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술 이야기 (5)

(2012년 11월 3일에 작성한 글)

 

막걸리


2010년 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 해를 장식한 최고 히트 상품은 막걸리였다. 신문은 막걸리 예찬에 관한 기사를 실었고, TV는 일본과 미국으로 수출되어 팔리는 막걸리 모습과 막걸리 제조과정을 방송했다. 서울에서 옛 친구들을 만나도 막걸리가 대세였다. 사당동 지하철 부근의 좁고 허름한 대폿집에 댓 명이 모여 빈대떡과 막걸리로 오랜만의 만남을 즐겼다. 나는 소주가 더 좋았지만, 친구들의 막걸리 예찬론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예닐곱 살부터 아버지 막걸리 심부름을 했던 기억이 있다. 두 되짜리 적당히 찌그러지고 색이 바래 노리끼리한 주전자를 들고 신작로를 가로질러 막걸리 파는 가게에 갔었다. 땅에 묻힌 커다란 항아리에서 막대기가 달린 바가지로 퍼주면 막걸리 주전자는 어린 아이에게는 힘이 부쳤다. 오른손에 들고 몇 걸음, 왼 손에 들고 몇 걸음, 두 손으로 들고 몇 걸음씩 걸어 신작로를 다시 건느고 컴컴한 골목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었다.


대학의 신입생 환영회 때는 막걸리를 짬뽕 그릇에 가득 채워 마셨다. 거기다 소주까지 마신 탓에 다음날은 똥물까지 토한 적도 있었다. 과 환영회, 고등학교 동문 환영회, 써클 환영회 등등 가는 곳마다 술을 떡이 되도록 마셨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 오바이트를 해서 버스차장 아가씨에게 혼이 나는 친구들도 많았는데 그 원인은 대부분 막걸리였다. 내 기억 속에 있는 회색 빛깔의 70년대는 그렇게 막걸리와 함께 있었다.


그렇게 골 때리는 술, 막걸리가 세월이 지나 대중에게 사랑받는 술이 되어 있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내가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식량이 부족했던 70년대는 쌀로 술을 빚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아니 당시에는 불법이었다. 대부분 고구마를 이용했는데, 그것도 충분한 양이 안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알콜 돗수만 맞추고 카바이트나 다른 화학약품을 섞어 막걸리를 불법제조 했다는 거다. 하긴 당시 신문에는 막걸리 먹고 실명을 하거나 사망사고도 곧잘 기사로 났었다. 어쨋든 학교를 졸업하고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면서 막걸리를 마신 기억은 없다. 내게는 기피대상 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득이 높아지고 쌀 소비가 줄면서 쌀이 남아돌자, 쌀로 빚은 막걸리가 세상에 나왔다. 결혼 초에 처가집에 들리면, 술을 전혀 못하는 집안이지만 사위들을 위해서 술을 준비해 두곤 했는데, 장모님의 친정에서 가져온 가내주가 일품이었다. 쌀로 빚은 맑은 동동주 비슷한 그 술은 지금까지 마셔본 것 중에서 최고였지만, 처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술이 되고 말았다. 술 만드는 과정이 너무 어려워서 아무에게도 그 비법을 전수해주지 못했다는 거다. 적당히 달착지근하면서도 쌉쌀하지만, 쉽게 취하고 한숨 자고나면 깨끗하게 깨는 술이었다.


제주에는 제주 막걸리가 있다. 유산균이 살아있다는 생막걸리라 유통기간이 짧다. 육지에서 온 기업인 이마트나 롯데마트에서는 팔지 못하고, 농협이나 제주 토종 마트에서만 판다. 맛이 깔끔하고 깨끗해서 마시기 편하다.


돗수가 높지 않아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출출할 때 간식으로는 그만이다. 이 술을 아주 좋아하는 분을 만난 적이 있다. 연초에 만난 L 선생도 이 카페를 통해 연락이 되어 만났던 분이다. 60년대 말에 미군으로 한국에 근무하셨다고 하니 연세가 꽤 된 분인데, 부부가 함께 술을 참 즐겨하셨다.


이 분은 되도록 날짜가 오래된 술을 산다고 한다. 가급적 흔들지 않고 갖고 와서 냉장고에 두었다가 맑은 윗 부분만 조용히 따라 마신다. 가라앉은 침전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즉 동동주를 만들어 드시는 것이다.


지난 3월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시며 년말에 아주 돌아온다고 했으니, 돌아오실 때가 되었다. L 선생님은  제주대학 맞은 편에 짓고 있어 내년 1월에 입주하는 스위첸이라는 아파트를 사 두었다. PGA 공인 티칭프로 자격을 갖고 있는데, 제주에서 골프를 하며 재미삼아 사람들을 가르칠 계획을 갖고 있다. 같이 라운딩할 친구 분들도 이미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이제 곧 L 선생님을 다시 만나서 제주 막걸리를 다시 나눌 기회가 올 것이다. L 선생님은 가만히 윗부분만 따라 동동주로 마시고, 나는 열심히 흔들어 막걸리로 마신다.

'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술 이야기 (6)  (0) 2013.11.15
이민자가 한국에서 보는 미국 대선  (0) 2013.11.15
술 이야기 (4)  (0) 2013.11.15
내곡동 사저 특검  (0) 2013.11.15
술 이야기 (3)  (0) 2013.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