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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내가 만나본 분들 (4)

(2013년 8월 19일에 작성한 글)

 

- 한국이 좋으세요? 다시 돌아올 생각 없어요? 한국에 갔다가 못 살겠다고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던데......


ㅇ사장은 덴버에서는 가장 큰 한인 마켓의 주인이다. 고등학교 시절 절친이었던 친구를 만나러 콜로라도 덴버를 처음 찾았던 것이 30년 전인 1983 년이었다. 컴퓨터 회사의 연수생 시절 플로리다 멜번에 위치한 Harris Control Division에서 트레이닝을 받가다 SMD(Storage Module Drive)라는 하드 디스크 교육을 받기 위해 캘리포니아 실리콘 밸리 서니베일에 자리한 CDC(Control Data Co.) 교육센터에 가는 길에 들린 이후로, 미국에 방문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오며 가며 들리곤 했었다.


ㅇ사장은 친구의 친구이었다. 내 친구는 CU(Colorado University)에서 전자공학 학부와 대학원을 마쳤으니, 이민 1세라기 보다는 1.1세나 1.2세라고 해야겠지만, 성격 좋고 활달한 그 친구의 주위에는 한국에서처럼 친구가 많았다. 덴버를 방문할 때마다 그 친구의 친구들과도 자리를 같이 해서 몇몇은 잘 알고 있었다.


이번 방문은 10여 년만이었으나, 전화할 때마다 내가 아는 친구의 친구들 근황을 묻기도 했는데 ㅇ사장은 그런 이들 중의 하나였다. H마트가 덴버에도 생겼다는 말을 듣고 ㅇ사장이 걱정이 되어 물었던 적이 있었다.


- 그 친구는 괜찮아. 뚝심도 있지만 적어도 덴버에서는 인심을 잃지 않아서 H마트와 경쟁해서 살아 남았어. 가게를 옮겨서 더 크게 열었거든. 다른 곳은 문 닫기도 했는데, 그 녀석 가게는 끄떡 없어. 걔 신장이 나빠서 투석까지 했었잖아. 복수까지 차서 좋은 친구 하나 잃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운 좋게도 복수가 빠지고, 신장과 간을 이식받아 건강을 회복했어. 좋은 일이 올 때는 겹쳐서 온다고 늦둥이 아들까지 얻었다니까. 요즘 덴버에서 살 맛나는 놈은 그 녀석 밖에 없어.


덴버에 머무는 동안, 여느 때처럼 친구의 친구들을 만났다. ㅇ사장을 만나러 마트에 들렸을 때, 냉장 진열장에서 한국 음료수를 꺼내 권하고는 마트의 뒷쪽 로딩 덱으로 안내했다. 담배를 꺼내 물고나서 내게 한 질문이었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 제주에 살고 있다는 것이 ㅇ사장에게는 이채로웠던 모양이었다.


- 나는 이곳이 좋아요. 한국에 돌아가서 살 생각은 아직까지는 전혀 없거든요.


대륙의 한가운데 있는 덴버는 동쪽으로는 평평한 대륙이고 서쪽으로는 로키산맥이 버티고 있는 고지(高地)에 위치한 도시다. 그런 도시답게 갑자기 하늘에 시커먼 구름이 몰려들며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보며 내가 답했다.


○ 미국처럼 모든 것이 풍족하고 풍요로운 나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가장 살기 좋은 나라지요. 한국은 아직도 부족한 게 많은 나라구요. 법질서도 그렇고, 인구는 많고 땅은 좁은 나라잖아요. 그런데도 내가 태어나 자란 나라라 그런지 그 나라에서는 편안함을 느껴요. 그냥 편안해요. 그뿐입니다. 한국에 가서 미국의 좋은 점을 잊지 못하는 분들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을 거에요. 부족한 게 많은 나라잖아요. 한국에서는 미국의 좋은 점 잊고 살아야 하고, 미국에서 살려면 한국의 편안함을 잊고 살아야겠지요. 저도 아이들이 어렸다면 감히 돌아갈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건 그렇고, 참 대단하십니다. 한아름과 경쟁할 생각을 하시다니? 한아름이 들어오면 다들 문 닫는 분위기던데. 달라스에서도 그렇고, 뉴저지 에디슨에서도 그랬다고 들었거든요.


- 하하, 나도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H마트가 들어오면 두 가지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알아서 문을 닫거나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거나. 덴버에서 이 비즈니스만 30년 입니다. 저도 노우하우가 있고 지들과 싸우는 방법도 압니다. 가게 옮기고 확장하는데 백 만불 가까이 들었지만, 자신 있습니다.


바람이 거세지며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로딩 덱 입구의 철문이 바람에 철컹거리기 시작하자 ㅇ사장은 철문을 움직이지 않게 단도리를 하려는지 비를 맞으며 철문 쪽으로 가서 헐거워진 쇠사슬을 당겨 양쪽 철문을 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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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마주 앉았다. 

고등학생 시절 절친은 또 있었지만, 내가 이민이란 걸 택한 이후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친구는 이 녀석 뿐이다.

나와 이 친구는 가정형편도 비슷했다. 가난했었고 단란한 가정도 아니었다.


다른 친구에게는 감히 털어놓지 못하는 집안 일도 이 친구와는 부끄럼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를 '꼰데'라고 비하하듯 칭했었다. 나는 지금도 모른다, '꼰데'가 어디서 온 말이고 무엇을 뜻하는 단어인지.


우리 사이에 있는 테이블에는 전골이 끓고 있었고, 소주병과 소줏잔이 놓였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전처럼 가끔 전화나 하며 지내겠지.


야, 임마! 꼰데가 바로 너야. 우리가 조롱하고 비웃었던 우리 아버지들, 기억 나냐? 꼰데라고 불렀던 거? 네가 바로 꼰데야, 임마! 내가 대니에게 물어보았거든. 아빠가 무섭다고 하더라!


녀석은 늦게 결혼했다. 40대 중반에. 그 사정은 잘 알지만, 그걸 여기에 옮길 수는 없다. 

하나 뿐인 아들 대니가 이제 겨우 12살이다.


- 대니 아빠는 듀크씨가 부럽대요. 아이들 다 키워놓고 은퇴생활 하는게.


녀석의 와이프가 내게 했던 말이다.


세상이 다 좋을 수만은 없다. 그게 세상 이치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 또한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다. 이민을 떠난 사람도 그렇고 한국에 남은 사람들도 그렇다.


- 야, 너 임마! 재익이 어떻게 키운 거냐? 재익이는 아직도 아빠가 무섭다고 하더라. 걔 잘 키웠어! 얼마나 말도 똘똘하게 잘하고 술도 넙죽넙죽 잘 하는지 아주 귀엽더라.


재작년, 아들 녀석이 다녀간 뒤에 조카를 만난 형이 내게 한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내 아버지, 내가 '꼰데'라고 호칭하며 경멸하던 아버지를 내가 닮고 있다고. 내가 바로 그 '꼰데'라고.


어느날 성당 미사시간에 들었던 신부님 강론이 생각난다.

육체적인 것만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도 유전된다는 내용이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그 아들에 그 아버지!


- 미국에서의 아카데믹 히스토리가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 내가 대학원에서 안테나로 마스터를 받았잖아.


녀석은 금년 초에 레이오프 당했다. 

50대 후반에 당한 레이오프! 나라면 더 이상 직장생활은 포기하고도 남았다.

그는 달랐다. 지난 6개월 동안 타운 도서관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하고 인터뷰 준비를 했다고 했다.

제주에서 만나 친구가 된 주노아톰이 스스로 은퇴할 나이에 내 친구는 취업을 위해서 공부를 했다는 거다.


아무리 친구지만, 그 나이에 취업하고자 노력한다는 사실이 존경스럽다는 내말에 친구는 답했다.


- 리얼터(복덕방) 라이센스도 있으니까 다른 일 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냐. 그런데 사람들 찾아다니며 아쉬운 소리 하고 다닌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더라. 야, 나 그래도 열심히 준비했어. 매일 라이브러리 다니며 새로운 스크립트 랭귀지도 공부하고 데이타베이스도 다시 공부하고 그랬다. 나, 아직은 자신 있어 임마!


결국, 친구는 성공했다. 덴버에 헤드쿼터가 있는 내셔널 와이드 컴퍼니에 취직했다. 세컨드 인터뷰 하는 날, 내가 동행했었다. 3~40분 있다 나온 친구의 얼굴은 환했다.


한국에서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 않았을까! 나도 젊었을 때는 내 분야에서 최고로 통했었다. 지금도 구글에서 내 이름을 치면 언젠가 썼던 논문 제목이 나온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다. 관리자가 된 탓이다.


LA에서 다시 만난 갈대 선배님이 생각난다.

44년 생인 선배님은 관리자 되기가 싫었다고 했다. 엔지니어로 남을 방법을 궁리하다가 그것이 가능한 미국행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현역에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엔지니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도 엔지니어가 적성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누구나 관리자가 되어야 했다. 적당한 때에 관리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낙오자나 다름없었고, 그 탓에 나는 남들 보다 일찍 관리자가 되었다. 내가 과장이란 타이틀을 가졌을 때, 내 동기들은 모두 나보다 서너살 위였고 그들은 다 친구처럼 지냈다. 그들이 반말하면 나도 그들에게 반말 했다. 나이는 내게 숫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 한국의 내 친구들은 대부분 정년퇴직을 했다. 직원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위직 신분으로 정년을 하고 자회사 본부장(전무급)으로 간 친구들도 있다. 나는 그것을 일찌감치 포기했고 그 덕에 내 아이들은 미국에서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삶은 내 것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친구의 친구인 A를 후터스에서 만났다. 빵빵하게 떠질 듯한 몸매를 한 젊은 여성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고 우리는 맥주와 치킨을 시켰다. 천정에 걸린 TV에서는 덴버 브롱커스와 샌프란시스코 49ers 프리시즌 미식축구 경기를 중계하고 있어서 널직한 홀은 손님으로 가득했다. A는 AT&T 계열회사에서 일했었는데 Bell Lab이 Lucent로 분리될 때 주식을 받았고, 주가가 100불에 호가했었다. 20여 년 전에 그런 이야기를 듣고 참 부러워 하기도 했던 친구였다.


주식은 별 볼 일 없어졌고, 아직까지 그 계열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자신이 관련된 제품이 없어지지 않는 한 짤리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결국 언젠가 짤리는 것은 확실하다고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후가 걱정되 보이지는 않았다. 와이프가 아직도 우체국에서 일하고 있었고, 두 딸 중 큰 아이는 출가시켰다고 한다. 사는 날까지는 건강하게 열심히 살자며 악수로 헤어졌다.


친구의 친구인 B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 그 친구는 잘 안 되었어. 옛날에는 모텔을 운영해서 큰 돈을 벌었었는데 욕심이 지나쳤지. 무리하게 투자한 게 문제가 되어 결국 뱅크럽하고 이혼한 뒤 한국으로 돌아간 것 같은데, 그 후로 연락이 끊겼어.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아무도 몰라.


우리보다 한 두 살 어렸던 B의 잘생긴 얼굴이 생각난다.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큰소리를 치던 B는 성공한 이민자로 보였었다. 다른 친구인 C와 D도 결국 욕심으로 하던 사업이 실패했다고 전해 들었다. C의 집에 갔을 때 크고 화려했던 저택이 떠올랐다. 그 때는 미국에 살게 되면 다 그런 집에서 사는 줄 알았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친구와 공항에서 헤어졌다.


"야, 이 새꺄! 너나 나나 더 이상 꼰데 노릇은 하지 말자! 아들하고 친구가 되어야지, 무서운 아빠가 된다는 게 말이 되냐? 최소한 꼰데 소리는 듣지 말아야지!"


<후기>

아들 놈과 사위 녀석과 술 한 잔 했습니다. 남자들끼리만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더니 지들끼리 시간을 겨우 맞춘 자리였습니다.


- 아빠, 제가 귀에 구멍을 뚫고 귀걸이한 것 보기 싫으시죠? 제가 이렇게 하고 다니니까 회사에서는 절 또라인줄 알아요. 겉만 노랗고 속은 하얗다고 생각하는 거죠, ㅎㅎㅎ.

그런데 저는 편해요. 제가 말을 하면 다 어렵게 생각하거든요.


그래, 네 마음대로 하고 살아라.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어. 너도 이제 서른살에 가까운 성인인데, 네가 코에 구멍을 뚫고 다니든 귀걸이를 하고 다니든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냐? 다만, 나중에 후회는 하지 말거라.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네가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라. 그러면 된다.


말이 되어 나오진 않았습니다. 그냥 웃고 말았지요.


이 글은 읽는 분들을 헷갈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창작기법을 조금 흉내내 보았습니다. 글을 읽는 사람을 중심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글쓴이의 의식을 좇아가는 형식입니다.^^


언젠가는 꼭 써보리라 다짐하는 글이 있습니다. 전후세대인 우리가 살아온 방식에 대한 기술입니다. 좋은 아빠에도 실패를 했고 좋은 남편도 아들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소설로 써보고 싶다는 희망입니다. 


▼ 로키 마운틴의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친구와 같이 지냈습니다. 밤에는 별이 쏟아져 내릴 듯한 하늘을 보았고, 낮에는 풍성한 자연을 즐겼습니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광활한 자연의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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