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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제주의 삶

집과 이웃(7)

(2012년 8월 29일)

 

자연 생태계에는 태풍도 필요하다고 한다. 바람이 바닷물을 뒤섞어 심해에 산소도 공급하고, 또 식물의 씨앗을 먼 곳까지 흘러보내 종자를 퍼뜨리는 일도 한다는 거다. 제주는 예로부터 태풍이 잦았던 곳으로 모든 자연 생태계가 바람에 맞서는 모습으로 진화해 왔다. 예를 들어 제주의 코스모스는 키가 크지 않다. 난장이 모습이다. 땅에 바짝 붙은 꽃이나 풀들이 많다.


전통가옥들도 지붕이 낮고, 초가에는 새끼줄로 얽어매고 돌맹이를 매달아 바람에도 끄떡하지 않도록 대비를 한다. 제주에 흔한 돌로 쌓아놓은 듯한 담들도 엉성하게 쌓은 듯한 돌 사이에 구멍이 숭숭 있어서 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바람을 통하게 해놓았다. 모진 바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숙명을 지닌 삶의 지혜다.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면서 사는 삶은 웬지 노인의 삶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날에는 혈기와 패기로 운명을 이겨내고 무언가 이루기 위해서 노력했었다면, 세상풍파를 겪고나서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지혜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비우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사는 노년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나이 들어서도 끈적끈적한 욕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사는 군상들의 모습에서 추함이 보인다. 아무리 그들이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커다란 권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집근처에 절이 있다. 삼광사라고 하는 이 절은 조계종으로 그리 크지는 않아도 꽤 알려진 절인듯 한 것은, 무슨 날만 되면 주위에 모여드는 차들 때문이다. 들리는 말로는 전 제주지사의 부인이 신도로 있는 등, 제주에서는 방귀 깨나 뀌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든다고 한다. 이 절에서 새벽 3시 50분에 정확히 열 번이 넘는 타종과 함께 새벽염불을 시작해서 5시 10분 경에 끝난다. 창문을 닫고 잘 때는 이중 창이라 그런지 거의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요즘은 첫 타종소리와 함께 잠에서 깬다.


괴롭기 그지 없다. 스피커를 사용하는 염불소리는 새벽에 보통 소음이 아니다. 미국에서 불면증으로 고통을 받던 경력까지 있는 내게는, '저놈의 절에다 불을 싸지르거나, 저 중놈을 쏴 죽여 버릴 수는 없을까'라는 상상까지 들 정도였다. 조계종 총무원에 민원도 넣어보고, 제주시청에도 민원을 해보았지만, 아무 반응도 없다. 관련부서에 이첩했다는 것이 다였다.


포기하는 게 최선이었다. 오늘도 첫 타종소리에 잠이 깼다. 그냥 일어나 창문을 닫는다. 방에 딸린 화장실의 창문까지 닫아 걸고 다시 잠을 청한다. 처음에는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어났지만, 요즘은 두 시간을 더 잘 때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더위에 깊은 잠을 못 자고 자꾸 깨는데, 새벽에 선선한 기운이 아까울 뿐이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인 이웃들은 아무 소리도 못 듣는다고 한다. 새벽에 깊은 잠 속에서 그런 소리를 어떻게 듣느냐는 거다. 하긴 나도 젊었을 때는 옆에서 탱크가 지나가도 잠을 잤으니까.


지난 주에 아랫층 해병대 중사집에 서울에 사는 고모가 다녀갔다고 집사람이 전한다. 사흘을 조카집에서 자고 간 그 노인에게는 이곳이 바로 극락이었다는 것이다.


- 얘, 이렇게 조용하고 에어컨이 없이도 이렇게 시원한 곳에서 사는 너희들이 부럽다. 거기다가 새벽에는 염불소리까지 들리니 얼마나 좋으냐. 다른 데가 극락이 아니라 이곳이 바로 극락이다. 너희들이 바로 극락에서 사는구나.


독실한 불교신자라는 염불소리가 소음이 아니라, 그 노인에게는 극락에서 전해지는 천상의 소리였는가 보다.


누구에게는 고통의 소음이 누군가에게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소리가 된다.


세상만사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ㅎㅎㅎ.


- 안방 침대에서 창문을 통해 바라다 보이는 절의 모습. 왼쪽 끝에 걸려있는 처마가 대웅전 건물이다.


- 집옆 도로 건너 건천에 흐르는 개울.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 않다가 한라산에 비가 오면 천을 이뤄 흐른다.


- 지난 주에 내린 비로 흐르는 물의 양이 꽤 된다. 한라산 진달래 밭에 500미리가 넘게 내렸다고 한다.


- 지난 주 비가 오고 갠 하늘에 무지개가 걸렸다.


- 제주에서 보는 달팽이는 크기도 하다. 지난 토요일 아침에 산책을 나갔다가 만났다.


- 새끼 뱀이 이른 아침에 나왔다가 인기척에 놀라 열심히 도망가고 있다. 다음날 아침에 이 뱀은 비슷한 장소에서 죽어 있었다.


- 주먹 만한 크기로 자란 밀감. 희뜩희뜩한 부분은 농약의 흔적이다.


-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말들. 식용으로 키우는 말들로, 고기는 식용, 가죽은 가공용, 뼈는 약재로 쓰인다.


- 산책 중에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본 마을의 모습.


- 계절을 알리는 밤송이가 영글어 간다. 이번 태풍에 많이 떨어졌을 거다.


- 집에서 몇 분만 나가면 이런 길을 만난다.


- 동백열매가 탐스럽게 열렸다. 옛날에는 저 열매에서 기름을 짜, 처녀들이 머리에 발랐다지?


- 태풍이 지나간 어제 집옆 건천에 물이 흐른다. 커다란 나무 밑둥이 바위에 얹힌 것을 보니 밤에는 많은 물이 흘렀던 모양이다.


- 이사올 때부터 공사중이었던 집 주변 도로가 드디어 완성되었다. 이 새로난 4차선이 제주대학과 516도로를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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