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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딸과의 통화

(2013년 1월 24일에 작성한 글)

 

어제의 일이다. 학원차를 운전하고 있는 도중에 휴대폰이 울린다.

 

- 아빠, 나. 지금 뭐해?

 

○ 운전하고 있는데. 왜? 무슨 일이 있니?

 

시간을 보니 오후 한 시가 훨씬 넘었다. 뉴저지 시간으로는 한밤중이다.

 

- 아니 별 일은 아니고. 아빠, 운전하는데 통화해도 돼?

 

○ 그럼, 이어폰 끼고 있으니까 이야기 해라.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딸이 전하는 이야기다.

 

- 아빠, B사 알지. 그 회사에서 잡 오퍼가 와서, 다음주에 인터뷰한다. 너무 자주 회사를 옮기는 것 같아서 그렇긴 한데, 시니어 어시스턴트를 주겠데. 연봉도 1~2만 불 더 받을 수 있고. 지금은 그냥 어시스턴트로 있잖아. 지난번 회사에서 컨설턴트로 일할 때보다 연봉이 깎여서 옮겼잖아, 레귤러 직원이니까. 아무래도 장래를 생각하면 옮기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 작년에도 인터뷰 했었거든. 그때도 인터뷰했던 매니저가 굉장히 좋아했었어. N사 프로젝트를 많이 한 걸 보고 내가 딱 적임자라는 거야. 그런데 인사충원요청이 HR(註: Human Resource, 인사부서)에서 리젝트 되는 바람에 안 되었는데 금년에 T/O가 늘었나 봐. 그러니까 기회는 좋은 기회야.

 

- 그런데 문제는 지금 폴하고 일하잖아. 폴 팀에 사람은 나 하나 밖에 없거든. 충원을 요청했는데, 아직 승인되지 않았나 봐. 지금도 굉장히 일이 많거든. 그런데 나까지 빠지면, 폴이 많이 힘들 거야. 그래서 3~4주 시간을 달라고 할 건데, 그쪽에서 바로 출근하라고 하면 어떡하지.

 

- 아빠도 폴을 알잖아. 일은 잘 하는데 매니저로서는 문제가 있어. 일 욕심이 많아서 일은 많이 가져오는데, 제대로 마무리를 못해. 그래서 내가 마무리하느라고 항상 바쁘거든. 좋은 점도 있지. 배우는 게 많긴 해. 그래서 미안하기도 하고.

 

- 지난번 회사에서 리스트럭춰링(구조조정)할 때 직원들이 많이 불안해 하더라. 내가 속한 부서는 괜찮았지만, 다른 부서에서는 많이들 나갔거든. 그때 폴이 다른 회사에 가려고 레주메(이력서)를 보낸 걸 아는 사람을 통해 들었다. 불안하지 않으면 그랬겠어? 폴도 불안하기는 한가 봐. 폴은 그때 우리는 괜찮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랬었거든.

 

- 아빠, 나는 운이 좋은 것 같애. 그런데 항상 지금처럼 운이 좋을 순 없겠지. 그래서 좀 불안하다. 또 다른 회사에 가서 새로운 환경을 익혀야 하는 것도 신경 쓰이고.

 

계속되는 딸 아이의 말을 끊고 중간중간 나는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 그렇다면 당연히 옮기는 게 맞지. 뭘 고민해. 미국에서는 능력껏 직장을 옮겨다니면서 프로모션 하는 게 당연한 것 같더라. 한국이라면 다르지만. 너 옛날 나와 친했던 J 아저씨 알지. 그 친구도 워싱턴 대학을 나오고 노스캐롤라이너에서 마스터를 받았는데, P&G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서 몇군데나 옮겨 다녔잖아. 옮길 때마다 승진을 해서 나중에 우리 회사에 올 때는 어소시에잇 디렉터로 왔었어.

 

○ 너도 아다시피, 아빠는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매니저로 오래 일했잖아. 좋은 매니저는 직원들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는 매니저야. 남에게 일을 시키려면, 그 사람의 베스트를 끌어내는 게 중요한데, 그럴려면 직원들이 원하는 바를 알아서 잘 충족시키는 것이 중요해. 직원들을 이용해서 나만 잘 되겠다는 것은 매니저로서 자격이 없는 거야. 누가 이용 당하는 것을 좋아하겠어! 그런 생각이 들면 대충대충 일하고 말지, 최선을 대해서 열심히 하겠어. 내 이익보다는 직원들의 이익을 더 챙겨야 그게 좋은 매니저인 거고, 그런 매니저와 일하는 직원들은 항상 베스트를 다하게 되어 있지.

 

○ 자랑은 아니지만, 지난 날 나랑 일하던 Jay나 Young으로부터 연락이 지금도 온다. 빈말이겠지만, 나와 일할 때가 재밌었고 그립다고 하더라. 그리고 매니저는 항상 어떤 일이 닥쳐도 실패하지 않도록 플랜 B를 가지고 있어야 해. 폴이 네가 나간다고 해서 일을 처리하지 못하지는 않을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네 걱정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야. 벌써 1년 동안 네가 최선을 다해 일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니까. 폴은 직원이었을 때는 똑똑하고 일 잘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브랜치에 매니저로 갔을 때는 별로 일 잘한다는 이야기가 들리지 않더라.

 

○ 인터뷰할 때, 네가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야기 해라. 떠나는 직장을 생각해서 3~4주 여유를 달라고 해. 그러나 새로 시작하는 곳이 더 중요하니까 그런 생각을 이야기 하는 것도 잊지 말고. 그렇게 하면 더 좋은 인상을 주게 될 거야. 즉 네 PR도 되는 거지. 내가 사람을 채용할 때도 보통 4주 정도는 시간을 주었으니까 문제는 없을 거야. 아주 급하지만 않다면.

 

○ 아빠가 생각해도 너에게는 운이라는 것이 따르는 것 같긴 해. 그러나 운이라는 것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는 거니까 좋을 때 이지(편)하게 있지 말고, 항상 생각하고 공부하는 자세가 중요한 거야, 알았지?

 

세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걱정을 하던 아이였다. 걱정이 현실로 나타나, 나 몰래 학교를 휴학하고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한때는, 내게 절망감을 주었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살살 달래서 내가 다니던 회사에 취직을 시켰다. 다행이 그때는 시절이 좋아서 지금처럼 취업이 어렵던 때는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담당 매니저나 슈퍼바이저에게 부탁을 해서 경력을 하나씩 쌓게 했고, 같이 출퇴근을 하면서 내가 아는 관련지식을 이야기로 전수해 주었었다.

 

내 도움보다는 아이의 노력과 성실함으로 달성했겠지만, 지금은 어엿한 커리어 우먼이 되었다. 어떡하든 대학졸업장을 따겠다고 저녁에는 주립대를 다니며 학업을 병행하느라 무척 바쁘게 살고 있다. 이제 12~3 크레딧이 남았다고 하니 2~3 학기만 더 고생하면 끝날 것이다. 직장을 옮기고 나면 금년 5월에 나를 보러 오겠다는 계획은 취소될 것이다. 재작년에는 아들 놈이, 작년에는 다른 딸이 다녀갔다. 금년에 녀석이 못 오면, 나라도 한 번 아이들을 보러 미국을 다녀가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 그 아이가 네 번째로 직장을 옮기려 하고 있다. 가는 회사도 마찬가지지만 지금 회사도 세계 굴지의 10위 안에 드는 제약회사다. 고등학교 학력으로 한국이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미국이라서 가능했다.

 

<후기>

연봉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아니지만, 지금은 세 아이들 중에 가장 샐러리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트에 가서 5불 짜리 립스틱을 살까 말까,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결국 놓고 나오는 아이입니다. 절약하는 것은 좋지만, 저를 닮아 쪼자분하게 살까봐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복 많은 놈이 데려갈지 아깝긴 하지만, 당장이라도 좋은 녀석이 나타나 빨리 데려가길 기대해 봅니다.

 

- 딸 바보 아빠의 딸 자랑입니다. 내딸 이쁘죠? 좌측의 아이가 이 글의 주인공입니다. 오른쪽의 쌍둥이 언니는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가 있다는군요. 지난 크리스마스 휴가때 푸에르토 리코에서 찍은 사진을 아이의 페이스북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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