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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내가 경험한 이민생활

딸과의 데이트

(2013년 6월 2일)

 

정말 오랜만에 아이와 일주일을 오롯이 함께 보냈다. 지난 일요일 밤에 와서 어제 토요일 출국할 때까지, 오는 날과 가는 날을 제외하면 불과 5일이었지만, 그 5일 동안 주야장창 같이 지냈다. 집사람은 90이 넘은 장인 수발 때문에 꼼짝도 못한다.

 

물론 같은 회사를 다닐 때도 같이 생활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먹고 마시며 붙어서 돌아다닌 것은 아이가 성인이 되고 나서는 처음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 해부터 세 아이가 돌아가며 다녀간 셈이다. 키울 때는 '원시인'이니, '야만인'이니 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키워놓고 나니 장점(?)이 많다. 작년에는 시간당 $50을 받는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어서, 다른 아이와 같이 오겠다는 걸 극구 말렸었으나, 이번엔 레귤러 잡으로 들어가서 휴가를 받아 나왔다.

 

비가 오는 날임에도 한국의 전통시장을 보여주기 위해 오일장에도 데려갔고, 제주의 이곳 저곳 아름다운 풍광을 찾아 다니기도 했고, 서울에 와서는 낮에 명동과 남대문 시장과 같은 명소들을 둘러보고 저녁에는 사촌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핏줄의 정을 나누기도 했다.

 

- 아저씨, 천원만 깎아주면 안 돼요?

 

남대문 시장에서는 회사직원들에게 기념으로 줄 한국문양이 들어간 기념품 10개들이 ₩12,000짜리를 둘러보면서 아이가 하는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기만 했다.

 

- 아빠는! 내가 힘들게 벌어서 내가 쓰는데 왜 아빠가 뭐라 그래.

 

돈도 많이 벌면서 깎지 말고 그냥 사라는 내 말에 아이가 핀잔을 주고는, 환하게 웃고 윙크를 하며 내 팔에 자신의 팔장을 낀다. 이런 복덩이를 누가 데려갈지 샘이 난다.

 

- 아빠, 그냥 재미지. 다른 데 가서 한 번 더 보고 사자. 달라는 대로 그냥 사면 찜찜하잖아.

 

길거리를 다니며 아이스크림도 사서 들고 다니기도 하고, 갈증이 나면 아무 카페나 들어가 음료수를 사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가 화장품 가게나 옷 가게에 들리면 나는 밖에서 기다렸다. 오랜만에 만난 부녀는 할 말이 많았다. 지나간 이야기, 직장 이야기, 남자 이야기, 결혼 이야기, 돈 이야기, 앞날 이야기 등등.

 

- 아빠는 우리들을 엄하게 키우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사랑을 준다고 했지만, 난 그냥 아빠가 싫었어, 너무 무서웠거든. 무서우니까 아빠가 주는 건 다 싫더라.

 

그래, 그럼 너는 아이 낳으면 아이들을 엄하게 키우지 마라.

 

- 싫어, 나도 엄하게 키울 거야. 오냐, 오냐 해서 키운 아이들은 너무 버릇이 없어서 안 돼, 하하하.

 

- 소개팅을 해서 만난 남자가 자꾸 연락을 하는 거야, 난 싫은데. 80년 생인데 너무 늙어보이는 거야.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까, 돈 자랑을 하는 거야. 맨하튼에서 코머셜 디스플레이 관련 회사에서 일하는데, 연봉이 10만불 넘는다는 거야. 칫, 누구는 그 정도 못 버나?

 

글쎄다, 사람이 겉모습보다는 속이 중요하니까 나이가 들어보이는 거야 괜찮을 수도 있지만, 내세운다는 게 자신의 포부나 미래가 아니라 기껏 돈 얼마 번다고 한다면 그건 아닌 것 같다.

 

- 아니, 아빠는 내가 못 생긴 사람하고 결혼하는 게 좋아? 하하하. 아빠, 우리 저기서 좀 쉬었다 갈까?

 

84년 12월 25일에 태어날 아이였다. 쌍둥이라 그런지 예정일을 훨씬 넘겨, 결국 다음 해에 수술로 태어났다. 2Kg 남짓으로 수술이 며칠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말을 의사에게 들었다. 인큐베이터에 있던 아이를 포대기로 칭칭 감아서 퇴원시켜 집으로 올 때, 차디 찬 겨울 날씨가 참 매섭기도 했지만 마음만은 기쁨에 들떠 있었다. 바로 엊그제 일만 같다.

 

이제 한 아이는 평생의 반려자를 찾아 결혼을 앞두고 있고, 다른 아이는 바로 앞에서 웃고 떠들며 나에게 행복을 주고 있다.

 

- 그때, 아빠 회사에 들어간 거 참 잘한 거 같아. 거기서 또래들 만나고 트윙키(註: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하는 2세들을 지칭하는 은어)들 사귀면서 좋아졌다. 그 전에는 많이 힘들었거든. 정체성도 그렇고, 언어도 그렇고 많이 혼란스러웠었는데, 그 회사에 다니면서 사람들 사귀고 이야기를 하다보니 정리가 많이 되더라. 다 아빠 덕분이야, 고마워.

 

아이는 무척 성실하게 일했다. 내용상 실수가 없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를 담당하는 매니저에게 물어보니 만족한다고 했다. 하나 둘 경력을 쌓아가고, 유럽과 서부로 커스터머들에게 출장도 다니면서 커리어 우먼으로 성장해 갔다. 5년을 채우고 그 회사를 나와, 시간당 $50을 받으며 컨설턴트로 중소 제약회사에서 1년 가까이 일하다가, 다른 대기업 제약회사의 레귤러 잡을 찾아 옮긴 것이 1년 전이다.

 

- 고모, 내가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아마 다음에는 애 낳아서 애들 데리고 올지도 모르지, 하하하. 아니, 그 전에 내가 멋진 남자하고 결혼해서 크고 좋은 집에 살고 있을 테니까, 고모가 고모부하고 뉴욕에 놀러 오세요.

 

어제 아침, 고모집을 나서면서 쾌활하게 작별의 인사를 하며 아이는 그렇게 뉴저지에서 기다리고 있을 자기 인생으로 돌아갔다.

 

<후기>

지난 날 아이들과의 대화는 거의 일방통행이었습니다. 내가 말하고 아이는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는 가장 좋지 않은 소통방식이었지요. 어느 순간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시기를 많이 놓친 뒤였습니다.

아이가 대학의 기숙사에 들어가고 나서는 거의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가 내가 하는 말을 아예 듣지를 않으려고 하니 주로 듣기만 했던 거지요.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치유의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가 건강한 모습으로 앞에 나타난 것을 보면.

 

참, 아톰님! 아이가 그날 저녁 맛있게 먹었답니다. 고맙습니다.

 

▼  제주의 어느 해변에서 한껏 포즈를 취한 아이.

 

▼  해녀 박물관에서 해녀 모형과 포즈를 취한 아이가, 내 눈에는 너무 어리게만 보인다. 미국 나이로는 28 살이지만, 띠 나이는 30 살이다.

 

▼  TV 드라마 '올인'의 촬영지로 유명한 섭지코지에서.

 

▼  올레 2코스 끝 부근에 있는 '혼인지'에서. 

 

▼  내 눈에는 이영애보다 내 딸이 더 이쁘기만 하다. 팔불출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ㅎㅎㅎ.

 

▼  공항에서 커피를 마시며 셀카를 찍었다. '아빠, 우리 담주에 뉴저지에서 만나자'면서. 우리 부녀를 본 사람들은 말한다, 눈과 이마가 쏙 빼닮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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