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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무엇이 달라졌나?

(2013년 3월 10일에 쓴 글)

 

한 세대를 30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바뀐다고 하니, 세 번이나 바뀔 시간인 30년 동안 참 많은 것이 변했고, 한 세대 전 한국이라면 상상조차 힘들 정도로 사람들은 풍족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먹는 것, 입는 것은 물론이고, TV, 냉장고 등 가전제품에서 휴대폰, 컴퓨터를 비롯한 첨단제품까지, 또한 부의 상징이었던 자동차까지 부유층 일부만 그런 혜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보통 사람까지도 그 모든 것을 누리는 시대가 되었다.

 

불과 한 세대인 30년 전을 돌이켜보면 정말 꿈과 같은 세상이 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사람들은 그만큼 행복해졌을까? 하고 묻는다면, 대부분 '노(No)'라는 대답이 자신있게 돌아올 것 같다. 적어도 뉴스를 보면 그렇다. 왜 그럴까?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학교성적 때문에 우울하고, 대학을 나온 꽃다운 청춘들은 취업과 생활고로 인해 연애와 결혼, 그리고 출산을 포기한 채 3포세대라고 불리우는 한편, 중장년은 정리해고를 당하고 하우스 푸어가 되어 고통 속에 살고, 노년은 황혼이혼과 자살 등 불안하기 짝이없는 노후를 맞고 있다.

 

그러나 15년 만에 돌아온 역이민자의 눈에 비친 한국은 눈에 띄게 몰라볼 정도로 좋아졌다. 일인당 국민소득 2만불을 넘어 3만불을 바라보는 나라답게, 웬만한 가정에는 멀티카를 소유하고, 스킨케어, 네일아트 등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가게들이 화려하게 길거리를 장식하고, 어지간한 나들이 장소에는 주말마다 원색의 복장을 한 인파로 북적이며, 전국토는 곳곳에서 날마다 무슨 무슨 축제로 흥청인다.

 

이렇듯 일일이 나열하기가 힘들 정도로 세상은 좋아졌는데, 왜 사람들은 불행할까? 등 따숩고 배 부르게 먹을 수만 있으면 행복했던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진 세상에서 온갖 것을 누리고 살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까? 왜 불행을 상징하는 이혼률과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서 톱이라고 할까?

 

한국으로 돌아와 살면서 드는 생각들이다. 미국에서 살아보았지만, 그곳은 어차피 내가 태어나서 교육받은 나라도 아니고, 알고 싶기는 했지만 듣고 보는 뉴스를 이해할 정도로 언어가 유창한 것도 아니기에 관심이 없었으나, 한국에 돌아와서는 상황이 달라졌으니 알고 싶은 게 많았다. 도대체 달라진 게 무엇이고, 사람들은 왜 불행할까?

 

내가 이해한 첫번째 해답은 희망과 그 믿음에 대한 상실이다. 'Tomorrow would be better than today' 라는 믿음은 아무리 오늘의 삶이 어려워도 'Better Life'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삶을 지탱해주는 끈일 것이다. 그 끈이 없어진 것이다. 아니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 끈을 놓지 않으려는 손아귀의 힘이 약해졌고, 그 끈을 통해 오르려는 벽이 너무 높아졌다. 지나친 보살핌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 더 이상 보살핌을 기대하지 못하게 되자 삶의 치열함을 견디기 보다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는 쉬운 선택을 하게 되었고, IMF 탈출을 위한 온갖 규제철폐는 힘있는 기득권 세력들이 세상을 자기들만을 위한 게임으로 만들어 어느 누구도 쉽게 넘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다음은 소통이다. 더 좋은 성적을 위한 경쟁, 더 많은 수입을 위한 경쟁, 더 잘 살기 위한 경쟁은 소통이 없는 가정과 사회를 만들었다. 부모가 아이의 숙제를 봐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숙제는 학원에 맡기고 그 시간에 학원비를 벌어야 했다. 경쟁은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한다. 과정이 무시되는 사회는 괴리감을 만들고, 결과만 따지는 세상은 패배자의 변명에는 귀를 닫음으로써 대화와 소통을 단절시켰다.

 

 ▼ 한강에서 투신자살한 사람의 소지품.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이었던 복권이 눈에 띈다. 그가 기댈 곳은 희망이라고 할 수도 없는 로또였던 것 같다.

 

▼ 부모, 형과 함께 자살을 시도했으나 가족만 죽이고 자신은 살아남았다. 매스컴에서는 보험을 노린 위장사고라고 흥미위주로 보도했으나, 열등감으로 인한 자살시도로 가족과 함께 죽으려고 했다. (수사자료: http://www.spo.go.kr/incheon/notice/press/press.jsp?mode=view&article_no=550860&board_no=2 )

 

  ▼ 마지막까지 살고 싶었던 자살자의 흔적들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희망을 줄 수 없는 사회가 이들을 자살로 내몰았다.

 

 ▼ 물질만능주의는 사회적 약자를 거들떠 보지 않는 사회로 만들었다. 그들이 단지 경쟁에서 진 패배자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 사회가 무섭다.

 

 ▼ 규제가 없는 승자독식의 사회에서는 헤비급 선수만이 링에서 건재할 수 있다. 결국에는 대기업만 살아남고, 결국에는 힘있는 가진 자만이 독식할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속임수다. 그 속임수로 이익을 보는 집단들은 끊임없이 논리를 개발하고 주장한다. 분배보다는 성장이 우선이라고, 가난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고, 물질만이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며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러니까, 부자들의 세금을 줄여서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복지를 줄여서 성장에 더 투자해야 한다고. 돈을 벌려면 빚을 내서라도 집을 사야 한다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제도라고.

 

 ▼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는 영국에서도 속임수는 벌어지고 있다. 영국이 이라크 참전을 위하여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허위정보를 공개했다는 보도를 해서 BBC에서 해직당한 앤드류 길리언. 현재 그의 보도는 사실로 판명되었다. 그는 '정부가 거짓말을 하도록 두고 볼 수는 없었다'고 말한다.

  

▼ 부시 대통령의 유일한 동조자였던 토니 블레어 총리는, 70%가 넘는 반전여론과 언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참전하기 위해 의회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45분 내에 동원할 수 있다는 날조된 정보를 사실인양 보고하고 있다.

 

▼ 정부는 국민이 아닌 자기의 정책과 정권에게 유리한 정보만 공개함으로써 곧잘 진실을 왜곡한다. 그리고 대중의 입맛에 알맞게 잘 왜곡된 정보는 사실이 된다. 그러나 진실만이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것은 역사가 가르쳐 주는 진리다.

 

▼ 영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도 거짓을 일삼는데, 한국은 말할 필요도 없다. MB가 2008년 KBS 정연주 사장을 해임한 것도, 그토록 말이 많은 MBC 김재철 사장을 아직까지 그냥 두는 것도, 진실을 왜곡시키기 위해서다.

  


그리스를 비롯한 남유럽 사태가 터지자, 한국의 언론과 정부는 과도한 복지가 문제라는 듯이 온통 떠들어 댔다. 과연 그럴까? 그들은 왜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와 독일에 대해서는 침묵했을까?

  

▼ 복지예산에 대해 창피한 줄 모르는 한국은 그리스 사태를 과도한 복지 탓으로 돌리기 바빴다. 지금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그리스는 과도한 복지가 문제가 아니라, 가진 자들의 도덕적 해이와 관료들의 부패가 문제란 것을. 멕시코와 같이 OECD 국가 중 최하위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은 스웨덴의 복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 한국사회가 불행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 1%의 기득권을 위한 사회는 많은 패배자를 낳고 있다. 이들만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것으로 면죄부를 받을까? 다른 사람들은 아무 잘못이 없을까?

 

 ▼ 하루에 43.6명이 안타까운 목숨을 스스로 버리고 있는 현실은 무엇을 웅변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지난 주에는 전교에서 5등 했던 중학생이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자살을 선택했다. 끝없이 공부해야 하는 입시제도에 절망한다는 유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 지난 10년간 부모와 자식 세대간의 갈등은 더 커지고 있다. 대화하지 않고 소통이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증거다.

 

 

<후기>

주제넘게 이것 저것 생각해 봅니다. 이민생활 끝에 다시 돌아온 고국은 많은 것이 옛날과 달랐습니다. 친구들도, 사람들 사는 모습도, 지난 날 알던 모습이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아마 내가 바뀌었기에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무엇이 달라졌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고, 무언가 부족해 보였습니다.

가정주부의 정성이 담긴 음식이 없었고, 목욕탕에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모습을 볼 수 없었고, 여름에는 계곡에서 등물을 해주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녁에 서로 자신이 원하는 채널을 보겠다고 다투는 모습도 없었습니다.

대신, 인스탄트 식품이 있었고, 각자 등밀이 때 타월을 사용하는 모습이 있었고, 욕실에서 찬물로 샤워하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말없이 저녁을 먹고는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 따로따로 TV를 보는 가족들이 있었지요.

 

부모는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식은 아버지의 등이 얼마나 늙어 굽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풍요로운 시절에 태어나, 고생을 모르고 복에 겨워한다고 생각하고, 자식은 부모를 첨단시대에 뒤떨어진 채, 고집불통의 존재로만 여깁니다. 가족과 어울리는 대신 컴퓨터 화면과 더 친숙했고, 부모 형제와 대화하는 대신 스마트 폰으로 하는 손가락 대화에 더 친숙합니다. 미국에 살 때는 미국이니까 그런가 보다 했는데 한국은 미국보다 훨씬 심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습니다. 무언가 바꾸지 않고, 이대로의 한국사회는 많은 사람들을 점점 더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