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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어떤 이민자의 아이들

(2013년 6월 21일)

 

- 아빠, 오늘 친구 분들과 골프 치러 가죠? 여기 서랍에 돈 있으니까 필요하시면 가져 가세요.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크레딧 카드 드릴게요. 필요하면 쓰세요.


지난 금요일이었다. 전날 저녁 아이들이 내 스케쥴을 물었었고 나는 골프 치러 간다고 말했었는데, 아침에 출근하는 아들 녀석이 예상치 않았던 말을 했다. 공항 배기지 클레임에서 카트를 사용하는데 5불이 필요했다. 은행에 있는 돈을 믿고 달러는 한 푼도 없이 왔는데, 한국의 크레딧 카드가 무엇 때문인지 작동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양손에 가방을 끌고 나올 수 밖에 없었고, 그걸 본 아들 녀석이 돈 한 푼 없이 나가는 나를 염려했었나 보다. 그걸 사용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흐믓한 마음으로 지갑에 챙겨 넣었다.


난 좋은 부모는 아니었다. 어떻게 키우겠다는 생각은 있었으나, 아이들과 교감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아이들을 엄하게 훈육했다. 특히 대엿살이 되기 전에 확실하게 잡아서 학교에 다니게 되면 부모가 무서워서라도 공부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생각은 아이들이 내게서 멀어져가게 했고, 더군다나 서로가 힘든 이민생활에서 불통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대학에 진학하면서 다시는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들이 학비를 벌어가며 힘들게 학교생활을 할 때도, 내게 힘들다거나 도와달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내게 상의 하나 없이 휴학을 했고, 나보다는 친구들이나 선배의 조언을 듣고 진로를 결정했다. 마음은 몹시 아팠지만, '그랬구나' 한 마디 외에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내가 자랐던 이야기나 공부했던 과거 이야기를 할라치면 질색을 하곤 했다. 더군다나 미국에서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는 나는 그들에게 적절한 조언을 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휴학하고 식당에서 웨이츄리스로 일하던 아이를 살살 달래서 내가 다니던 회사에 취직시킨 것이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썩 잘한 일이었다. 아이와 같이 출퇴근을 하면서 회사생활을 가르쳤고, 나름대로 힘껏 뒷바라지를 했다. 아이는 금요일 저녁만 되면 자기 형제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면서 아이들과의 관계가 조금씩 풀려가기 시작했다.


- 하하하 아빠, 그때는 우리가 그랬지!


옛날에 너희들이 나를 얼마나 힘들게 했었는지 기억하냐는 질문에 아이가 대답하고 있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아이들과 함께 이렇게 웃고 말하며 지난 날을 회상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서버번에 집을 구입한 탓에, 한국 아이들이 거의 없는 학교에 아이들을 보냈다. 공부 잘 한다고 소문난 P 자매들과 친해지기를 원했고, 변변찮아 보이는 L 자매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꺼렸다. - 지금 돌이켜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이야기지만.


- 우리를 이해해주고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L 언니들이었어. P 언니들은 우리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구. 공부가 힘들기도 했지만, 왜 공부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어.


먹고 살기 힘들어서가 아니고 단순히 싫어서 한국을 떠났던 나는, 아이들이 미국인이 되기 바랬었다. 집에서도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의 역사를 배우며 미국 주류사회의 일원이 되길 원했지만, 아이들은 내 바람대로 되어주지 않았다. 강제로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문을 외우게 윽박지르고, 말과 문화 등 한국을 멀리하도록 강제했지만 아이들은 한국말을 고수하고 한국음악을 듣고 한국아이들과 어울렸다.


여름방학에는 프라이빗 스쿨에도 보내고 부족한 과목은 이웃의 대학생에게 교습을 받게 했지만, 아이들의 SAT 성적은 나아지지 않았다. 내게는 실망스럽기만한 대학에 갈 수 밖에 없었다. 내 고등학교 시절과 비교하면 '꿈'과 같은 환경을 마련해주었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 아이들에게는 그저 그런 환경이었을 뿐이었다. 내가 들인 돈과 시간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채, 아이들은 자기들 방식대로 성장했다.


그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고, 다들 열심히 살고 있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아들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짐에 가서 운동을 하고서 출근하고, 플렉서블 출근제를 하는 딸 아이는 5시 반에 일어나 6시에 출근하고 있다. 여전히 한국음악을 듣고 한국 TV를 다운로드 받아서 보고 집에서는 한국말을 사용하며 한국친구들과 어울린다.


- 형편이 안 되는데 어떻게 차를 사요? 차에 들어가는 비용이 얼만데. 괜찮아요, 사람들에게 부탁하면 되요. 그리고 정 필요하면 동생들 차를 이용하면 되니까.


한 아이가 차가 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차를 안 가지고 다닌다는 게 말이 되는 이야긴가! 그 아이는 운동신경 탓인지 운전을 가르칠 때 세 아이 중에서 가장 느렸다. 뉴저지를 떠나기 전, 아이에게 면허를 따게 해주고 나서, 차를 사주겠다고 했더니 아이가 하는 말이었다. 내 새끼지만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가 이번에 결혼을 하고,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칫과, 청소업체, 잡화무역업체 등 한인들이 운영하는 작은 회사에서 어카운팅을 봐주던 아이가 이제야 제대로 된 직장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다음달 1일 부터 다니게 될 회사는 50 마일 이상 떨어져 있기에, 신혼집을 구할 겸 회사근처의 아파트를 같이 보러다닌 것이 지난 일요일이었다. 하루종일 돌아다닌 끝에 타운하우스 비슷한 플로어 플랜을 가진 아파트에 계약을 했다. 이제 녀석은 차를 사야 한다. 혼다 어코드를 타고 다니는 아이가 차를 중고로 팔고, 그 아이는 새 차를 사기로 했다. 재정이 넉넉한 아이가 그렇지 못한 형제를 위해(?) 헐값에 팔고 자신은 핑계김에 새차로 갈아타기로 한 것이다.


그게 아이들이 사는 방식이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지만, 부모는 물론 친척 하나 없는 이국 땅에서 서로 도와가며 몸으로 체득한 방식이었다. 아이들은 약속된 장소에 공동으로 사용할 일정금액을 두고, 생활비로 쓰는 돈은 그곳에서 빼다 쓰고 있었다. 자기들 끼리 정한 방법으로.


그래, 검은 고양이면 어떻고 흰 고양이면 어떠냐! 쥐만 잘 잡으면 되지!

미국에서 한국인으로 살든, 한국에서 미국인으로 살든 아무려면 어떠냐, 너희들만 좋고 행복하면 그만이지!

어리석은 사람은 너희들이 아니라, 쓸데없는 똥고집을 부려 너희들을 힘들게 한 바로 나였구나!


<후기>

한국에서 여동생 집에 있을 때, 오랜동안 연락이 없었던 옛날 동료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나처럼 제주에 내려와서 살려고 한다더군요. 일이 잘 안 풀린 듯 보였습니다. 매우 똑똑한 친구였지만, 그 친구를 회상하면 '참 분수에 맞지 않게 사는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여동생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부모님에게 배운 것이 많지는 않지만, 분수에 맞게 사는 것만은 뼛속으로 배웠다 라고.


열흘 가까이 아이들과 지내면서, 나도 아이들에게 가르쳐준 게 별로 없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만큼은 본보기로 보여준 것 같다는 생각에 혼자 웃었습니다.


아래에 우리 세대가 학생시절에 즐겨 읊조리던 푸시킨의 시를 옮겨 보았습니다. 지금 제게 딱 들어맞는 글귀 같아서 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있는 것,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버리고, 

지나가 버린 것은 그리움이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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