게 전화로 퇴근하라고 했어. 가게에 와서 보니까 다 가고 캐쉬어 한 명만 기다리고 있더라고. 그래서 그날 마감만 인계 받고 얼른 들어가라고 했지. 나혼자 가게에 남아 장부 대충 보고 현금을 챙겨 문을 닫으려고 밖에서 셔터를 내리는데, 오른 쪽 귀 밑에 갑자기 서늘하고 차가운 느낌이 나는 거야.


야, 그런 공포는 난생 처음이었어. 순식간에 그게 권총이란 것을 눈치챘는데 온 몸에서 소름이 쫙 돌며 난 이제 죽는구나 싶은 생각 밖에 안들더라구. 무의식 중에 팔꿈치를 내 질렀어. 내가 젊었을 때 운동을 좀 했잖아. 공포심에 반사적으로 죽을 힘을 다해 팔꿈치 가격을 했으니 그 힘이 오죽 했겠어. 무언가 닿는 것 같더니 그대로 팔꿈치가 물체를 관통하는 느낌이 들면서 '아, 이 새끼 제대로 맞았구나!'라는 생각이 스치더라구.


돌아보니 커다란 덩치가 그대로 댓자로 나자빠져 꿈틀거리더라구. 몇 초 정도 부들부들 떨더니 그대로 죽어버렸어. 내 팔꿈치가 명치에 제대로 꽂힌 거야.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흑인이었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엠블런스가 오고 경찰차도 여러 대 오는데, 나는 거의 혼이 나가서 아무 생각이 안 나더라구.


재판이 열렸어. 그것도 여러 차례나. 난 무죄판결을 받아 풀려났지만, 그 가족들을 재판 때마다 봐야했어. 마지막 날인가, 죽은 사람의 동생인지 형인지 덩치가 크고 험상궂게 생긴 흑인이 내게 다가와 협박을 하더군.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나와 내 가족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거야.


그 후로 우리 가족은 해마다 이사 다녔어. 무서웠던 거야. 매일 악몽에 시달리고, 누가 뒤를 쫓지는 않는지 불안하고 그렇게 40년을 살았어. 그런데 이상하게 한국에만 가면 악몽을 안 꿔. 밤에 잠도 잘 자고 마음이 편안해져.


한국에서는 사실 이웃에게 왕따로 살거든. 처음에는 이웃들에게 잘 보이려고 엘리베이터에서 아이들 만나면 쵸코렛도 나눠주고 그랬어. 그랫더니 나중에는 아이들이 고마워할 줄을 모르더라구. 미국에 갔다와서 깜박 잊고 안 사오면, 오히려 아이들이 왜 안 주냐고 하더군. 내가 사다주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야, 참내.


내가 38년 생이잖아. 그 옛날에도 우리집이 좀 괜찮게 살았었거든. 나이 30에 미국행 비행기를 탔어. 그 때는 달러를 가지고 나올 수가 없었어. 우리 어머니가 양복의 어깨뽕을 빼고 거기다 $3,500씩 7천 불을 넣어 주셨지. 그걸 비행기 화장실에서 뜯어가지고 주머니에 넣었어. 입국심사할 때, 세관원이 내 돈을 보더니 깜짝 놀라는 거야. 그 때는 그게 꽤 큰 돈이었거든. 보통 한 두 달 체류허가를 주는데 나는 담박에 6개월을 주는 거야.


남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1년 정도 공부했는데, 남들 돈 버는 거 보니까 공부보다는 장사해서 돈 벌고 싶어지는 거야. 그래서 하기싫은 학교공부는 때려치우고 비즈니스를 시작했어. 그 때만 해도 비즈니스 하기 정말 좋았어. 두어 달만 벌면 비즈니스에 들어간 모든 비용을 뽑고 남았다니까. 공부 그만 두고 비즈니스 하기 잘 했다고 생각했었지. 그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어휴,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 모를 거야! 그럼, 절대 알 수 없지. 난 한국이 좋고 편한데, 마누라쟁이가 싫다네. 그런데 한국에 나가 살게 되면, 나는 우리처럼 미국에 살던 사람끼리 모여 살았으면 좋겠어."


여기까지가 장로님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다. 처음 장로님을 해남에서 뵈었을 때는, 왜 굳이 한국에서 지내시겠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물메이트 이야기' 참조. 2012년 4월 18일, 한국살기에 필요한 정보)


장로님을 처음 뵈었을 때, 범상치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연세에 비해 꼿꼿하시고 풍채가 있어 보였다.


<후기>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분들이 원하는 것은 역이민해서 한국에서 살아가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곳 카페에서나, 중앙일보 블로그에서 제가 남긴 글을 읽고, 자신들의 이야기인양 느꼈을 수도 있고, 저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빙산을 떠올렸습니다. 사람들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이지요. 숱한 스토리는 바다 밑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경주애인(敬主愛人)님이 쓰신 '상처와 치유'라는 글을 읽고 생각해보았습니다다. 바다 밑에 있어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끄집어 내야 진정한 치유가 이루어진다고 말입니다. 육체적인 상처는 그 아픈 곳을 건드리지 않고서는, 혹은 그 상처를 꺼내 어루만져주지않고서는 치료가 안됩니다.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죽을 병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분들이나, 일반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지독한 아픔을 체험한 사람들은 무언가 다른 

경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이 없는 분들이 쉽게 이야기 하는 것은 경솔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진실만이 모든 상처와 아픔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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