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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집 이야기 - 둘

(2013년 4월 5일에 쓴 글)

 

솔직이 말하자면, 나는 집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과거형이다. 지금은 '아니다'라는 뜻이다.)

그 욕심의 진원지는 아무래도 어릴 때 기억 때문일 것이다. 60년대인 국민학교 4학년 때 이사간 곳은 영등포 신길동 언덕 꼭데기에 가까운 '동신학사'라고 불리던 판자집이었다. 집에는 화장실도 없어서 공동변소를 이용해야 했고, 좁은 방에서 여섯 식구가 생활했다. 철부지 꼬마에게 가장 두려웠던 일 중의 하나는, 학교 친구들에게 그런 집에 산다는 사실이 발각(?)나는 것이어서, 가정방문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나만의 공간이 갖고 싶어서, 중학생 시절에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한겨울에도 온기 하나 없는 다락방에서 지내기도 했다.

 

처음으로 아파트에 살게 된 것은, 86년 승진하여 난생 처음 지방근무를 하게 되었을 때 회사에서 제공한 사택이었다. 방 두 개 짜리 아파트는 얼마나 따뜻했는지, 한겨울에도 아이들이 기저귀만 차고 살았다. 아마 이때부터 겨울에도 내복을 입지 않는 버릇이 생긴 듯하다. 집에서든 회사에서든 내복을 입으면 더워서 답답함을 느꼈다. 그때 아파트의 편리함을 경험한 후, 한국을 떠나는 10여 년 동안 거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갑자기 서울 본사로 발령을 받게 되어 방이동 주택가 2층에 세를 얻어 살 때를 제외하곤.

 

처음 뉴저지에 혼자 와서 집을 구할 때는 2~3십 만 불 사이면 꽤 괜찮은 집을 살 수 있었다. 3십 만 불이 넘어가면 정말 좋은 집을 구할 수 있었지만, 내 분수에는 맞지 않았다.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 내 봉급 수준과 가진 돈에 맞춰 구한 집이 25만 불 수준의 하프 에이커 랏과 3000 스퀘어 피트에 가까운 바이레벨 하우스였다.

 

3 베드룸에 3 풀 베쓰, 2 카 게러지, 넓은 리빙 룸과 패밀리 룸, 와이어 펜스가 쳐진 넓은 백야드, 풀사이즈 이층의 덱과 아래층 패티오, 탁구대를 들여 놓을만큼 넓은 사무실까지 있었던 집은 소위 '드림컴트루'이었다. 게다가 컬데섹에 위치해서 나무잎이 무성한 5월에서 10월까지는 숲속에 집이 있는 듯, 불빛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큐어했다. 한여름 밤에는 반딧불이 가득했고, 저녁 무렵에는 10여 마리의 노루와 사슴들이 펜스를 뛰어넘어 백야드까지 들어와 풀을 뜯곤 했다.

 

 ▼ 당시 살았던 집의 전경. 와이어 펜스 좌측의 잔디도 내가 깎은 것이다. 0.5 에이커에 가까운 잔디를 손질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변에 더 좋은 집들도 많았지만, 내게는 이 집도 너무 커서 일이 많았다.

 

문단속을 하는 일도 없었고, 자동차에는 항상 키를 꽂아 두었다. 현관을 잠그지 않고 며칠씩 집을 비우더라도 아무 일이 없었다. 주변의 집들도 마찬가지였다. 집을 비웠는지 현관 앞에 몇 일치 신문이 쌓인 집들도 흔히 보였지만, 무슨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볼 수 없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잔디 깎고, 낙엽 치우고, 눈 치우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인지 이 집에 살면서 배웠다. 그 넓고 보기좋은 덱도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도 그때야 알았다. 홈데포에 가면 필요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컴프레서도 있어야 했고, 사다리도 필요했고, 갈고리, 트리머, 핸드 카트, 페이트 도구 등등 사야할 것이 항상 있었고, 눈길이 가는 곳마다 해야할 일이 생각났다. 간혹 미국 출장길에 그런 집들을 보면 부러웠고 좋게만 보이던 집이었지만, 그런 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수고도 그만큼 크다는 것을 살아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한국에서는 전혀 상상하지도, 해보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당시에는 한국에서는 주6일 근무를 했었기에, 주5일 근무하는 미국을 부러워했었지만, 미국에서는 일주일에 하루는 집에서 집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할 일이 전혀 없는 한국의 아파트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잔디는 보기에만 좋았지, 그곳에서 할 일이라곤 별로 없었다. 가끔 피치 아이언을 들고 나가 칩핑 연습하는 것이 다였다. 옆집의 백야드가 넓어야지, 내 집의 넓은 백야드는 내 소중한 시간을 앗아가는 괴물일 뿐이었다.

 

▼ 백야드 모습.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들을 생각나게 하는 곳이었다. 저 돌벤치에 몇 번이나 앉아 보았을까! 보기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앉아 본 적도 없는 저 벤치 때문에 잔디 깎는 것만 더 힘들었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행복했을까? 아니었다. 이민 초기의 어려움이 생각나는 곳이었고, 내 인생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었던 곳이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이 집에서의 기억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 아빠, 난 그 집에서 좋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우리들에게는 너무 힘들었던 시기고, 떠올리기 싫은 일들이 너무 많았어.

 

하긴, 내 아이들은 판자집에서의 기억도, 단칸방에서 온 식구가 생활한 적도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와는 달리 집에 대한 욕심이 없다. 자신의 집을 살 여력이 충분히 있어도 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아이들에게 집이란 그저 잠 자는 곳인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그 집을 팔고 나올 때, 곳곳에서 나오는 수많은 물건들에 놀랐었다. 게러지는 물론 창고와 런드리 룸, 패티오와 계단 밑과 같은 갖가지 스토리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건들을 보고서야, 그 집에 사는 동안 비어있는 곳들을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물건들을 샀었는지 깨달았다. 집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집의 노예로 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의자들을 떼어낸 혼다 오딧세이 뒷 부분에 가득 싣고 타운십 가비지 센타에 몇 번이나 갖다 버렸는지 모른다.

 

콘도로 이사한 뒤에야, 주말이나 휴일에 집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눈이 와도 잔디가 자라도, 낙엽이 져도 걱정할 것도 할 일도 없었다. 천 스퀘어 안 되는 집이었지만, 불편한 것은 전혀 없었다. 크고 좋은 집을 봐도 부러움은커녕, 그런 집을 유지하기 위해 공을 들이는 집주인에게 연민이 생겼다.

 

- 이제 돌아가면, 또 다시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야 해. 집이 바닷가에 있는데, 저녁 무렵 백야드에서 보면 노을이 정말 멋있어요. 그런데도 그걸 집에서 보는 날이 며칠 되지 않아요. 거의 해진 다음에 집에 들어가니까. 집은 그냥 잠만 자고 나오는 하숙집이나 다름이 없어.

 

작년 1월 나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제주에 들리신 L 선생이 떠나면서 한 말이다. (제 글 'Better Life를 찾아서 1' 참조, 3/7/2012 하고싶은 이야기들) 시애틀 마켓 플레이스에서 Poultry 도매를 한다는 L 선생 처럼 많은 성공한 이민자들은 좋은 집과 좋은 차부터 구입한다. 그러나 비즈니스에 바쁜 이민자들이 미국인 처럼 집을 즐길 여유는 거의 없는 듯하다. 물론 혜택이 있기는 하다. 집값이 뛰어 재산증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도 구입할 때 보다 20만 불을 더 받고 팔았다. 나중에 콘도에서 손해보고, 멍청한 짓을 하느라 대부분 날렸지만.

 

미국에서 집을 보러 다닐 때 들은 이야기로는, 30년 모게지로 집을 사서 30년 동안 다 갚고 은퇴 후에는 그걸 팔아서 은퇴 후 여유자금으로 사용하는 것이 미국인들의 라이프 사이클이라는 거다. 또 그동안 집값도 상승했을 테니, 시골로 이사가서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충분한 은퇴생활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럴 듯한 이야기다. 그러나 집이 투기의 대상이 되면서 서브프라임 사태를 불러왔고,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초래했다. 단순한 의식주가 인간의 탐욕대상이 되면서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글이 길어져 오늘은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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