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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라면에 얽힌 추억

(2013년 2월 12일에 쓴 글)

 

라면과의 첫 만남은 60년대 중반 무렵이었던 것 같다. 영등포 신길동 언덕빼기 판잣집에 살았던 당시에 근처 고아원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했었는데, 그때 어울린 '택근'이라는 아이와 동네 시장 주변을 돌며 가게에서 훔치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훔친 라면을 언덕 꼭데기에서 생으로 뿌셔 먹었었다. 당시 10원짜리 라면은 고급음식이었다. 엄마는 라면 하나에 국수를 섞어서 몇 인분의 식사를 만드는 마술을 부렸고, 국수를 섞지 않은 라면만 먹어보는 것이 어린 마음에는 소원으로 자리 잡기도 했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매점이나 교문밖 라면집에서 친구들과 라면을 사 먹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었다. 겨울철 연탄난로 주변에 모여 노란 양은냄비에 담긴 뜨거운 라면을 후후 불며 먹을 때는 안경에 수증기가 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 계란 하나와 김 가루가 뿌려진 뜨거운 라면은 당시 또래들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만찬이었다.


대학시절에도 라면은 친구들과 함께 좋은 동반자였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녀석을 위해 라면집에서 라면을 시켜 찬밥을 말아먹으면 꿀맛이었다. 라면과 찬밥은 말 그대로 천생연분(?) 아닌가! 때로는 라면국물이나 노가리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곁들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시작한 술자리가 발동이 걸리면, 오후 수업은 땡땡이나 대리출석으로 때우기도 했다.

 

군대시절 라면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훈련소에서 일요일 점심에 특식으로 나오는 라면은 증기로 라면을 쪄서 뜨거운 물을 부어주는 식의 최악의 요리법이었지만, 춥고 굶주리던 훈련병에게는 그것도 부족하기만 했다. 기간병이 되어서도 라면은 최고의 간식이자 야식이었다. 부대 밖의 구멍가게에서 사온 사제(?)라면이 군에서 보급하는 라면보다 더 맛있었다. 군용반합에 라면을 넣고 마른 나뭇가지로 끓인 라면을 라면봉지를 뒤집어 손에 끼운 채 그릇 대용으로 사용했다. 어디서나 배고픔은 어떤 음식도 최고의 음식으로 만드는 최고의 조미료인 셈이니 맛있지 않을 수 없다.

 

30년 전 미국에서 맛본 일본 라면은 한국에서 먹던 라면과 달리 담백했고 쫄깃한 면발로 맛있었다. 서니베일에 위치한 연수회사까지 아침 7시에 시작하는 수업시간에 맞추려면, 샌프란시스코에서 새벽 5시에 일어나 세수만 하고 '이찌방' 컵라면에 뜨거운 물만 부어 친구 형님집을 나섰다. 차로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둘이 운전과 라면먹기를 교대로 하면서 아침 대용으로 라면을 먹었다. 당시에 한국에는 컵라면이 없던 때라, 물만 부어 먹는 컵라면이 신기하기만 했다.

 

컴퓨터실에서 3교대로 근무할 때는 3일에 한번 저녁에 출근해서 아침에 퇴근했었는데, 이때도 라면은 아침식사 대용으로 먹었으니 라면과는 오랜 세월을 같이 한 셈이다. 과음한 다음날 숙취도 라면으로 풀었다. 김치를 미리 넣고 얼큰하게 끊인 속풀이 라면을 훌훌 마시면서 땀을 흘리고 나면 웬만한 주독은 풀렸다.

 

성질 급한 한국인들에게 5분만에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라면은 천생연분일지도 모르겠으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인스턴트 식품의 대표격인 라면에 대한 관심은 점점 멀어져갔다. 그러나 아직도 라면은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최고의 식품일뿐 아니라, 세계속에 한류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각광을 받는다고 한다.

 

▼ 한국인들이 쌀 다음으로 많이 먹는 음식이 라면이라고 한다.

 

 미국에서는 라면을 박스로 사다 놓고는 아이들이 언제든지 시장기를 달랠 수 있도록 했었다.

 

 인구순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인스턴트 식품인 라면이 건강에 좋은 음식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지금의 내 경우라면 일년에 10개나 먹을지 모르겠다. 

 

▼ 현재의 기름에 튀긴 면을 최초로 개발한 안도씨.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가난한 일본 국민들의 먹거리를 연구하다가 개발했다고 전해진다. 면을 뜨거운 기름에 튀기게 되면 수분이 급격히 증발하면서 면에 구멍들이 만들어지는데 이 구멍들이 라면을 끓일 때 수분과 스프의 양념 맛을 머금게 되고, 또한 오래 보관해도 괜찮아진다고 하니 최고의 발명품인 것은 분명하다.

 

▼ 종주국 일본을 물리치고, 세계가 한국의 라면을 즐기고 있으니 라면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도 될 듯 보인다.

 

 일본 라면의 밋밋한 맛 보다는 한국 라면의 맵고 강렬한 맛이 세계인의 입맛을 당긴다.

 

▼ 만리장성 위에서 컵라면을 즐기는 중국인들.

 

 중국 젊은이들의 한국라면 사랑

 

▼ 필리핀의 보카라우 해변에서 한국라면을 즐기는 외국 관광객들


<후기>

재미 삼아 읽으시라고 라면에 얽힌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세계를 점령한 한국제품 중에 라면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비록 인스탄트 식품이지만, 기름에 튀겨 건조한 음식으로 다른 인스탄트 처럼 건강을 해치는 음식은 아닙니다. 그러나 짠 맛의 소금섭취는 어쩔 수 없을 테니 편리할 지언정 좋은 음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날 가난한 시절에는 쉽게 먹을 수 없었던 고급음식(?)이 이제는 가난한 사람들이 한끼를 때우는 대용식이 되었고, 현재는 수십가지의 라면과 수백가지의 조리법이 개발되어, 세계가 즐기는 싸고 간편한 음식이 되었으니,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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