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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술 이야기 (1)

(2012년 10월 18일에 작성한 글)

 

'토론토'님이 올리신 '사평역에서' 서두에 술을 좋아한다는 것을 보니, 술 이야기가 생각났다.

한국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에 '술'이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 시절부터다. 유류파동으로 겨울방학이 12월 초부터 시작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운 집을 피해, '밧데리 가게'라고 불리던 골방의 난로가에서 소주를 들이키는 것으로 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목구멍을 넘기기가 괴로울 정도의 쓰디 쓴 소주를 억지로 몇 잔 들이키면, 알딸딸해져서 끝이 보이지 않는 집안의 불화도 잊을 수 있었고, 암담했던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도 잠시 떠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술에 대한 개인사를 쓰려면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다. 대학생 시절, 군대생활, 사회와 직장생활 모든 곳에서 술이 따라 다녔다. 술로 시름을 잊기도 했고, 술에 취해 우정과 사랑을 노래했고, 술로 인해 영웅호걸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세상사 모든 것은 '과유불급'이다. 이제는 아무리 좋아하는 술도 '적당히' 절제해야 함을 배운다.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엊그제 한 밤중에 전화를 받았다. 지난 날 내 부하직원으로 내 뒷통수를 쳤었던 친구 A군이었다. 몹시 취한 상태 탓인지, 우는 듯한 목소리를 알아듣기 힘들게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알아 본 자초지종은 이랬다. 한 때 내가 신입이던 그 친구에게 사내교육을 통해 기술을 가르쳤고, 사업부장 시절에는 부하로 있던 B군이 죽었는데, 사인은 간암이었다고 한다. 이제 나이 50인 친구이었는데, 평소에 술을 많이 마셨다. A가 회사를 차려 사업을 했고, B는 그 밑에서 일했는데 간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나서 한 두 달만에 사망에 이르렀다고 했다. 전화한 날은 화장을 한 날이었다.


B는 나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많이 나를 따랐던 친구이었다.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도, 출장 때는 일부러 뉴저지에 찾아와 며칠 집에서 묵었던 적도 있었다. 나는 뉴욕을 구경시켜 주기도 했다. 언젠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어떤 대폿집에서 B가 술에 취해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 부장님, 아니지, 이제는 부장이 아니지, 형님, 그래 형님이다. 형님! 형은 당시에 우리의 주군이었습니다. 주군이 그렇게 갑자기 이민을 가버리시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주군만 바라보고 있던 우리는 닭 쫓던 개 신세 아닙니까? 대가리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으니 그냥 와해돼 버린 거 아닙니까! 덕분에 이민 붐이 불었어요. 이과장도, 최과장도, 김대리까지 세 명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갔지 뭡니까!


그는 술의 힘을 빌어 나를 원망하고 있었고, 나는 옛일을 떠올리며 듣고만 있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놈의 넋두리는 이미 어지간히 마셨는데도 좀처럼 취하지 않게 만들었다.


○ 그래, 그랬구나.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말았구나. 주군? 임마, 주군이라고 생각했으면 너희들이 나를 보호했어야 하는 거야, 그런데 너희는 그렇지 않았어. 나무에 올려놓고 흔든 게 누구야? 다 지나간 일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일일 뿐이야. 원망하지 말어. 그냥 운명이라고 생각해라. 누구와 무얼 하든 행복하고 즐거우면 되는 거다. 그뿐이야.


술이 50밖에 안 된 한 친구를 가져가 버렸다. 그렇게 나를 알았던 한 친구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후기>

지난 화요일에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세상을 등지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에 한줌의 재로 변했답니다. 

그리고 어제 토론토님이 올려주신 '사평역에서'라는 시를 읽고, 회색빛깔의 추억의 그림자 속을 헤맸습니다.


술과 스트레스에 쩔어 살았던 지난 날, 이민이라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나도 그처럼 되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저녁이면 떠오르는 술 한잔의 유혹과 허전함을 이겨내는 게 솔직히 쉽지만은 않습니다, ㅎㅎㅎ


- 오늘 아침 산책하며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입니다. 저 멀리에 바다가 보입니다.



- 콩알 만하던 밀감이 탐스럽게 달려, 수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제주는 바빠지고 있습니다. 사람 구하기가 힘든 시즌입니다.


- 밀감 밭 한쪽에서는 감도 익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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