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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어느 운전수에 비친 한국

(2013년 3월 8일에 쓴 글)

 

해남 땅끝마을에 조성한다는 미국타운을 답사하고 돌아와서 작년 4월 16일부터 시작한 학원차 운전기사 노릇을 이 달에 들어서 그만 두었다. 일이 힘들다는 것보다는 구속 당하는 자유가 싫다는 게 핑계지만, 구속 당한 댓가가 너무나 적다는 것이 더 정확한 구실일 것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글을 쓰거나, 평소에 생각한 대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조금이라도 공부하는 것이 더 생산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어차피 딸 아이 결혼식 때문에 8월에는 미국에 가야하기에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1년은 스스로에게 휴식년을 주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그리고 나서는 무슨 일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다. 더 일할 수 있는데, 놀고 먹는다는 것은 평소의 신조에도 어긋나기도 해서, 작년 1월이 되자마자 교차로의 구인광고를 보고 주유소 일을 한 달 해보았고, 또 어린이집 운전기사를 하는 이곳 친구가 폐수술을 하는 바람에 대타로 한 달을 일했었다. (제글 알바의 경험 1,2 참조, 한국살기 2/22/2012, 2/25/2012)

 

막노동이나 다름없는 일을 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곤 했는데, 먼저 내 지난 인생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느꼈다. 노동이라는 게 대부분 단순 반복적인 일이라 쉽게 실증이 나고 지겨워졌다. 말 그대로 너무도 보~링했다. 학교 졸업 후 30년 동안 했던 일과는 너무 틀렸다.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짜내고, 매뉴얼을 읽고 결과물을 내야 하는 일도 지겨웠지만 노동에 비하면 훨씬 쉽고 보수도 많은 직업이다. 그런 일을 할 때는 너무 안이하게 노동을 생각했었다.

 

 -까짓거, 짤리고 나면 노동이라도 해서 먹고 살면 되지, 뭐. 아이들 다 키워놓았겠다 뭐가 걱정이야. 무슨 일을 하든지 두 식구 입에 풀칠은 못하겠어!

 

하하하, 우리는 해보지도 않고 너무 쉽게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한 두 시간 혹은 하루 이틀 해보고 다 안다는 듯이 얼마나 큰소리 치고 살았던가! 정말 바보같은 짓이었다. 삶의 질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간과한 거다.

 

그래서 그걸 미리 아는 똑똑한 친구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 아부도 하고, 뇌물도 갖다 바치며 종노릇도 마다하지 않는가 보다. 지난 날 그런 친구들을 보면, '저러고 살고 싶을까?' 하고 속으로 경멸했었는데, 실제로 조롱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닐까? 참 인정하기 싫은 슬픈 현실이지만.

 

현 제주인구는 대한민국 전체의 1% 가량인 56만 명이다. 1%의 사람들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인생은 어차피 '장님 코끼리 만지기' 아닐까? 장님이 코끼리의 어느 부분을 만졌느냐에 따라 그들이 느끼는 코끼리 모습은 다 다르더라도, 그 다른 모습들이 모여 코끼리는 결국 완성되는 것이다. 즉, 다 틀리기도 하지만, 또한 다 맞기도 하다는 뜻이다. 위대한 철학자나 득도한 종교인들이 인생에 대한 많은 깨우침을 주었지만,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지는 모래알 같은 인생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다. 파도가 한 번 지나갈 때 마다 달라지는 해변의 모래자국 처럼.

 

1년 가까이 학원차를 운전하면서 희망과 동시에 절망도 보았다. (희망, 절망? 어느 것부터 듣기를 원하십니까? ㅎㅎㅎ)

 

희망은 교육의 효과, 즉 지식의 힘이다.

유치원 아이들부터 학원에 다닌다. 적게는 하나부터, 많이 다니는 아이는 세 군데를 다닌다. 학교가 끝나자 마자 학원으로 직행해서 많이 다니는 아이는 저녁 7시나 8시에 끝난다. 보습(보충수업)학원부터, 음악, 미술, 서예, 발레, 태권도, 검도, 영어, 수학, 시력교정, 피아노, 바이올린, 수영, 바둑, 웅변, 속독 등등 학원의 종류가 그렇게까지 많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어려서 부터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으니, 조금이라도 소질이나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튈 수 밖에 없고, 그 재주를 일찌감치 키울 수 있다는 장점이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떤 꼬마가, 태풍, 허리케인, 싸이클론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나는 대학에 다닐 때도 몰랐을 것 같았다. 영어학원에도 다니는 그 아이는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배웠음직한 짧은 문장을 구사했고, 동물들의 영어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이런 조기교육의 성과가 나타나서, 한국의 K-POP이 세계로 나가고, 각종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하는 자랑스런 한국인들이 많은 것이 아닐까! 어쨌든 교육은 좋은 것이고, 지식은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세상이치가 장점만 있을 수는 없다. 양지에는 음지가 반드시 존재하는 게 만고의 진리다.

아이들이 버릇이 참 없다고 느꼈다. 학원을 많이 다니는 아이일수록, 형제가 없는 아이일수록, 조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일수록 더 버릇이 없었다. 인사를 할 줄 아는 아이는 열에 한 둘 정도고, 소리 지르고 악을 쓰는 등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아이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몇 십 미터도 걸어가려 하지 않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기는 해도, 아파트 건물에 내려준 것도 구설수가 되었다. 104동 건물에 내려주지 말고 104동 5호로 들어가는 세 번 째 입구(그 동에는 총 6개의 입구가 있다)에서 내려주라는 것이다. 고학년 아이들은 100 미터, 200 미터를 걷기 싫어서 아무 때나 걸어갈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고, 차를 기다리는 구속을 선택했다.

 

청소년 아이들이 자살하는 원인을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이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아갈까 걱정이 앞섰다.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쉽게 좌절하고 생을 포기하는 이유를 보는 듯 했다. 집안에 자살한 아이가 생각났다. 그 부모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같이 갔을 때다. 어떤 테마파크 입구에서 핸드백을 들고 있던 그 아이와 줄을 서서 있었는데, 입구에서 핸드백과 같은 소지품을 갖고 입장할 수 없다며 보관을 요구했다. 잠시 동안 아이가 나타나지 않자, 아이 엄마가 쫓아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어 한마디도 못하는 엄마가 좋은 대학을 졸업한 아이를 돌보기 위해 잠깐동안 나타나지 않자 쫓아간 것이었다. 그 아이는 한국으로 돌아와 몇 달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좋은 집안에서 자란 남자친구에 대한 열등감, 취업곤란 등을 겪었다고 하지만, 그토록 세심하게 돌봄을 받고 자란 아이가 사회에서 부딛히는 좌절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는가! 요즘의 젊은 아이들이 왜 그렇게 쉽게 죽음을 선택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는 빵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야지, 빵을 먹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빵을 먹여주는 정도가 아니라, 빵을 제발 먹어달라고 아이들에게 사정하는 식이다. 조국의 앞날이 걱정된다고 하면 지나친 기우일지 모르겠으나, 학원차를 1년 가까이 운전하면서 본 것들이다. 빵이나 사탕 포장지를 아무데나 휙휙 버리는 아이들, 버리지 말라고 호통을 치면 눈에 띠지 않는 빈틈에 쑤셔넣는 아이들, 누가 그랬냐고 꾸짖으면 아무도 안 했다고 우기는 아이들, 학원에 가느라 친구들과 뛰어놀지 못하고 스트레스만 받는 아이들, 아무런 정신적 훈련이나 준비없이 무방비 상태로 사회라는 무한경쟁 속으로 들어 갈 아이들에게서 절망을 보았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놓고 안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 달, 한 과목 학원비 12만 원씩을 벌어 대느라고 바쁜 부모들은, 학원에만 보내면 부모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할 지는 모르겠다. 아니, 그 외 다른 방법은 있지도 않을 것이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런 시스템에서 학원을 돈벌이로 삼는 사람들은 아이들을 제 시간에 학원에 데려다 놓는 것만이 중요하다. 데려다 놓은 다음에는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다. 부모들은 제 시간에 학원에 가는 것만 문제 삼으니까.

 

오늘 지금 이시간에도,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집으로 아이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수많은 학원차들이 제주의 거리를 메우고 있다. 아이들의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불행을 담보로 어른들의 현재의 만족을 위해.

 

그렇게 보였다. 1년 동안 학원차를 운전했던 어떤 운전수의 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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