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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먹거리 이야기

(2013년 3월 17일에 쓴 글)

 

인간의 '3대 본능' 중에서도 식욕이 으뜸에 해당하니, 먹거리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미국에 비해서는 먹거리 물가가 너무 비싼 탓에 엥겔지수가 무척 높아지긴 했지만, 귀국해서 가장 즐거운 것 중의 하나가 먹거리다.

 

미국에서도 LA 같은 대도시 한인타운 근처에서 사는 분들은 해당이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입맛에 맞는 식당 찾기가 수월하지는 않다. 뉴지지 모리스 타운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점심 먹을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가장 가까운 '거구장'이라는 한식당이 있긴 했지만, 15 마일이나 떨어져 있었고 가격도 비쌀 뿐더러 서비스나 맛도 형편없었다. ('한국식당 이야기' 참조. 4/5/2011. 한국살기 참조)

 

직원들은 대부분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한국에서는 학교를 졸업한 이후, 도시락을 가지고 다닌 기억이 없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회사건물에 구내매점에서 샌드위치를 팔긴 했지만, 기아상태(?)가 아닌 한 먹고싶은 음식은 아니었다. 차라리 회사 다이닝룸에서 베이글을 구워 먹는 편이 나았다.

 

일의 성격상 오버타임을 할 때가 많았다. 직원들이 퇴근한 후에야, 컴퓨터(서버)들을 끄고 해야하는 일들 때문이다. 수고한 직원들에게 저녁이나 점심을 살 때, 직원들 의사를 물어보곤 했는데, 젊은 친구들이라 그런지 차이니즈 부페를 좋아했다. 미국의 젊은 아이들이 쓰시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일식집의 정통 쓰시가 아닌 중국부페식당에서 흉내만 낸 것이라서, 내게는 별로였지만 젊은이들은 퍽이나 좋아했다. 부페를 가더라도 입에 안 맞는 음식이 대부분이라, 종류는 무척 많지만 손대는 음식은 몇가지 뿐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상황이 정반대가 되었다. 아무 식당이나 들려도 입에 맞는 음식이 즐비했고, 이곳이 부페는 음식의 종류는 몇가지 되지 않았지만, 대부분 맛이 있어서 고를 필요가 없었다. 취향이 맞지 않는 탓에 그토록 싫어했던 피자나 파스타도 이곳에서는 한국식으로 조리를 해서 그런지 입에 맞았다.

 

반대인 것이 또 있다. 미국에서는 식자재는 싸지만, 매식을 할 때는 비싼 편이다. (단, LA는 아니다.) 게다가 팁까지 주어야 한다. 한국에서는 식자재는 싸지 않지만, 매식은 비교적 싸다. - 물론 싸고 맛있는 곳을 찾아다닐 때에만 적용되는 말이다. 인건비가 싼 탓일 거다. 귀국해서 한동안은 식당에서 계산할 때 뒤통수가 쭈빗거려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팁을 안주는 습관에 익숙해졌다.

 

그러고 보니, 30년 전에 처음 미국에 갈 때가 생각난다. 노쓰웨스트 항공을 탔던 것 같다. 일본에서 비행기를 바꿔타자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이 제공되었지만, 억지로 먹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LA에서 아틀란타 가는 비행기를 타자 기내 서비스 음식에서 역한 노릿내가 나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그게 드래싱과 치즈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꼼짝없이 굶었다. 지금이야 그 맛에도 익숙해져 고소한 맛을 알게 되었다.

 

1983년 3월 회사에서 보내준 연수교육으로 미국에 처음 가보았지만, 그 때 가장 놀란 것 중의 하나가 풍부한 먹거리였다. 그러니 60년대나 70년대에 가신 분들은 더한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물론 그 때는 풍부한 먹거리에도 불구하고 고국의 척박한 현실 때문에 그것 조차도 쉽게 넘볼 수 없는 어떤 것이었겠지만.

 

처음 플로리다에 도착하여 몰에 갔을 때, 또 다른 충격은 뚱뚱한 사람들이었다. 상상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뚱뚱한 사람들이 많았다. 허리가 얼마나 뚱뚱한지 키와 비슷해서 마치 마름모 꼴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적지않이 놀랐었다. 그때만 해도 건강에 대한 상식이 지금처럼 없던 때라, 고도비만이라는 단어에 익숙하지도 않았지만,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에 자란 탓에, 뚱뚱한 모습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다.

 

▼ 미국인들에게 가장 흔한 메뉴를 기준으로 칼로리를 산출했다. 30년 전에는 부러웠지만, 지금은 부럽기는커녕 좀 안되 보인다. 뚱뚱해질 수 밖에 없다.

 

입술의 양쪽 끝이 갈라져서 피가 나는 것이 '영양부족' 탓이란 것도 그 때는 몰랐었다.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크느라고 그런다고 대답했고 그 엉터리 말을 믿었다.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얼굴에는 허옇게 '버짐'이라는 것이 생겼던 때다. 늦가을이면 200 포기의 배추, 100 개의 무를 사다가 김장이라는 것을 했다. 콩을 삶고 겨우내내 메주를 띄어, 요즘같은 봄에는 장을 담갔다. 엄마가 건네주는 김장양념을 얹은 배추 속이 그렇게 맛이 있었고, 약간 곰팡이가 핀 메주로 청국장을 끓이는 저녁이면 부른 배가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아무리 먹어도 비만을 몰랐었다.

 

한국에 돌아오면 그렇게 살 줄 알았다. 시간이 많을 테니 옛날의 그리운 음식을 해먹고 살 줄 알았다. 명절이면 만두도 빚고, 전도 부치고, 가을이면 김장도 할 줄 알았다. 삶이 변했다는 것, 주위이 모든 환경이 변했다는 것을 착각했다. 열 포기만 해도 충분한데, 집에서 그 복잡한 김장을 하는 것은 말도 아니었다. 얼마나 먹는다고 집에서 만두를 빚는단 말인가? 마트에 가면 모든 것이 다 있는데. 집어오기만 하면 되는데.

 

그리운 그 음식들은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인데, 현실에 있는 줄 착각했다. 에고 한심한 놈, 철이 아직도 안 들었구나!

 

<후기>

여생을 고국에서 보내고자 한다면, 형편이 비슷한 분들 몇이서 함께 살 수 있으면 이상적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두 사람이 먹을 음식을 준비한다는 것은 낭비이자 비효율적이지만, 여나믄 사람들이 같이 한다면 다를 테니까. 함께 하는 즐거움이 적지 않지만 또한 불편함도 감수해야 할 테니, 공감대를 갖는 사람끼리 같이 해야겠지요.

 

얼마전에 캐나다에서 여행을 오신 'Alexy'님과 같이 걸을 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http:/www.rivervalley.co.kr 참조)

 

전남 곡성에 '강빛마을'이라는 은퇴마을이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전임 곡성군수와 전임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부부가 계획하고 조성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들었던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은퇴마을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펜션같은 수익사업과 텃밭 등 공동수익사업을 도입해서 주민들에게 소일거리와 함께 약간의 수익을 준비했고, 주민공동 식당 등 이상적인 모델을 추구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어떤 명망있는 분이 나서서 이민자들이 고국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비슷한 프로젝트를 추진해 보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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