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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아버지와 같은 삶은 살지 않겠다.

(2013년 3월 6일에 쓴 글)

 

- 전쟁 때 월남한 피난민으로 찢어지게 가난한 우리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나는 절대로 우리 아버지와 같은 아버지는 안 되겠다고 결심했었단다. 크게 넉넉하지는 않아도 내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는데 부족함이 없는 아버지로 살줄 알았어. 그런데 세상 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안 되지 않냐? IMF 때 하루 아침에 번개 맞은 듯 실직하고 나니까, 참 내가 가진 능력이라는 게 서럽게 보잘 것 없더구나! 그런데 너희들은 보통 똑똑했냐? 어떻게 너같이 영리한 아이가 내 아이로 태어났는지...... 


- 변명을 하자면, 그래서 마음이 더 급하고 초조했다. 쓸만한 자리는 나서지 않지, 그냥 이대로 날품팔이로 살 수는 없지..... 친구에게 사기 당했을 때, 그 때 그냥 포기했어야 하는 건데, 너희들이 눈에 밟혀서 그때는 도저히 포기 못하겠더라. 그러다가 점점 내 정신줄을 놓게 됐어. 허허, 이것도 변명이겠지만 나중에는 정말 눈에 뵈는 게 없더라.

 

'내딸 서영이'의 마지막 회에서 극중 이삼재로 변한 천호진이 병실에서 정신이 돌아온 후 딸 서영이와 하는 대화의 장면이다. 그리고 그는 덧붙인다.


- 너희들 낳고 보니 우리 아버지 어머니 불쌍한 양반들이었어.

 

▼ 지난 주말 방송된 '내딸 서영이'의 한 장면. 극중 58년 생인 이삼재의 대사가 끝나자 딸 서영이가 다가와 아빠를 위로하고 있다. 한 해에 80만 명 가까이 태어난 58년 개띠들은 베이비 부머 세대의 상징적인 존재다.


십년 전만 하더라도, TV 드라마를 보는 내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TV 앞에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야말로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던 시절의 오만이었다. 작년 정치 드라마 '추적자'에 이어, '내딸 서영이'를 짠한 감동으로 보았다. 추적자를 보면서 위선자 정치인으로 대통령까지 오른 인물 MB를 발가벗기는 듯한 대리만족을 느꼈다면, 서영이를 통해서는 내가 살아온 인생에 변명을 늘어 놓는 듯한 애잔함과 시원함을 동시에 느꼈다.

 

'나는 내 아버지 같은 인생은 살지 않겠다' 라는 극중 이삼재의 말은, 철이 든 이후 내 인생을 관통한 문구이기도 했다.

 

- 네 아버지 같은 변변찮은 사람이 또 어디 있을라구!  집에서 술이나 마시고 큰 소리 칠 줄 알지, 남한테는 싫은 소리 한 번 못하는 답답한 사람이야!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나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다고 착한 사람이라고 하지! 사실은 바보나 다름없다는 소리야.

 

어렸을 때, 모친으로부터 수없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 원인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무능한 분이었고, 그런 아버지 처럼 살지 않겠다는 각오가 내 인생 전반을 지배했다.

 

아버지는 별로 말이 없던 분이었다. 1960년대 말 고혈압으로 쓰러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긴 이후에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던 탓인지, 이남에서는 장남이었던 나와도 별 대화가 없이 지냈기에 그 분의 인생이 어땠는지 잘 모른다. 아는 것은 아는 대로, 모르는 부분은 단편적으로 주워 들었던 이야기를 짜맞추어 본다.

 

평남 중화군 율면 추빈리 17번지.

 

평양역에서 기차로 3~40분 걸리는 교외지역에서 20 마지기 정도의 논농사와 밭떼기 약간을 가지고 근근이 살았던 농사꾼의 3대 독자로 위로 누나가 둘, 밑으로 여동생 하나가 있었다. 국민학교 2학년에 다닐 때, 장질부사가 유행하여 외아들의 안위를 염려한 부모가 더 이상 학교에 다니지 못하도록 했고, 대신 집에서 목수 일을 배워 일찍 결혼을 했다. 전쟁 때 북한군이 밀리기 시작하면서 북한군 보위부 장교였던 누님의 남편, 즉 매형이 인민군으로 징집하려 해서, 마을 공동묘지에 땅굴을 파고 지내다가 국군의 평양수복 후 나올 수 있었다.

 

굴 속이 얼마나 비좁고 공기가 안 통했는지, 담배불이 저절로 꺼질 정도였고, 끼니는 한밤중에 부인이 갖다주는 미숫가루를 물에 타 마시며 한 달 이상을 숨어 지냈다. 중공군에 밀려 유엔군 후퇴 시, 국군을 따라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면서 부모님께 '오마니, 몇 달만 기다리시라요. 국방군이 다시 올라오면 날래 따라 올테니끼니' 하고 인사한 것이 마지막이었고, 같이 피난길을 올랐던 부인은 달포 전에 해산한 둘째 아들을 들쳐업고  4십리 정도 걸어오다가, 산고로 다리가 퉁퉁 붓는 바람에 다섯 살이었던 큰 아들과 함께 돌려보낸 게 처자식을 마지막 본 것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혈혈단신으로 객지에서 전쟁통의 피난살이가 얼마나 힘들었으며, 다시 국군이 평양을 재탈환할 때까지 한두 달 만 있다가 다시 재회하게 될 줄 알았던 처자식과 부모님을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고통이 어떠했는지는 당사자가 아니라면 가늠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해방 전부터 서울에서 살았던 막내 이모님을 만난 것이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이종사촌 동생의 주선으로 경찰이었던 남편이 전쟁통에 살해되어 과부가 된 모친과 살림을 차렸고, 나와 동생들이 태어났다.

 

말이 통 없으시고, 무능하게만 보이던 그 분의 인생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 아빠, 아빠가 어떻게 옛날에 살았든 우리는 관심 없어요.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에요! 뭐하러 자꾸 옛날 이야기를 하세요. 우리가 아빠 처럼 살 수도 없고, 아빠도 우리와는 다르잖아요.

 

나를 닮은 탓인지, 직설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똘똘한 딸래미가 내게 했던 말이다. 아이들은 내가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공부했는지 이야기하려고 하면 질색을 했다.

 

-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민을 왔어요. 한국에서는 몰랐는데, 미국에 오니까 아버지가 그렇게 한심하게 보이는 거야. 미국에 온지 몇 년이 됐는데도, 영어도 변변하게 못하지, 하는 일마다 그렇게 무능하고 한심하게 보일 수가 없었어요.

 

뉴저지에서 사귄 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53년생인 그 분은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옮겨 오는 바람에 당시 구역장이었던 나와 가까워졌다. 40이 훨씬 넘어 결혼하는 바람에 아이들은 나보다 많이 어렸지만,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온 분으로, 미국에서 학력이 없는 나는 가끔 아이들 일을 물어보기도 했다. 그때 그 분에게 들었던 이야기로, 아이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부친이 떠오르곤 했다. 무능하고 형편없는 사람은 부친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 분이었다면, 피난살이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좌절하고 말았을 거다. 실제로 그랬다. 이민생활에서 부닥뜨린 어려움을 제대로 극복해내지 못하고 많이 괴로워 했고, 레이오프 되었을 때도 차분하게 대응하지도 못한 채 당황과 실패를 거듭하고 말았다.

 

마치 색바랜 한 장의 흑백사진 처럼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의 일부가 된 이야기지만, 목수 연장가방을 어깨에 매고 일 나가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때 들었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전에 남아있다. 다소 추운 날의 이른 아침이었던 것 같다. 마당에서 세수 대야에 김이 나는 더운 물을 붓고 까까머리에 비눗칠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가 마당을 지나며 아들에게 한마디했다.

 

- 아 새끼래, 민하게 구는구만. 빨래비누로 박박 문대야 때가 지지, 세수비누로 깰쩍거려 개지구 때가 지갔네!

 

그래, 너희들이 어찌 알겠니? 샴푸로 머리 감고, 린스로 헹구는 너희들이. 내가 정말 멍청한 짓거리를 했구나. 내가 내 아버지를 그리워 하며, 무능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를 떠올리듯이, 너희도 언젠가는 내가 그렇게 못나고 무능한 아빠 만은 아니었다고 회상하게 될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그 때는 내가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겠지.

 

내가 그랬던 것 처럼, 너희들도 '아빠 같은 삶은 살지 않겠다'고 마음 먹어라. 그리고 절대 나같은 인생은 살지 말아라. 우리 인간은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며 사는 존재라는 걸 너희도 알고 있잖니?

 

몇 달간 '내딸 서영이'를 보느라고 잘 보냈는데, 이제는 뭘 보며 지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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