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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

감기 이야기 (1)

(2013년 1월 10일에 작성한 글)

 

1970년대 말 전방에서 군대생활을 할 때, 감기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의무실이 환자들로 꽉 차서 내무반이 감기에 걸린 병사들의 병동이 되어, 본부중대 절반이 넘는 인원이 들어 누웠다. 군기가 빠질대로 빠졌다고 생각해서 화가 난 중대장이 의무장교에게 체온이 일정 - 39도 였는지 40도 였는지 기억에 없다 - 이하인 병사들을 쫓아내게 했다. 나는 40도가 넘었던 두 명의 병사 중의 하나가 되어 의무실에서 계속 휴식을 취할 수 있었지만, 완전군장을 하고 연병장을 뺑뺑이 도는 나머지 병사들의 '군기확립' 외침을 들어야 했다.

 

젊었을 때는 웬만큼 감기를 앓아도 대단한 병은 아니었다. 열이 40도를 넘어도 견딜만 했었다.

 

첫 아이가 딸 쌍둥이다. 84년 크리스마스 무렵에 태어날 아이가 해를 넘겨 1월 9일 제왕절개 수술로 나왔으나 2Kg 내외의 체중으로 아이들은 인큐베이터에 2주 가량 있어야 했다. 당연히 몸이 약할 걸로 생각하고 걱정했으나, 아이들은 잘 자라주었다. 승진하여 울진에서 일하고 있었을 때 아이가 두 돌이 되었는데, 한 아이가 감기에 걸려 몸이 불덩이 처럼 열이 났었다. 급한 김에 시골동네 의원으로 데려갔고, 영 탐탁치 않게 보이던 나이 많은 의사는 주사를 놓고 약을 주었다. 그 덕분인지 아이는 오래 앓기는 했지만, 열은 곧 내렸다.

 

쌍둥이를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하나가 아프면 뒤따라 다른 아이도 같이 아프게 된다. 하루 이틀 뒤 다른 아이가 똑같이 앓기 시작했는데, 마침 일요일이고 이른 새벽이라 그나마 시골의원도 갈 수가 없었다. 급한 김에 열을 내리기 위해 아이를 홀딱 벗기고 얼음찜질을 했다. 아이는 까무라지듯 울어댔으나 어떡하든 열은 내려야 했다. 결과가 흥미로웠다. 이 아이가 의원에 데리고 가서 주사를 맞은 아이 보다 훨씬 빨리 생기가 돌았다. 감기는 약도 별 효과가 없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살다보면 1년에 한 번쯤은 감기몸살이 찾아오곤 했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해야하는 입장에서는 괴로웠다. 하루는 하도 열이 심해서 동네 의원을 찾았더니, 높은 열에 의사가 깜짝 놀라며 링거를 놔준 적도 있었지만, 대충 동네 약국에 가서 쌍화탕이나 아스피린을 먹는 정도로 지나갔다. 한 번은 동네약국에 감기약을 지러 갔다가, 손님이 없는 약국에서 심심했던지 약사가 말을 걸어와 잠시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감기몸살은 몸에서 쉬라는 신호니까 그냥 쉬면 낫는다고 약을 권하지 않았다.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거다. 뜨거운 아랫목에 두꺼운 이불을 덮고 땀 흘리며 자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보기 드문 의식이 있는 약사이었던 것이다.

 

'감기는 만병의 근원이다'라는 말을 어려서부터 들으면서 자랐다.

이게 사실일까? 과학적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의학이라는 게 상식이 아닌 시대에 살아온 분들이 감성적으로 한 이야기일 뿐이다.

 

EBS 방송국에서 2008년에 실험을 했다. 27살 모의 감기환자를 시켜 7개 의원을 돌게했다. 증상은 3일 전부터 미열이 있더니 지금은 기침이 나고, 맑은 가래와 함께 콧물이 난다는 것이었는데, 7군데 의원에서 전부 약을 처방해 주었다. 주사 맞을 것을 권하는 곳도 있었지만, 가짜환자인 만큼 주사만은 맞지 않겠다고 버텼다.

 

 

모두 하루에 세 번씩 먹는 약 3일치를 처방했는데 1회분에 적게는 2알부터 많은 곳은 10개까지 들어있었다. 열이 있으니 해열제, 가래가 나오니까 진해거담제, 콧물이 나오니까 점막의 반응을 늦추는 항히스타민제, 몸살기가 있으니 진통제, 혹시 감기로 인해 염증이 생길지 모르니 항생제에 소염효소제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이 소화 잘 되라고 소화제까지 포함되었다. 받은 약들의 1회분을 모두 더해서 7로 나누니 평균 4.75개나 되었다.

 

이 가짜환자가 해외로 나갔다. 미국, 영국, 독일, 네덜란드까지 4개국에서 같은 증세로 닥터오피스를 찾았다. 청진기를 들이대고 호흡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지 진찰은 했지만 약이나 주사를 처방해주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그냥 쉬라고만 했다. 푹 쉬면 저절로 낫는다는 말을 덧붙였을 뿐이다. 주사도 놔주지 않고, 약도 처방하지 않았지만 진료비는 제대로 받았다.

 

<후기>

한국에는 EBS라는 방송이 있습니다. 교육방송인데 정말 '지식의 보고'라고 생각될 정도로 훌륭한 프로그램을 많이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보건의료에 이르기까지, 볼만한 게 아주 많습니다.

저는 최근에 보았지만 '감기'라는 2부작도 배우고 느끼는 게 참 많았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미국에서 일하면서 배운 약에 대한 상식과 제 경험을 보태 이야기를 몇 차례에 걸쳐 해보고자 합니다. 한국의 과잉진료와 의료관행을 감기로 따져보고 싶은 것입니다.

 

한국사람은 참 약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약을 많이 처방해 주어야 좋은 의사라고 평가를 한답니다.

한국에서 온 어떤 40대 아주머니는 위장약으로 6개월치 약을 처방받아 가져온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그 약을 의사에게 보여주었더니, 웬 약이 이렇게 많냐면서 깜짝 놀라더군요. 속 쓰린 증세가 있으면 그 증세에 맞는 약 하나만 먹으라는 거지요. 그 이야기를 들은 아주머니는 창피했는지 십년을 넘게 먹어온 약을 딱 끊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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