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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제주의 삶

집과 이웃 (5)

(2012년 8월 1일)

 

20여년 전 나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놓고 갈등하고 있었다. 별로 어렵지 않게 뉴질랜드 영주권을 받아놓고 선택을 해야했지만, 자회사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던 것이다. 이민을 선택하는 대신에 스카웃 제의를 받아들였다.


과장급 하나에 대리급 직원이 둘인 신생부서를 맡아서, 일하는 재미에 빠졌다. 그러는 사이에 영주권은 취소가 되었고 이민을 가겠다는 생각은 잊어버렸다. 내 부서의 사업은 잘 나갔다. 2~3년 후에는 30명이 넘는 부서로 커졌고, 만지는 비자금의 규모도 덩달아 커졌다. 수시로 야근을 하는 직원들에게 저녁을 사주고, 큰 프로젝트를 끝내고 나서 회식을 하기도 했지만, 수주활동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명절 때는 높은 분들에게 줄 뇌물성 봉투를 만들기도 했고, 계약, 원가조사, 검수, 납품 때는 관계자들을 모시고 룸살롱에서 술을 먹었다. 중요한 분들을 모시고 접대성 골프를 치기도 했다.


비자금을 얼마나 잘 만드느냐가 사업부장의 능력이었다. 직원들 '가라출장'과 '세금계산서 부풀리기'가 주로 사용되었다. 더러운 돈을 만질수록 깨끗하게 처신하고 투명해야 한다고 믿었고, 또 그렇게 실천했다. 어제는 누구를 만났고, 어디서 식사를 했는지를 회의석상에서 부하직원들에게 보고(?)를 했다. 가족같은 분위기가 직원이 늘면서 쥐새끼가 한 마리 끼어들자 상황이 변했다.


모회사에서 내 부서로 오겠다는 친구가 있었다. 평소에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깡통(실력은 없고 소리만 요란한 사람을 일컫는 개인적 호칭)임에 틀림이 없는 사람이었다. 경력 때문에 최소 과장급으로 받아야 하기 때문에 안 받겠다고 버텼지만, 주위에서 압력이 들어왔다. 하다못해 직장생활 하면서 친해진 친구들까지 '야, 너 그러면 안돼!'하고 압력을 넣었다. ROTC 출신이고 나이도 많으니까, 주무과장이나 시켜서 비자금이나 관리시키고 허드레 서무 일이나 시킬 생각으로 받았던 친구였다.


회식이라도 하게 되면 택시를 잡아주고, 택시기사에게 만 원짜리 두어 장 집어주며, '우리 부장님 잘 좀 모셔주세요!' 하고 부탁하면서 허리를 꺽어 인사하는 친구였다. ROTC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웃사람 모시는 것 하나는 대부분 지나치게 잘 한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나는 부담스러웠다. 이 친구가 내 앞에서는 이렇듯 했지만, 뒤에서는 내 뒷통수를 치고 다녔다. 돈만 쓰고 다닌다든지, 업자에게서 얼마를 받았다든지, 업자 스폰서로 미국에 가족여행을 다녀왔다든지 하는 헛소문을 퍼트렸다.


쥐새끼에게 비자금 관리를 맡긴 것이 잘못이었다. 전무님이 호출해서 갔더니, '장부장, 조심해야겠어. 너무 지저분한 이야기들이 많이 돌아.' 하고 주의를 주었다. 열심히 일만 했고, 깨끗하게 처신한다고 했었다 라는 자부심은 상처를 입었고, 부하직원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다시 이민을 생각했다. 한 번 해본 일이라고 두 번째 영주권 취득은 더 쉬웠다.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샜다. 세금계산서 부풀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지나갔고, 나는 흥분했다.


○ 아니, 저런 위선자를 그냥 두면 안 되잖아요. 정부 돈을 빼먹는다는 건데!


- 아니요,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절대 모르는 척 하셔야 합니다. 제가 이사가고 나면 모를까. 저는 아이들을 계속 맡겨야 하잖아요. 그러고 정부에서 지원금을 받는 기관들은 다 그럽니다. 영유아원도 그렇구요. 오죽하면 정부 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고 하지 않겠어요.


선하게 웃는 젊은 친구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 이런 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미국에 그냥 살았어야지, 더군다나 나는 이제 이 나라에서 아웃사이더 아닌가! 

보고 듣고 겪는 일들에 대해서 감정을 담지 말자. 그냥 옵서버로서 관찰하고 즐기자. 생각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살기 위해 온 곳 아닌가! 감정이 개입되면 주관적 판단이 되지만, 감정개입 없이 기술하면 객관적 사실이 된다.

15년간 해외에서 살아본 경험을 바탕으로 옵서버로서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자위해 본다.


- 그래도 목사네가 일은 많이 해. 지금도 하수도 청소를 하는데 나와 있거든.


엊그제 쓰레기 버리러 나갔다 들어온 집사람이 창밖을 보면 말했다. 하수도 배관할 때 잘못되었는지 일년에 두 번씩 업체를 불러서 하수도를 청소한다. 머리카락과 기름덩어리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목사 내외가 주민대표를 맡고 있어서, 공동으로 관리하는 일을 처리한다. 누구도 맡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주민들에게 공지할 일이 있으면 입구에 프린트물을 게시하기도 하고, 주민회의를 주재하기도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주변청소를 주관하기도 한다. 시청에는 얼마나 그동안 민원을 많이 넣었는지, 시청에서 넌덜머리를 내는 것 같다. 그러니 자기가 해도 될 민원을 나를 통해 하려고 시도한다.


어느 독지가가 좋은 일(?)을 하는 목사에게 4백 평에 가까운 땅을 싸게 팔았다고 한다. 그 땅에 교회를 짓고 거기서 아동센터를 할 계획을 세웠는데, 교회가 들어서면 신령들이 노한다고 마을주민들이 반대했다고 한다. 제주도 땅은 최근 2~3년 사이에 평균 50% 이상 올랐다. 아마 목사는 그 땅을 팔기만 해도 수억은 벌었을 거다. 역시 좋은 일은 하고 볼 일이다.


지역아동센터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겠다는 것이 이제 2년 남았다. 3년 내로 이전하겠다는 약속을 주민들에게 작년에 했었으니까. 그 약속이나 지키기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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