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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제주의 삶

제주 올레길을 완주하고

(2013년 5월 22일에 쓴 글)

 

지난 5월 8일 걸었던 6코스를 끝으로 올레길을 완주했다. 아니다, 아직 18-1코스인 추자도가 남았지만, 그곳은 하루에 한 편뿐인 배로 가야하기 때문에 최소 1박이 필요한 곳이다. 가을 추(秋)가 이름에 있는 섬이니 가을에나 한 번 가볼 예정이다.

 

올레는 제주 서귀포 출신 여성 언론인이자 카톨릭 신자인 서명숙씨(현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가 수십년 기자생활에 지친 심신을 추스리기 위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가 생긴 아이디어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 정도의 길은 제주에도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제주 올레길은 때마침 생겨난 저가항공사와 맞물리면서 전국적인 '걷기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올레길은 제주어로 '마을 길에서 집으로 이어주는 좁은 길'을 의미한다고 한다. 제주에서 나고 자라 아이들만 아는 좁은 길까지 꿰뚫고 있는 사람만이 생각해낼 수 있었을 거다. 제주의 올레길이 유명세를 타자,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서로 다투어 비슷한 길들을 만들고 있으며, 심지어는 일본의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제주 올레의 '노우하우'를 배우기 위해 답사하고 있다.

 

▼ 전형적인 제주 올레의 모습. 겨우 두 사람이 나란히 갈 수 있을만큼 좁다. 

 

제주 올레는 총 26코스로 이루어졌다. 제주 해안을 따라 이루어진 둘레길 21개 코스와 부속섬 3개와 섬의 안쪽을 향하는 2개 코스가 그것이다. 총 길이는 21개 주 코스가 348.6 Km(216.6 마일)와 부속 5개 코스 73.3 Km로 421.9 Km(262.2 마일)이다. 제주의 가장 바깥쪽을 잇는 구불구불 해안도로 길이가 280Km라고 하니까, 코스가 어느 정도 지그재그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대부분 코스는 '오름'이라고 불리는 기생화산 한 두 개씩 끼고 걷도록 안배를 하다보니 길어졌다.(http://www.jejuolle.org/ 참고)


 걷기에 힘든 정도를 상·중·하로 나누어 난이도를 구분했는데, 상급이 8개, 중급이 14개이고, 하급으로 분류되는 코스가 4개로 되어있다. 제일 긴 코스는 22.9 Km인 4코스이고, 가장 짧은 코스는 9코스로 7.1 Km지만 가장 가파른 코스라, 둘 다 난이도는 '상'급으로 분류된다. 평균 16 Km지만 대부분 18 Km 정도 되는 코스가 많아, 올레의 구호처럼 '놀멍, 쉬멍, 걸으멍(놀면서, 쉬면서, 걸으면서를 뜻하는 제주 방언)' 하루에 한 코스 정도는 무리없이 걸을 수 있다. 올레길의 상징은 '간세'라고 불리는 제주 토종 조랑말이다.

 

올레길을 걷기 전에는, 누가 제주를 '아름답다'느니 '세계자연유산'이니 하면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었다. 흥, 그랜드 캐년이나 가보고 그딴 소리 해라, 브라이스 캐년 정도는 가보든가, 플로리다의 키웨스트나 데이토나 비치, 아카디아 해상국립공원 같은 곳을 보고나서 그딴 소리 해라 하고 비웃었다. 보이는 건 온통 쓰레기뿐인데, 창피한 줄도 모르고 아름답다거나 세계적이라느니 자화자찬식 립서비스가 말이 되느냐고 생각했다.

 

올레길을 하나씩 걸으면서 생각이 시나브로 바뀌어 갔다. 물론 미국의 거대한 자연처럼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놀라운 광경(Breathtaking view)은 없지만, 소박하지만 아기자기하면서도 친근하기만 한 그런 아름다움에 젖어갔다. 아무 것도 볼 것이 없는 지루한 시골길을 걷다가 갑자기 나타난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을 하기도 하고, 따가운 햇살이 지겹게 느껴질 때면 서늘한 숲길로 접어들어 땀을 식히기도 한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해변을 걷다가, 어느덧 오름의 정상에 이르러서는 눈 아래 펼쳐진 장관을 구경하느라 갈 길을 잊곤 한다.

 

영화 '자이언트'에 나오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금발에 화려한 드레스를 걸쳐입은 20대의 눈부신 모습을 제주에서 기대할 수는 없지만, 치마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고 모처럼 친정길을 떠난 여인의 손을 잡고 따라나선 소년의 눈에 비친 친근한 아름다움을 추억으로 가진 장년이 그 어릴 때 기억을 떠올리기에는 충분했다.

 

제주의 올레길을 걸으면서 느낀 제주의 속살은 그런 것이었다.


9코스의 출발점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다 만난 부부는, 일년 동안 제주에서 살면서 26개 코스를 다 걸으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4코스를 걸을 때는 60대로 보이는 중국인 부부도 만났고, 혼자 걷는 장년이나 젊은 여자들도 간혹 보았다. 그러나 코스를 완주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오름이라고 해봤자 2~300 미터가 대부분이라 힘든 곳은 별로 없어 스틱도 별로 필요없고, 생수나 몇 개 담아가면 충분했다. 좋은 길동무가 있으면 살아온 지난 이야기나 부담없이 나누며 천천히 걷기에 딱 좋은 길이 바로 올레다.

 

혹 이 글을 본 어느 분이라도 제주에 찾아와서 올레를 같이 걷자고 청하신다면, 기꺼이 길동무로 사설 것이다.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이다.

 

<후기>

제주에 와서 걷기 시작한 올레 전코스를 끝내고 써 본 글입니다. 2011년 봄부터 걷기 시작했는데, 작년에는 일(학원차 운전)을 한다는 핑계로 새벽운동만 했지, 시간이 많이 필요한 올레길은 별로 걷지 않았습니다. 대신 오름은 많이 다녔지요.

 

지금은 뭍에도 이 비슷한 길이 많이 만들어져 흔하다고 합니다. 해남 땅끝마을에서 서울까지 이어지는 삼남길에서부터 서해를 잇는 길도 생겼고, 지리산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등등.

 

어느 곳에 계시던지, 꾸준한 걷기로 그리고 걸으면서 얻는 즐거움으로 건강과 행복을 다지시기 바랍니다.

 

▼지난 5월 5일 축구팬인 아톰님의 초대로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제주 유나이티드와 울산팀의 프로 축구경기를 관람했습니다.

 

▼ 어린이 날을 맞아 입장한 최대(?)관중에게 제주 유나이티드는 3-1 승리로 보답했습니다.

 

▼ 울산은 경기 내내 밀리다가 막판에 페날티킥으로 한 골을 만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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