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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제주의 삶

속이고 속고

(2012년 8월 12일)

 

제주는 2일, 7일이 오일장이다.

오늘이 8월 12일이니까 오일장이 서는 날이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딱히 살 것이 없어도 집사람과 데이트 삼아 장엘 가곤 한다. 천원에 두 개 하는 호떡을 사먹기도 하고, 삶은 옥수수를 사서 들고 다니며 먹는 재미도 있다.


물건을 사는 것보다 흥미나는 것은 활기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구수한 사람 살아가는 냄새들이다. 다들 힘이 넘치고 희망이 있고 내일이 있는 모습이다. '천원, 천원', '전부 오천원, 오천원', '몽땅 만원만 주고 가져 가세요.'하고 외치는 상인들의 목소리에서, 보다 싸고 좋은 물건이 없나? 하고 열심히 곁눈질을 하며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에게서, 삶의 짙은 향기를 맡는다.


한 달 쯤 전이던가! 더위가 한창이던 7월 하순에 들렸던 장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비가 계속 되던 끝이라 사람이 많으리라고 들어선 장이었지만,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주차장은 한가했다.

'아, 더우니까 장에도 사람들이 없구나!'


'할머니 장터'라고 불리는 곳에는 나이 드신 아낙들이, 집에서 기른 야채들을 좌판에 놓고 파는 곳이다. 상추, 쑥갓, 고추, 마늘, 감자 등등 푸성귀부터 과일까지 수백명의 아주머니들이 좌판 뒤에 앉아 손님을 기다린다. 장마 끝이라 그런지 야채값들이 비싸다며 투덜거리는 와이프 뒤에서 건강한 군상들의 모습에서 감동을 느끼며 걷는다.


- 역시 자꾸 둘러봐야 해, 여보. 이게 천 원 어치야! 다른 데서는 2천 원 어치도 넘어. 싸게 파는 할머니도 있다니까!


천 원에 산 상추가 가득 든 봉다리를 들어보이며, 천 원을 줏은 아이처럼 만족한 표정을 짓고 아내는 말한다. 쌈은 내가 언제나 좋아하는 메뉴다. 상추나 깻잎 같은 푸성귀에 쌈장을 깔고, 밥을 얹은 다음 생선찌게 같은 비린내 나는 것을 더해서 먹는 독특한 방식이다. 충청남도 부여출신인 모친은 노상 이런 식으로 쌈을 준비했었고, 충청도 식인지 모르지만 거기에 길들어진 탓이리라.


생선전에 가서 무얼 살까, 고민하던 아내가 코다리를 고른다. 흥정 끝에 한 마리를 더 얹어 만원을 꺼내고, 6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통나무를 잘라 만든 듯, 둔탁해 보이는 도마 위에 코다리를 한 마리 씩 놓고 묵직해 보이는 칼로 토막을 낸다. 장을 한바퀴 돌면서 데이트도 하고, 간식거리 센베이 과자도 사고, 몇 가지 과일도 산다. 두 손에 든 장바구니가 들고 다니기에 귀찮아질 만큼 무거워지면 장보기와 함께 데이트도 끝낸다.


집에 돌아온 후, 사온 것을 정리해 냉장고에 갈무리 하던 집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속았다는 것이다. 검은 비닐봉지에서 꺼내진 상추는 겉에 몇 장만 성한 것이고, 다 장마비에 물러터진 것들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천 원 짜리 개선장군이 패잔병으로 뒤바뀌는 순간이다.


코다리 조림을 만들어 저녁상에 올린 아내가 또 한 마디 거든다.


- 이 코다리도 속아서 산 것 같아. 상한 냄새가 나. 먹어보고 이상하면 버려야겠어. 양념만 버렸네.


코다리를 한 입 베어문 입속에서는 구린내 비슷한 퀘퀘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렇지, 계속 오는 비에 제대로 말릴 수가 있었겠나! 아무 생각 없이 산 우리가 잘못이지.


<후기>

속고 속이는 것도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는 세상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것도 인생인데요.

그리고 이런 장날의 이만한 속임수는 애교스럽기까지 합니다. 주부 9단 정도 되면 다 속지 않을 수도 있을 테구요.

그러나, 미국에서 살면서는 대충 주어 담아도 이런 일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농협에서 운영하는 '하나로'라는 마트가 있습니다. 어느날 집에 들어가다가 들렸는데, 상자에 예쁘게 포장한 딸기를 싸게 팔고 있었습니다. 집사람 심부름으로 무언가 사러 들렸다가, 다른 사람들이 집어드는 걸 보고 저도 집어 들었다가, 집사람에게 혼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위에만 성한 것을 올려놓고, 아래는 다 상한 딸기였답니다. 농협과 같은 공공기관의 이런 사기에 비하면, 시골 장날 좌판에서 손주들 용돈을 벌려고 나온 할머니들의 속임수는 차라리 애교에 가깝습니다.


- 어제 운동하고 들어오다가 찍었습니다. 성글어가는 밤이 입추가 지났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 집 부근의 밀감밭입니다. 빼곡히 달린 알이 꽤나 굵어져 있습니다. 이제 두어 달만 지나면 저 놈들이 노란 색으로 변하기 시작할 겁니다. 그때는 찬바람도 불겠지요.


- 오늘 아침에 운동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집 근방에서 사고가 났더군요. 어떻게 이런 길에서 사고가 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일요일이고 아침 7시도 되기 전이라 차량도 없을 때인데.


- 약간 굽은 길인데, 속도를 줄이지 않아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았을까 혼자 추측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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