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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담배의 추억

(2012년 12월 3일에 쓴 글)

 

1989년 8월 12일 토요일, 그렇게도 끊기 힘들었던 담배를 끊은 날이다. 그날 이후로 담배는 내게 기호품이 아니라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담배를 피는 사람에게서는 악취가 나고, 담배연기가 코끝을 스치기만 해도 짜증이 나고 얼굴이 찌푸려졌다.


범털이었던 관계로 고등학생 시절에도 나는 담배와는 멀었다. 오히려 담배를 피우는 친구들을 나무라기도 했다. 예비고사를 치룬 날 저녁, 교복을 입은 채로 친구들이 중국집 골방에 모여 뒷풀이를 했는데, 녀석들은 담배를 꺼내 상위에 척 올려놓기도 했었지만, 나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었다.


그런 담배를 어떻게 배우게 되었는지도 기억에 생생하다. 대학 2학년 2학기, 기초 전공과목에 전자기장(Electro-magnetics)라는 과목이 있었다. 교과서가 원서이었는데 Imaginary Method 이라는 것을 배웠다. 교수님이 중요한 이론이라고 강조를 했던 부분이라 중간고사 때 그 부분을 달달 공부해서 시험에 임했고, 그 문제가 나왔었지만 정작 나는 한 줄도 못 쓰고 백지를 내고 말았다.


이유인즉슨, 총 두 문제 중에 한 문제가 '영상법에 대해 논하고, 실례를 들어 설명하라.'이었는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영상법을 배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영상법? 그게 뭐지. 그런 게 책에 있었나? 아니, 배운 적이 있었나? 당황한 나는 다른 문제만 풀고, 그 문제는 손도 대지 못하고 나와서는 먼저 나온 친구에게 물었다. 야, 영상법이 도대체 뭐냐? 우리 그런 것 배웠냐? 그거 임마, Imaginary Method 이잖아! 그건 분명히 나온다고 안 그랬냐?


오, 마이 갓! 뒷통수를 한대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아, 나는 그때 이미 알았어야 했다. 영어는 나와 잼병이라는 것을. 눈에 뵈는 게 없었고, 창피해서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학생 휴게실에서 만난 친구에게 담배를 한 대 얻어서 뻑뻑 피우는 것으로 화풀이를 했고, 그렇게 해서 니코틴 중독의 길로 들어섰다. 시험은 시험대로 망치고, 담배는 담배대로 배우게 되는 일생일대 최악의 사태가 생기고 만 것이다.


논산 훈련소에서 니코친에 철저히 중독 되고 말았다. 7월 하순에 입대한 나는 삼복더위를 훈련소에서 지내야 했다. - ROTC를 하지 않은 게 일생일대의 실수이었다. 내가 다는 학교는 특별히 공군이었다. M1 소총을 들고 박박 기다가 맞는 5분간 휴식 속에 담배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짧은 화랑담배에 불을 붙여 열심히 빨아 대다가 손가락이 뜨거워질 무렵이면 얼른 한 개피를 더 꺼내 줄담배를 피웠고, 그렇게 인이 박힌 담배는 십 수 년 동안 투쟁의 대상이었다.


끊기 위해 별짓을 다했다. 금연껌, 가짜 담배, 사탕 등 효과가 있다는 모든 것을 동원했었다. 또 실제 성공하기도 했다. 3개월도 끊었었고, 8개월 혹은 1년이 넘도록 끊기도 했다. 그러나, 열 받아 뚜껑이 열리는 일이 발생하면 공든 탑은 순간에 무너졌다. 사무실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가 없었고, 각 층 마다 휴게실이 있었는데, 그곳이 흡연을 할 수 있는 장소이었다. 부장에게 열 받고 나면 보이는 게 없었다. 휴게실로 가서 '어휴, X팔, 더러워서 정말, 이놈의 봉급쟁이 때려 쳐야지!' 하고는 쌍욕을 해대곤 했다. 야, 김과장 담배 하나 줘! 하고는 언제 끊었냐는 듯이 뻑뻑 피워댔다.


어느날 아침 회의를 하는데, 부장이 담배를 찾지 않았다. 담배를 필 수 없는 사무실에서도 가끔 부장님들은 피우기도 했다. 42년생으로 부장 고참이었던 N부장은, 담배 피기 위해 휴게실에 가서 젊은 직원들 눈치보기가 껄끄러울 터였다. 부장님, 담배드릴까요? 라는 아첨 섞인 질문(?)에 아니, 나 담배 끊었어! 라는 위엄서린 대답(?)이 돌아왔다.


속으로 비웃었다. 쳇, 언제까지 안 피나 두고보자! 한 달, 두 달, 세 달, 내가 비웃었던 부장의 금연은 계속되었고, 내 비웃음은 자책으로 바뀌어 갔다. 담배 하나 제대로 끊지 못해 몇 해 동안 쩔쩔 매는 놈이, 저 부장을 비난할 자격이 있냐? 라는 자책이었다. 그래, 너는 더 형편없는 놈 아닌가! 그런 식으로 자책은 이어졌다.


여름 휴가철이었다. 휴가는 5일이었지만, 제대로 다 찾아 먹을 수가 없던 때였다. 회사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PTO(Paid Time-Off)이었지만, 만약 5일을 다 휴가 낸다면 '5일 동안 없어도 되는 자리에 있어? 그런 자리에 뭐하러 앉아 있어. 갔다 와, 그동안 그런 불필요한 자리는 없애버릴 테니까.'라는 말을 들어도 이상할 게 없던 시절이었다. 12일은 토요일이니 적당히 핑계 대고 일찍 퇴근하면, 일요일 쉬고, 14일 하루 휴가 내면, 15일 광복절까지 쉴 수 있었다. 이번에 쉬는 목표는 금연으로 정했다. 회사에 나가면 스트레스 받고, 열 받으면 담배를 찾게 되니, 나흘을 쉬면서 담배를 끊겠다는 요량이었다.


일부러 기원을 찾아갔다. 1급을 두었던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 위해 기원을 찾았다. 왜냐면, 바둑을 두면 담배가 몹시 생각나기 때문에, 일부러 자신을 시험하기도 했다. 고스톱을 칠 때도 담배가 땡기기 때문에 일부러 고스톱도 쳤다. 돈을 따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담배를 피지 않는 것이 목적이었다.


N부장은 1년인가 끊었다가 다시 담배를 피웠고, 나의 금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N부장 덕분에 금연이 마침내 성공했다.


아이들에게 이야기 하곤 했다. 평생 잘한 일은 별로 없지만, 담배를 끊은 것은 가장 잘한 일이었다. 그리고 가장 잘못한 일은 담배를 배운 것이었다. 될 수 있으면 담배를 배우지 말라고 나름대로 교훈을 준 것이었지만, 아들놈은 어느새 골초가 되어 있었다.


- 그래, 너희들이 내 말을 듣겠냐? 내가 저지른 똑같은 잘못을 너도 저지르며 살겠지! 그렇게 인생은 반복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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