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술 이야기 (2)

(2012년 10월 22일에 작성한 글)

 

소주에 얽힌 이야기


한국에서는 그 흔했던 소주가 미국에서 살게 되니 비싼 양주가 되어 있었다. 기껏 25도에 2홉들이 한 병에 6불이나 되었고, 음식점에 가면 12불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팁까지 얹어야 했으니, 서민이 부담없이 마실 수 있는 술이 그곳에서는 더 이상 아니었다. 아니다, 한국에서의 기억이 소주를 찾지 못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몇 십 센트(몇 백원)만 주면 구멍가게에서 얼마든지 쉽게 살 수 있었던 소주를, 한인타운의 리커스토어까지 일부러 찾아가서 몇 불씩 주고 살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 살 때는 베란다에 소주를 박스로 사다 놓았고, 집에서 저녁을 먹을 때는 - 거의 없는 경우지만 - 으례 소주 한 병이 식탁 한 귀퉁이를 차지했다. 그랬던 소주이니, 어쩌다 한 번씩 술을 찾는 사람들이야 문제가 될 리 없겠지만, 거의 매일 마시는 주당들에게 미국에서 소주는 가격이 부담스럽다. (이것도 나중에 LA에 가니 2불, 3불이었는데, 동부에서는 왜 그렇게 비싼지 모르겠다. 아무리 컨테이너에 실려 서부에서 동부로 운반한다고 해도 너무 비싼 거 아닌가?)


어쨋든 한국의 소주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는, 구역회같은 모임이나 손님이 올 때 접대용으로 내놓는 귀하신 몸(?)이 되었다. 그리고 저녁을 먹을 때 - 거의 매일이지만 - 식탁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술은 싸구려 위스키나 보드카로 대신했다.


나는 술을 살 때, 돗수를 본다. 취하기 위해서 먹는 술이니 약한 술은 의미가 퇴색한다. 옛날에는 25도 짜리 소주가, IMF를 거치면서 돗수가 낮아지더니 19도 짜리까지 나왔다. 사실 25도는 초보(?)술꾼이 목구멍을 넘기기에는 부담스럽다. 그러니 여자들도 마시기 좋게, 점점 순해지고 부드러워진 모양이다. 순전히 장사 속이겠지만.


미국에 처음 가서 친구집에 얹혀 살던 몇 개월과 보스턴에 장기 출장을 했던 몇 개월 동안은 술을 가까이 할 수 없었지만, 술은 이민생활의 외로움이나 고달픔을 잊게 해주었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마포의 최대포집 돼지갈비나, 영등포 시장에서 족발이나 뼈다귀 감자탕을 곁들여 직장동료와 샐러리맨의 고충을 토로하면 마시는 싸고 쓴 소주는 아니었지만, 퇴근 후에 위스키에 얼음을 뛰워 마시거나 보드카에 프럼쥬스를 섞어 소주를 대신하곤 했었다.


제주에서는 한라산이라는 소주가 있다. 흔히 마셨던 진로(참이슬)도 살 수는 있지만, 제주에 살고 있으니 한라산을 찾는다. 알칼리성 천연 암반수로 만들었다고 광고를 하는데, 제주사람들은 진로에 비해 뒷끝이 없다고 자랑한다.


제주에서 음식점에서 소주를 찾으면 하얀 소주인지 파란 소주인지를 묻고는 또 다시 찬 거, 안 찬 거를 묻는다. (왼쪽 사진에서 좌측 하얀병은 21도 짜리 보통 소주이고, 우측 파란병은 19.8도짜리 순한 소주이다.)


제주 토백이 사람들은 안 찬 술을 찾는데 비해, 관광객이나 외지인은 대부분 냉장고에 보관된 찬 소주를 찾는다. 선반위에 그냥 보관해서 차지 않은 술을 '노지 것'이라는 제주의 전문용어(?)를 쓴다. 제주의 밀감도 '하우스 귤'과 '노지 귤'로 나뉘는데, 하우스 귤이 일반적으로 노지 귤보다는 수분 콘트롤이 되기 때문에 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사람들이 차지 않은 미지근한 소주를 찾는 것은, 아마도 술을 많이 마시는 제주사람들이 빨리 취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혼자 추측하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좋아하는 소주를 옆에 두고 살 수 있게 되었으나, 몸이 받아주지 않으니 전 처럼 자주 마실 수는 없다. 무식하게 커다란 프라스틱 병에 담긴 소주를 사다놓고, 반주로 가끔씩 물컵에 따라 한 잔을 할 뿐이다. 몸이 받아주는 만큼만.

'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곡동 사저 특검  (0) 2013.11.15
술 이야기 (3)  (0) 2013.11.15
술 이야기 (1)  (0) 2013.11.15
갈 데까지 가보자!  (0) 2013.11.15
도가니 - 알면 바뀐다.  (0) 2013.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