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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돈 이야기 - 하나

(2011년 11월 26일에 쓴 글)

 

가끔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잠 안 오는 밤이면 특히 그렇다. 잘 한 일은 별로 생각나지 않고, 잘 못한 일들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중의 하나가 참 경제개념 없이 살았다는 것이다. 즉 돈을 모르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유행어로 표현하면 '돈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살았다.


돈을 벌기 시작한 것은 대학때부터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로 몇 푼 받으면,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데 썼다. 전교생이 장학금을 받는 특수대학에 다닌 덕분이었다. 제대로 벌기 시작한 것은 졸업 후, 본격적인 직장생활을 하면서일 것이다. 1979년 봄, 2주간의 연수원 교육을 거치고, 연수비로 10만원이 채 안 되는 돈을 받고 부모님 속 내의를 사다 드린 것이 아스라히 기억난다.


그렇게 시작한 월급쟁이 생활은, 봉급을 받아 부모님께 갖다 드렸는데 20만원이 채 안 되는 월급이 창피해서 20만원을 채워드렸었다.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에 비해 공기업에 다닌 나는 봉급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용돈은 중식비같은 수당과 출장비 등으로 충당했다. 적은 수입이나마, 없이 살았던 집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었던 모양이다. 벌기 시작한 지 몇 년이 안 되어, 부모님은 하꼬방같던 용산 집에서 독산동의 번듯한 이층집으로 이사를 했으니.


수입의 60% 이상은 저축을 하고 살았던 듯 싶다. 결혼하고 아이들이 생겼어도, 부모님께 일정금액을 보내면서도 주택청약예금에 재형저축을 들었고, 아내는 적금까지 들었으니까. 백화점 같은 곳에서 쇼핑을 한 기억도 없다. 아마 임신복을 사러 갔던 게 유일했던 것 같다. 남들이 주식에 열을 올릴 때도, 내 손으로 땀흘려 벌지 않는 것은 투기이며 옳지 않은 짓이라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 믿음(?)으로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하여튼 봉급은 계속 뛰었다. 30만 원이 넘었고 50만 원이 되더니, 승진한 후에는 80만 원, 88 올림픽 때는 백만 원이 넘었다. 깨어있는 아이들을 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회사일에 올인했으니, 돈 쓸 일이 없었고 대부분 저축으로 이어졌다. 신도시에 분양하는 아파트에 열 번도 더 떨어지더니 30:1이 넘는 경쟁을 뚫고 결국 당첨이 되었다. 7천만원의 분양금을 은행융자 한푼 없이 지불하고 들어갈 수 있었다. 이민을 떠날 때 2억 넘게 받고 팔았으니 참 많이 벌었다. 그렇게 큰 돈을 벌게 해준 고국을 배은망덕(?)하게 등졌다.


처음 이민을 간 뉴질랜드에서 컴퓨터 장사한다고 2년을 허비하다 98년 미국에서 연봉 4만 불로 시작했다. 한국에서 받던 것보다 적었지만 지출은 훨씬 컷다. 첫 해에 만 불 정도 까먹었는데, 회사의 실적이 너무 좋아 연말에 만 사천 불을 보너스로 받았다. 다음해 5만 불, 그 다음해 6만 불, 마지막에는 9만 불 가까이 받았다. 최대한 401K에 돈을 넣으면서 열심히 살았다. 평생 몸에 밴 근검절약 정신도 잃지 않았으니, 미래나 노후를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탑을 공들여 쌓기는 힘들고 오래 걸려도, 허무는 것은 잠깐이다. 인생에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리먼 브러더스가 무너진 4년 전 이맘 때는 도무지 정신이 없었다. 갖고 있던 펀드와 401K는 '어, 어!' 하는 사이에 반토막이 났다. 더군다나 당시에 년 4백 불을 내고 파이낸스 어드바이저 서비스를 받고 있었는데, 전혀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어드바이스를 받고 돈을 움직이면 더 크게 터졌다. 돌이켜 보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섣부른 무당이 사람 잡는다. 동부에서 서부로 간 것도 잘못된 판단이었고, 그런 판단미스가 몇 천 불, 몇 만 불의 손해로 이어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고요와 평화 속에서 지난 시간을 되돌아 보는 여유가 생겼다. 미국역사에 대한 책을 읽었고, 4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 도대체 무엇인지 공부했다. 자본주의와 민주국가 속에서 살면서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경제학 개론에서 배운 대로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지도 않았고, 대중이 얼마나 무지하게 속고 사는지도 알게 되었다. 깨달음이 주는 큰 즐거움 속에서도 평생을 어리석게만 살아온 자신에게 무척 화가 났다.


아들 녀석에게도 미안하다. 엔지니어링을 전공했으면 하는 내 마음을 알아서 그랬는지 공대를 가게 한 것이 내 탓인 것만 같다. 어리석은 부모을 만나 엇비슷하게 살까 봐 미안한 마음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옛날에도 알았더라면, 절대로 엔지니어링을 택하게 하지 않을 것 같다.


민주주의 국가에 살면서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는 분들이 있다. 자본주의에 살면서 돈에 대해 이야기 하지 말자는 이야기와 같다. 민주주의는 토론과 소통으로 이루어는 장이다. 다른 견해를 들어주고 인내하는 관용이 없음을 탓할 일이다. 미국은 선거가 끝났고 한국은 진행중이다.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내 주머니하고 직결 되기 때문이다. 누가 되느냐에 따라 프라이베잇 건강보험이 필요할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암과 같이 큰 돈이 들어가는 질병에 대비해서.


헤르만 헷세의 말처럼, 새로운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알에서 깨어 나와야 한다. 하지만 아직도 알 속에 그대로 계시는 분들이 많아 보인다. 60년대의 가난을 기억에서 놓지 못하는 분들도 있고, 625의 참상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분들도 있다. 물론 잊지는 말아야 하지만, 그 패러다임에서는 벗어나야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 천동설의 패러다임 속에서는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하긴 나도 그랬다. 폭풍이 일던 4년 전에는, 미국에 있을 때는.


돈이 없으면 불편하다. 사고 싶은 것 마음대로 못 사고, 하고 싶은 일에도 제약이 많으니까.


돈이 없으니 또한 편하다. 쓸데 없는 것 사는 일 없고, 쓸데 없는 생각과 일에 시간 빼앗기지 않으니까.


(참, 빼먹었습니다. 돈을 이해하고 싶으시면 꼭 보시기 바랍니다. Money as Debt. 번역이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Sj40eWKu-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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