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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술 이야기 (3)

(2012년 10월 25일에 작성한 글)

 

와인에 대한 추억


길 건너 앞집 프랭크를 따라 코라도(Corrado) 시장을 따라간 것은 요즘 같은 10월 말이었던 같다. 클리프튼(Clifton)에 있다는 시장은 이태리식 재래시장이었는데 프랭크가 안내한 곳은 사람 키만한 통이 있는 길거리 한복판이었다. 5갤런 짜리 큰 유리병이 15불, 5갤런 포도원액이 50불이라고 했다. 오크 통 모양의 커다란 통에는 성인이 두 손으로 잡을 정도의 손잡이가 이쪽과 반대편에 있었는데, 이걸 잡고 두 사람이 통을 힘주어 밀거나 당기면 수도꼭지에서 포도원액이 나왔다.


프랭크는 이 원액을 햇빛이 닿지 않는 서늘한 곳에 두었다가 45일 후에 먹으라고 했다. 크리스마스 쯤에는 와인이 숙성되어 먹을 만할 거라면서, 밑에 깔린 찌꺼기(Dust)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따르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게라지의 한쪽 귀퉁이에 둔 유리병에서는, 며칠이 지나자 발효를 하는지 기포가 올라오고 집안 전체에서는 향긋한 포도냄새가 진동했다.


프랭크는 이태리 나폴리에서 70년대 이민왔다고 했다. 변호사인 아들과 디자이너인 딸 자랑을 많이 했었다. 아들이 맨하탄의 커다란 로펌에 취직했다는 것이 자랑이고 머세데즈를 산 것도 자랑이었다. 딸이 중국에 출장간 것까지도 자랑했다. 그가 하루는 나를 불러 자신의 집을 구경시켜주며 자랑한 적이 있었는데, 자신의 와이너리 창고를 보여주며 직접 담은 와인을 한 병 주었다. 오로지 포도액만으로 1년 이상 숙성시켰다는 그의 와인은 향도 좋았고 적당히 쌉쌀하고 적당히 독했다. 아니 그렇게 맛있는 와인은 처음이었다.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신다고 생각하는 내게 와인은 원래 맞지 않았다. 총각시절 데이트할 때, 술 못 마시는 아가씨를 위해 마신 '마주앙'이라는 술이 내가 아는 와인의 전부이었고, 비행기 타면 식사 때 주는 와인을 마신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프랭크가 준 와인은 특별했고, 주당인 내가 반할 만했다. 그는 매일 한 병씩 마신다고 했다. 그의 와이너리에는 커다란 오크 통도 있었는데, 그에 의하면 해마다 10월에는 1년치 와인을 직접 담근다고 했다. 작년에 담근 술은 내년에, 금년에 담근 술은 내후년에 마신다고 하니, 지금 마시는 술은 재작년에 담근 것이다. 그의 좁은 와이너리에는 수백 개의 병들이 시간의 먼지를 뒤집어 쓰고 선반에 층층이 보관되어 있었다.


(내가 살던 집에서 바라본 프랭크의 집(왼쪽 끝). 메탈릭인 그는 가끔 사고로 찌그러진 차를 가져와 판금작업을 하느라 시끄러운 금속성 소음을 내곤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술을 만들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것도 없이 욕심만 내는 내가 한심했었는지, 그 해법으로 안내해 준 곳이 코라도 시장이었고 5갤런 짜리 유리병이었다. 하긴 나는 집에 오크통도 와이너리도 없었으니, 그처럼 맛있는 와인을 만들 수는 없었으리라. 그 맛있고 독한 와인을 매일 마시는 때문인지 항상 콧끝이 붉은 색이었던 프랭크, 지금은 70살도 넘었을 그가 강조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 No sugar, no water, no ingredient! 100% natural grape juice! Nothing added!


미국에서 와인은 생수보다 약간 비싸다. 리커 데포(정확한 이름이 가물가물, 기억이 안난다.)에 가면 갤런에 10불 안팍 짜리가 있다. 와인 맛을 잘 모르는 내가 고르는 기준은 오로지 돗수다. 12도가 넘는 것으로 적색과 흰색을 골라 식탁 옆에 두고, 커다란 와인 잔에 가득 따라 독한 위스키를 대신하기도 했다. 저녁 9시까지도 훤했던 밤이 아닌 여름 저녁에 덱에 앉아 와인을 마셔가면서 복받은 인생(?)을 자축했었다.


반딧불만이 반짝이는 뒤뜰을 바라보며, 쓸쓸히, 아주 쓸쓸히……


- 제가 앉았던 덱입니다. 여름에 찍은 사진이 없어서, 눈을 잔뜩 이고 있는 겨울의 모습을 올립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이때도 알았더라면......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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