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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남의 떡이 커 보인다.

(2013년 2월 26일에 작성한 글)

 

'그대여, 불행해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남과 비교하라!'


철학자의 통찰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보면 남과 비교하며 사는 것 또한 당연지사다.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악마의 마음은 남과 비교하기를 즐겨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기쁨과 우월감을 느끼고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이를 보면 부러움과 함께 그가 지닌 것을 가지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인다. 인간의 내면에 깃든 더러운 욕심이 남과 비교하면서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함으로써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만다.


이민생활을 하면서 만난 분들의 대부분은 외국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광부나 간호원으로 독일에 갔던 분들, 유학이나 연수를 경험한 사람들, 중동의 건설현장이나 월남전을 누볐던 선배들을 많이 보았다. 아마도 그들은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에는 없었던 것을 보지 않았을까? 그것이 당시에는 척박한 조국에는 누릴 수 없었던 풍요이었는지, 군사독재시절 한국의 공포사회에는 없었던 자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짐작만큼은 충분하다.


나도 그랬다. 30년 전 회사에서 보내준 미국연수 때, 처음 보았던 미국의 풍요로움을 잊을 수 없었다. 가난한 나라에서 온 연수생에게 3월의 플로리다 눈부신 해변은 그야말로 충격이었고, 당시 보았던 모든 광경은 마치 디지탈 카메라가 잡은 영상처럼 아직까지도 뇌리에 뚜렷하게 남아 이민을 꿈꿔왔고 실현했던 근원이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분명 그랬을 거다.


- 벼농사는 남의 논이 더 잘 돼 보이지만, 자식농사는 내 자식이 더 잘나 보이는 법이다.


어렸을 때, 모친으로부터 듣던 말이 기억에 새롭다. 왜 내 논의 벼도 내가 노력한 만큼은 됐고, 남의 자식도 훌륭하다고 인정하지 못할까? 문제는 아전인수격 욕심이 객관적 판단을 흐리는 것이다.


비교적 일찍 초급간부로 승진하여 지방근무를 마치고, 본사에서 근무한 것이 80년대 중후반이었다.

본사에는 말단 직원들은 별로 없고, 과장급이 실무를 담당한 탓에 윗분들이 층층으로 많아 고달픈 생활이 이어졌다. 고참 과장들 틈에서 승진 2~3년차 과장들에게 승진은 정말 까마득하게만 느껴졌고, 퇴근시간도 없이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별 희망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부장에게 터지지 않고, 어떡하면 오늘 하루 일찍 퇴근할지 눈치보며 기계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세월이었다.


- X팔! 차라리 지방에서 근무하는 것이 낫지, 사업소에 근무하면 술이나 마시고 노닥거리며 시간이나 잘 가지, 뭐야 이거! 장과장, 안 그래?  이거 뭐 높은 사람들 층층시하에서 매일같이 오버타임에 힘들어 죽겠어. 승진하려면 까마득한데, 괜히 본사에 일찍 와서 이거 무슨 고생야. 옛날에는 4직급(과장급)에서 5년이면 충분하게 3직급(부장급)이 되었는데, 지금은 10년차 과장들도 수두룩 하잖아!


H과장은 토목직으로 나와는 전공이 달라 다른 부서에 근무하고 있었지만, 승진 동기로 지방사업소 발령 동기이자 같이 근무한 전력으로 가끔 마주치면 반가운 척하고 지내는 사이였다. 어느 봄날 구내식당에서 우연히 점심을 같이 하고나서, 담배를 물고 회사 정원을 거닐며 그는 내가 한번도 생각하지 못한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하긴, 그랬다. 아이들이 어린 탓에 도시에 근무할 이유도 없었지만, 지방에서 근무할 때는 사택이 있어서 집 걱정 할 필요도 없었고 월급도 많았다. 부하직원들도 너댓은 있어서 적당히 부리면 머리나 수족이 직접 수고할 필요도 없었고 기성고를 받으려는 공사업자들은 뻔질나게 드나들며 술을 사고 저녁을 대접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칼퇴근이 가능했었고, 가족을 대도시에 두고 혼자 내려와 있는 부장님 하나만 적당히 잘 보이면 그뿐이었다. 결재도 쉬었다. 부장에게만 사인 받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전문분야가 전혀 다른 사업소장의 최종결재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본사는 달랐다. 옆 부서의 부장들마저도 다 상전이었으며, 최종 결재권자도 같은 전공으로 어설픈 나보다 훨씬 고급정보에 밝은 분이었으니, 철저히 준비하지 않으면 깨지기 일쑤이었으니 항상 긴장 속에서 살아야 했고, 또한 계속 오르기만 하는 집값은 도대체 언제 내집을 마련할 수 있을지 짐작조차 못하게 했다. 천 육백만 원 짜리 송파동의 2층 양옥집 2층 한 귀퉁이 전세집은 여름이면 찌는 듯이 더웠고, 겨울이면 단열이 안되어 벽지 윗부분은 곰팡이가 시커멓게 피는 집으로, 지방의 사택과는 비교도 안 됐다.


H과장의 불평불만은,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살아가는 내게 전염되어 큰 깨달음(?)을 주어, 불평과 불만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그래, 맞아! 이렇게 살지 않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는 이 삶의 굴레를 바꿀 수는 없을까? 이렇게 시작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헤맸고, 결국 당위성을 가진 논리를 찾아내고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 지금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가? 그러면 변화를 구하라. 변화를 구할 용기가 없으면 현재에 만족하라. 불평불만을 말하지 말라.


<후기>

아래에 어떤 분이 올린 글 '미국이민에 대한 단상'을 읽고 되살아난 지난 날의 기억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삼포세대라고 불린다는 요즘 젊은이들이 우리 세대를 경제 고속 성장기에 사회생활을 한 덕분에, 대학만 나오면 쉽게 직장을 잡고 또 쉽게 부를 축적한 세대로 부러워한다고 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만, 전 풍요로운 시대를 사는 요즘 세대가 정말 부럽습니다. 남의 떡이 커보이는 거지요.


그러나 우리들도 H과장처럼 우리 전 세대들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월이 얼마만큼 흐른 다음, 뒷 세대는 또 지금 세대를 부러워할 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또한 남의 떡이 커보이는 거겠지요. 우리를 가르쳤던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은 부동산으로 꽤 큰 재산을 모았다고 들었습니다. 밤새워 줄을 서서 아파트 분양신청서를 접수시키고 당첨만 되면 큰 돈을 벌 수 있었던 70년대에 쉽게 부를 쌓았던 거지요. 그 세대에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을 부러워했던 거겠지만 일반적으로 그 세대는 우리 보다 불행했던 시대를 산 분들입니다.


지금 세대가 우리보다 훨씬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냉장고도 없었고, 휴대전화나 컴퓨터는 커녕 유선전화나 TV도 없이 살았습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끼니가 없어서 고구마나 감자로 끼니를 대신하기도 했지요. 대학진학율은 10%도 안 되었으니 지금처럼 누구나 대학에 갈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 제주에는 44년 생으로 60년대에 이민을 갔던 분이 지난 달에 돌아와서 살고 계시고, 38년생인 박장로님은 69년에 이민을 가서 40년을 넘게 사셨는데 한국에 오면 마음이 그렇게 편하다고 하며 한국에서 더 오래 머물고 계십니다.


인생이란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을 쓰신 분은 코끼리의 코를 만진 것이고 나는 코끼리의 꼬리 정도를 만져본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혼자 웃어 봅니다. 그 느낌이 어찌되었든 만져보고 느껴보았으니 모두 맞다는 것입니다. 정답이 없는 인생은 모든 인생이 다 정답일 수도 있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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