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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제주의 삶

통시

(2013년 4월 15일에 쓴 글)

 

주노아톰님의 제안으로 클린올레 행사에 처음 참가하였다. 마침 아직 걸어보지 못한 15코스에서 열린다고 하니, 일부러 찾아가서 혼자 걷기도 하는 올레길인데 마다할 리가 없다. 집 근처에 사는 제주 친구를 만나, 이런 행사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더니 자신도 참가하겠다고 한다.

 

친구와 함께 15코스 출발점인 한림항 비양도 선착장에 도착하니, 이미 와있던 아이린씨 부부가 환한 웃음으로 반갑게 인사를 한다.

 

- 집 짓는 것 때문에 바빠요. 하루가 언제 가는지 모르겠어요. 마침 어제 타일을 붙여놓고 마르길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오늘 나올 수 있었어요. 그렇지 않았으면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 없었을 거예요. 듀크씨는 실직했다면서 어떻게 지냈어요?

 

항상 온화한 미소를 띤 얼굴로 학자답게 조용히 말하며 차분한 아이린씨 남편에게, '집은 잘 지어지고 있습니까?' 하고 인사 대신 던진 질문에, 사뭇 진지한 답변이 질문(?)이 되어 돌아온다. 싸이가 '젠틀맨'이라는 신곡을 발표해서 인기몰이 중이라는데, 젠틀맨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이 아닌가 싶다.

 

행사요원들이 나눠준 파란색 비닐봉지와 장갑, 집게도 집어들고, 캔커피까지 주머니에 챙겨넣은 후, 30여명쯤 되어 보이는 참석자들과 함께 걷기 시작하였다. 걸으며 쓰레기가 보이면 줍기도 하고, 걸으며 일행들과 잡담도 나누며 걷는 19킬로는 짧은 거리가 아니다.

 

한참을 걸어 어느 한적한 마을을 지나는데, 제주 친구가 '이것 좀 보세요!'하고 우리 일행을 불러세운다.

 

 

 

- 이게 '통시'라는 겁니다. 아마 저쪽에 보이는 돌무더기로 쌓아 놓은 구석이 사람이 쭈구리고 앉아 용변을 보는 곳이었을 겁니다. 통시는 이렇게 담이 낮아서 일어서면 다 보입니다. 바닥에는 돼지가 몇 마리 있어서 사람 기척이 나면 떨어지는 것을 받아먹으려고 몰려듭니다.

 

- 우스운 이야기를 하지요. 문제는 배탈이 났을 땝니다. 정상적인 용변은 문제가 없는데, 배탈이 나서 급하게 설사로 일을 치루게 되면 난리가 납니다. 먹을 걸 기다리며 밑에서 꿀꿀대던 돼지들이 물벼락을 맞게 되면 몸을 터는 거예요. 어떻게 되겠어요! 하하하, 온통 난리가 나는 거지요.

 

▼ 이런 모습이었을 게다.

 

듣던 우리는 배꼽을 잡는데, 그의 이야기는 계속 된다.

 

- 그래서 통시 옆에는 기다란 작대기를 기대 놓습니다. 용무가 심상치 않다 싶으면 작대기를 갖고 들어가서 돼지들이 밑에 오지 못하게 찔러대는 거지요. 일을 치르면서 돼지까지 쫓아내려니, 얼마나 심각하겠습니까? 충분히 짐작하시겠죠?

 

제주 사람이 같이 걷지 않았다면, 알기는커녕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면서 유쾌한 사람들과 함께 걷는 상쾌한 봄날의 토요일이 마냥 몸과 마음을 개운케 했다.

 

누가 차를 타고 지나면서, 재털이를 털었는지 어떤 곳은 꽁초가 수북하게 쌓여있는 곳도 있었다. 어떤 상x이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런 짓거리를 볼 때는 푸짐한 욕지거리를 즐겁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어떤 개xx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짓을 하면서 제 몸과 제 집구석은 씻고 청소하며 살겠지!

 

관광해설사 제주 친구의 설명은 곳곳에서 계속되었다.

 

- 이곳은 납읍이라고 예부터 선비들이 사는 고을로 유명합니다. 땅도 좋아서 농사도 잘 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여기에는 소가 있는 곳입니다. 반대편인 이곳은 소 먹일 풀을 저장하는 곳이구요. 옛날에는 이렇게 집 입구에 공간을 만들어 소를 키웠답니다.

 

<후기>

지저분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부디 이 글을 보기 전에 식사를 마쳤기를 바랍니다, ㅎㅎㅎ.

하긴 어릴 적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수출할 게 없었던 시절에는 곡식이나 생선, 돼지 같은 농수축산물도 수출했던 모양입니다. 홍콩으로 수출한 돼지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도대체 돼지를 어떻게 키우는지 보고싶은 수입업자가 제주에 와서 보고는 그만 너무 놀라서 수입을 중지시켰다는 전설 말입니다.

 

통시는 원래 돈지(豚地)의 제주방언인데, 원래는 돼지를 뜻하는 사투리 '돗'자가 하나 더 붙어 '돗통시'로 불리웠습니다. 화산섬이고, 육지와 멀리 떨어진 탓에, 자원이 부족한 제주에서는 당연히 모든 게 귀했습니다. 사람이건 동물의 배설물이건 하나도 버릴 게 없었던 게지요.

 

사람의 배설물을 돼지가 받아먹고, 돼지의 배설물은 모아져 밭에 뿌려집니다. 그리고 그 밭에서 자란 채소나 곡식은 다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간 것이니, 자연의 선순환(Virtuous Cycle)대로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온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유쾌했습니다.

 

이 통시 이야기는 두 가지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동안 나라가 발전하고 백성들이 부유해지면서 우리가 얻은 것들이 무엇이고, 그 반대급부로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가 버린 것들이 무엇인가 하는 거지요. 그걸 소재로 글을 써보는 것도 재밌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클린올레 행사에 참석한 일행들이 길을 나서고 있다.

 

▼ 수연(水蓮)이 가득하다. 연꽃이 피는 여름에는 더 운치가 있을 것 같다.

 

▼ 이곳에서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 제주의 전통적인 '올레'길의 모습이다. '올레'란 제주방언으로 길에서 집 대문을 연결하는 소로(小路)를 뜻한다.

 

▼ 걷는 도중에 웅장하고 화려한 절도 만났다.

 

 

▼ 시선이 닿는 곳이 다 그냥 좋았다. 쓰레기만 보이지 않는다면.

 

▼ 이곳은 나중에 다시 한 번 일부러라도 와야 할 것 같다. 일행을 따라가느라 다 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 선비의 고을 애월읍 납입리다.

 

▼ 일행들이 힘겹게 오름을 오르고 있다.

 

▼ 잠시 땀을 식히는 제주 친구.

 

▼ 드디어 오늘의 종착점인 고내포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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