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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나은 세상을 위하여

20년만에 경험하는 한국의 대선

(2012년 11월 23일에 쓴 글)

 

국민학교 입학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7년 동안(중학교 재수 1년 포함), 대통령은 박정희씨였다. 투표권을 행사할 때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뽑았을 뿐, 대통령을 선거로 뽑는 제도가 아니었다. 시험때문이었겠지만 당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수를 아직도 외우고 있다. 2,359명. 이삼오 짓고 갑오로 외웠었다. 헌법이라고 칭하는 것 자체가 창피한 유신헌법 체제하에서였지만, 그것도 헌법이라고 기술고시 때문에 열심히 외웠었다. 성인이 되어 난생 처음 투표장에 갔을 때, 국회의원은 무조건 야당을 찍었지만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은 누가 누군지 몰라서, '누구를 찍을까요?'하고 볼펜을 굴려 아무 곳이나 찍었던 기억이 난다.


1987년 629선언으로 이 땅에서 군사독재가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가 오는 줄 알았다. YS와 DJ가 국민의 염원이었던 단일화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따로 출마하는 바람에, 노태우가 당선되어 후진적 군부시대를 종식시키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절망을 느꼈다. 국민의 지도자로 생각했으나, 국민의 염원을 저버린 YS와 DJ 두 분은 대통령 병에 걸린 사람일뿐, 더 이상 나라의 지도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생각난다. 1987년 11월의 아침, 울진원자력 건설현장에 있었던 당시 차가 없어서 걸어서 투표장에 갔었다, 난생 처음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대통령 병 환자인 YS가 3당 통합이라는 야합을 거쳐 대통령에 당선된 1992년 대선도 나는 시니컬하게만 바라보았다. 정치는 아무 것도 모르는 문외한이지만,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노태우와 JP, YS가 함께 하는 것에 냉소적일 수 밖에 없었다. 당시에 정말 감동적인 장면이 있었다. DJ가 YS에게 패배한 후, TV에서 정계은퇴선언을 하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특히 기자회견을 하는 DJ 뒤에서 달기똥같은 눈물을 흘리던 김원기씨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보는 나도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김원기씨는 노무현 정부에서 국회의장까지 지냈지만, DJ가 정계복귀를 선언한 후에 DJ측에 가담하지 않고 꼬마 민주당에 남자, 괘씸죄에 걸려 낙선하고 만다. 이 때 DJ의 비정한 모습을 보고 그를 향했던 조금의 존경심마저도 접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그동안 DJ, 노무현,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 분들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한국에 없었으니 자세히 알지 못한다. DJ는 JP와 단일화(이것도 말이 안 되는 야합이라고 생각하지만)를 거쳤고, 노무현씨는 정몽준씨와 단일화를 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물론 지금은 많은 것을 읽어 훨씬 자세히 알고 있다.) 즉, YS, DJ, 노무현씨는 야합이든 단일화든 합치는 과정을 통해서 대통령이 된 분들이다.


20년이 지나 다시 한국에서 보게 된 대선도, 지금 단일화라는 화두에 휩싸여 있다. 단일화를 하지 않으면 지는 것은 100%지만, 단일화를 하면 이기는 것이 50% 이상이다. 처음에는 이들의 경쟁을 신선한 시각에서 보았지만, 서로들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단일화 협상을 하니 결론이 쉬울 수가 없고, 지리하게 반복되는 협상, 결렬, 협상재개를 보면서 피로감이 온다. 엊그제 이 두 사람의 TV 토론회를 지켜보았다. 두 분 다 점잖은 신사들임이 분명했다. 긴장한 표정에서 큰 그릇을 가진 대인의 풍모를 볼 수는 없었지만, 진실된 마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추종자들에게 있다는 생각이다. 대통령이 되면 직접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가 6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국무총리부터 장차관과 각종 기관의 수장까지. 그 추종자들은 일신양명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을 터이니, 목숨을 걸고 달려들 수 밖에 없을 거다. 1987년 YS와 DJ가 그랬던 것처럼. 그때 그 분들이 소통과 타협으로 단일화를 이뤘더라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10년은 더 앞당겨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혹시라도 이민을 택해 한국을 떠나는 사람들이 덜하지는 않았을까?


중생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밀고 당기기를 보면서, 20년 전에 경험했던 한국의 대선을 투표권도 없는 역이민자(역거주자)가 쓸데없이 떠올려 본다.


http://www.youtube.com/watch?v=VdZeW9vG1xg


- 이런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 ('ilovenj'님의 페이스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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