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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바둑과 골프, 그리고 인생

(2013년 3월 5일에 쓴 글)

 

바둑을 두기 시작한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다. 친척 집에서 어깨 너머로 배웠지만 본격적으로 배운 것은 대학에서였다. 조치훈이라는 동갑내기 천재가 아직 약관인 10대에 일본에서 '사까다'라는 유명한 기사와 대국하여 승리한 것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이 동기가 되었다. 그냥 시간 때우기 심심풀이 게임으로 세계적인 인사가 되었다는 게, 세상물정 모르던 내게는 신기하기만 했다.


새벽에 일어나 정한수 떠놓고 공부를 했었다. 조치훈의 기보는 거의 외우다시피 했고, 바둑실력도 일취월장했다. 신입생 시절 기우회에 가입하여 공식적으로 9급에서 출발했으나 3급이 될 때까지 짝수 급수를 거치지 않았다. 9급에서 7급, 7급에서 5급, 5급에서 바로 3급을 두었다. 그렇게 빠르게 늘던 바둑 실력이 3급에서 2급이 될 때는 몇 달이 걸렸고, 2급에서 1급이 될 때는 더 오래 걸렸다. 20대 초반 머리가 팽팽 잘 돌아갈 때는 거의 지는 일이 없었다. 기원에 가서 주인하고 내기 바둑을 두어도 잃지 않았다.


바둑에 심취하면서 바둑을 인생에 곧잘 비유하곤 했다. 포석이 잘 되어야만 바둑이 쉬워진다. 좋은 집안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라서 좋은 짝을 만나야 인생이 쉽다. 포석이 잘못되면 그 바둑은 이기기 어렵다. 고수가 될 수록 포석이 잘못된 판을 뒤집기란 더 어려워지지만, 그런 판을 뒤집을 수 있어야 또 고수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고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한 이가 성공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여 훌륭한 인생을 사는 많은 성공한 고수들을 본다.


잘못된 포석을 뒤집기 위해서는 정교한 수읽기를 통한 싸움에서 이겨야 하고,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는 사석작전도 필요하며, 부분적인 싸움보다는 대세를 볼 줄 아는 판단력도 요구된다.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그런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때로는 중앙쪽 대마를 잡기위해서 하변을 공격하는 척하는 속임수를 부릴 때도 있다. 이렇듯 치열한 중반전을 거쳐 바둑이 끝나듯, 인생의 중반전에서도 가정에서 일터에서 만나고 부딛히는 무수한 일들을 최선으로 대응해야 하지만, 인생의 초보자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대부분이다. 치열한 수읽기가 부족한 탓이기도 하지만, 보통 젊을 때는 오만과 교만으로 자신을 제대로 성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깨닫는 것은 판의 막바지 끝내기 무렵이다. 포석과 중반전이 끝나고 종반전에 접어들면, 기울어진 판세를 알게 된다. 고수일수록 빨리 깨닫고 판을 뒤집어 보려고 시도하지만, 하수들은 돌이킬 수 없을 때가 되서야 자신이 진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잘난 탓으로 편한 인생을 살았다고 믿고 있다가, 인생의 종반전이 되고나서 자신의 잘못과 실패를 인정하게 되는 경우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되돌릴 수가 없다. 끝내기에서 판을 뒤집기는 더욱 어렵다. 한두 집 차이라면 몰라도, 큰 차이라면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고수들은 돌을 던지고 패배를 빨리 받아들인다.


그것이 바둑이고 인생이다. 참으로 유사한 점이 많다.


골프도 그렇다. 미국에서 골프광들을 참 많이 보았다. 남자들은 모이면 골프 이야기로 시끄럽다. 제각기 너무나 다른 삶들을 살아온 이민사회에서 골프만한 공통 화제도 드물다. 사람들은 흔히 골프를 인생과 가장 닮은 스포츠라고 말하고, 동의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티샷을 잘하지 않고는 파를 하기 어렵다. 티샷을 잘못하고도 무리하게 파를 노린다면, 보기는커녕 더블보기가 십상이다. 욕심으로 게임을 망치고 마는 것이다.


드라이브 샷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페어웨이에서 아이언으로 어프로치도 잘 해야 하고, 그린에 올라가서도 투 펏으로 끝내야만 파를 할 수 있다. 간혹 운이 따라 준다면 버디도 낚는다. 물론 재수도 실력이 있어야 자주 따라준다. 티샷을 잘 날려 놓고도, 어프로치를 잘못하거나 라이를 잘못 보아서, 혹은 해저드에 빠져서 게임을 망치기도 하는 것은 인생과 비슷하다.


골프를 하게 되면서 골프를 바둑에 비유하곤 했다. 티샷은 포석에, 아이언 샷은 중반전에, 퍼팅은 끝내기와 비슷한 것이다. 누구에게 말은 하지 못했지만, 코스를 걸으면서 옛날에 좋아했던 바둑을 떠올리며 혼자 그렇게 생각했다. 둘 다 욕심은 금물이다. 게임을 그르치는 지름길이다. 또 초보자들은 노력에 따라 실력이 빠르게 늘지만, 어느 정도에 이르면 쉽게 늘지 않는다는 것도 같다. 세자리 초보 골퍼가 두 자리 타수로 진입하는 것은, 보기 플레이어가 싱글에 들어서는 것보다 훨씬 쉽다. 


싱글 플레이어가 핸디 하나 줄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부단히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라운딩만 해서도 안 되고, 라운딩을 할 수 없는 날에는 레인지도 찾아가 땀을 흘리며 스윙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잘못된 폼을 고치기 위해 개인코치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싱글 실력을 유지할 수 있고 핸디를 하나라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노력할 정도로, 그렇게 시간과 돈을 투자할 정도로 골프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보기플레이어로 만족했다. 잔디를 밟으며 걷는 것이 좋았을 뿐으로, 내기를 하는 것은 쿼터 내기 조차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민생활에서 돌아와, 한국사회를 보면서 비슷한 느낌을 갖는다. 골프코스를 카트를 끌고 돌면서 수십 년 전 즐겼던 바둑을 회상했던 그 느낌 그대로, 한국사회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갈등을, 또 인간의 끝 모르는 욕심도 조금은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이 잘 사는 것도 골프와 바둑의 고수가 되는 것도 비슷한 것 같다. 소득 3만 불에서 4만 불이 되는 것은 만불에서 2만 불이 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더 오랜 시간 일해야 하고, 부부가 함께 일해야 한다는 것, 즉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과 함께 행복을 즐기기보다는 소득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따뜻한 저녁을 준비할 시간을 대신 돈 버는데 써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원에서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고, 부모들은 아이들 학원비를 벌기 위해 늦게까지 일한다.


10년, 20년 전에 비해 훨씬 잘 살고 있지만, 양보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들 역시 많다. 싱글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핸디를 하나라도 더 줄이기 위해서 오늘도 레인지에서 땀을 흘려야 하는 것처럼. 왜 졌는지 분석하기 위해 진 바둑을 복기하며 밤을 새웠던 내 지난 젊은 날처럼.


<후기>

일찌기 젊었을 때, 가족과 함께 이민을 떠나 쉽게 영주권을 받고 공부를 한 분들은 포석이 좋았던 분들입니다. 유학을 해서 좋은 직장을 가지고 출발했던 분들 역시 멋진 드라이브를 날리신 분들이겠지요. 포석을 잘못해서 이기기 힘든 판을 짠 분들도 있고, 티샷이 숲속으로 들어가 어떻게든 보기로 막아보려는 게임도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끝내기에 접어들었고 이제는 티를 벗어났고 페어웨이를 지나 그린 위에 섰습니다. 홀 쪽을 향해 볼을 들고 라이를 읽으며 홀을 벗어나려고 하는 겁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합니다. 바둑에서는, 골프에서는 이기고 지는 게임이 있겠지만, 인생에는 승패가 없습니다. 바둑도 골프도 승패를 떠난다면, 그냥 즐기기 위한 게임일뿐입니다.


남은 인생 많이 즐기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냥 열심히 플레이 했으나 지고 말았다고, 그러나 게임은 충분히 즐겼다고 한마디 할 수 있으면 그뿐입니다. 포석이 나빴을 수도, 중반전에서 수읽기에 착오가 있었을 수도, 끝내기에서 잘못 본 것이 패착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