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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나은 세상을 위하여

진실 바라보기 (6)

(2012년 7월 20일)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내가 아는 한국에는 비정규직이나 정리해고 제도가 없었다. 귀국하고 나서 보니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는 연일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고 나라 전체를 시끄럽게 했다. YS의 문민정부시절에 국회를 통과한 이 두 제도가 실제로 시행된 것은 IMF 이후, DJ 정부였다고 한다. IMF 극복이 최우선 과제이었던 국민의 정부는 모든 규제를 풀고, IMF 극복에만 올인했던 모양이다.


국회는 통과했으나 시민단체와 노조의 반대 등 여론에 밀려 시행되지 못했던 이 제도는, IMF라는 유사이래 초유의 사태를 맞아 모든 반대는 무시되었고, 이 법의 입법화 조차 반대했을 것 같은 DJ에 의해 시행된 것은 아이러니 하다.


현재 이 두 법은 철저히 자본에 의해, 자본을 위한 제도로 활용되고 있다. 많은 국민들이 일용직이라는 비정규직 저임금으로 착취당하고 있고, 근로자로서 아무런 제도적인 보호를 받지 못한다. 사회 안전망이 아직은 많이 부족한 나라에서 정리해고로 쫓겨난 근로자들 대부분이 고통스런 삶을 영위하다가 자살로 마감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쌍둥이 딸내미 중 하나는 금년 초까지 비정규직이었다. 미국에서는 컨설턴트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불린다. 세 아이 중에 그 아이를 가장 걱정했었는데, 피치못할 사정으로 나와 떨어져 살던 아이는 걱정했던 대로, 학교를 때려 치우고 한인 식당에서 웨이츄리스로 일하고 있었다. 그 아이를 설득하여 내가 다니던 회사에 취직 시켰고, 나도 열심히 가르쳤지만 아이도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고, 잘 적응해 나갔었다. 내가 레이오프된 후에도 아이는 성실한 직장생활로 승진도 하고 급여도 올랐으며, 가끔 내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었는데 결국 돈 많이 주는 다른 회사로 옮겼고 비정규직이 되었다.


의료보험도 없고, 휴가도 승진도 없는 컨설턴트지만 연봉은 8만불을 받았다. 5만 몇 천불 받던 먼저 회사보다 일도 쉽고 스트레스도 덜 받는다고 했다. 즉, 베네핏은 없지만 그 보상을 돈으로 받는 것이다. 물론 회사는 회사대로 언제든지 일이 없어지면 내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아이에게 어떡하든 퍼머넌트 잡을 찾으라고 수시로 이야기 했고, 결국 금년 초 다른 제약회사에 정식으로 입사했다. 자기가 연봉협상을 잘못해서 7만불로 줄었다고 투덜거리는 아이에게, 그래도 모든 베네핏이 있으니까 훨씬 좋은 결정이라고 달랬다. 작년 아들이 방문할 때, 같이 오겠다는 것을 내가 말렸었다. 시간당 40불만 계산해도 일주일에 $1,600불, 2주면 $3,200불을 포기해야 하는데 뭐하러 오느냐, 나중에 레귤러 잡을 가졌을 때 휴가를 받아서 오라는 것이 이유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2학년에 다니다 중퇴한 그 아이는 회사를 다니면서 제약회사에서 취급하는 전자문서(Electronic Document)를 다루는 전문가가 되었고, 지금은 다니다 만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섬머스쿨과 야간에 학교를 다니는 두 가지일을 하며 자기 인생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 가족 피크닉을 갔을 때, 그 아이가 옥수수를 굽고 있다. 요즘은 회사에 학교에 정신없이 생활하느라 남자를 사귈 시간도 없다고 한다. 5불 짜리 립스틱 사는 것도 망설일 정도로 씀씀이가 매섭다. 어떤 놈이 데려갈지, 복 받은 놈이 분명하다. ㅎㅎㅎ


- Duke, I cannot open my email and also connect to company network. What happen?


회사에 다닐 때, 유럽에 있는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에릭이라는 프랑스인 세일즈맨이었는데, 그 날 아침 부사장의 지시로 그 친구의 네트워크 접속을 차단(Disable)시켜 놓았던 터였다. 해고의 첫 수순으로 IT의 헤드였던 내가 하는 일이었다. 나는 지시받은 대로 했을 뿐이라고 사실대로 이야기 했지만, 그 친구는 누구로부터 언제 지시를 받았는지 꼬치꼬치 캐물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회사가 무척 곤욕을 치렀다고 했다. 그 친구는 프랑스에서 부당해고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회사에서는 그 친구의 정리해고가 타당했었다는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 피곤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20여명 정도 되는 회사에서 IT 일을 하는 유일한 직원으로 이민생활을 시작했었다. 나중에 직원이 한 명 더 생기면서 매니저가 되었고, 회사 직원이 300명 정도가 될 정도로 커졌을 때는 시니어 매니저를 거쳐 디렉터가 되어 있었다. 부하직원들이 잘 한 것은 말로만 립서비스 했지만, 지각이나 실수 등 잘못 한 것들은 육하원칙에 입각한 기록으로 남겼다. 언제 있을지 모를 정리해고를 위해서였다. 선호도(Favoritism)에 의해 해고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능력으로 해고하는 것임을 기록으로 남겨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서는 정리해고를 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잘 모른다. 다만, 그런 룰이 잘 지켜지길 바랄 뿐이다. 미국에서 딸의 예를 들었지만, 비정규직은 같은 일을 하는 정규직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아야 한다. 그게 공평하다. 휴가, 보험, 승진, 복지 같은 아무런 혜택이 없는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보수까지 낮다면 그건 불합리하다. 정리해고도 투명한 절차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회사를 비판했다고 해서, 노동조합에 참여했다고 해서 선별된다면, 자본에 의한 심각한 인권유린일 뿐이고 커다란 사회적 고통을 치루게 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시킬 수는 없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부동산 침체와 하우스 푸어


한국은 요즘 떨어지는 부동산 값 때문에 난리다. 정부수립 이후 오르기만 했던 부동산 가격인데, 처음 겪어보는 사태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부동산 전문가도 아니고, 특히 재테크에는 깡통이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80년대 초반 월급이 30여 만원 시절에 살던 대지 20평 단독주택이 하도 초라해 부모님을 꼬드겨 대지가 68평에 2층집을 사서 이사했다. 총 3,850만원이 들었는데, 살던 집에서 천만원, 이층 전세 8백만원, 융자 천만원, 새마을 금고 5백만원 등을 포함해 겨우 마련할 수 있었다. 융자를 갚느라고 몇 년 동안 허리가 휘었었다. (이 집은 모친이 친정조카인 목사가 교회 짓는데 필요한 2억을 빌리는 은행담보로 제공했다가 결국은 날리게 되고, 그 충격으로 모친이 돌아가시는 계기가 된다.)


월급 실수령액이 30만원도 안 되는데, 매월 납부해야 할 할부금이 ₩341,000 이었다. 3개월 마다 나오는 보너스와 해마다 인상되는 월급이 해법이었다. 그 집은 과장승진 후 지방으로 가면서 부모님 차지가 되었지만, 2년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한심했다. 경제적으로 피곤하고 어려운 생활을 거쳐 분당에 LG 아파트에 당첨이 되었을 때는 꿈꾸는 기분이었다. 7천 만원에 분양받은 그 아파트를 4~5년 후, 한국을 떠나면서 팔았을 때 2억 천만원을 받았으니 세 배가 된 셈이다. IMF 때, 1억 3~4천까지 떨어졌던 그 아파트가 2006년에는 6억 5천까지 하다가 지금은 5억 이하로 시세가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집을 샀다. 비즈니스 하는 것도 아니고 봉급쟁이는 집을 사는 것이 유리하다는 충고를 접수한 탓이다. 1998년 26만불에 샀던 그 집을 5~6년 후에 46만불에 팔았다. 캘리포니아, 아리조나, 플로리다, 네바다 같이 버블이 심했던 지역은 아니었지만, 팔고 나서도 꽤 올랐던 그 지역은 지금 다시 그 정도 가격인 것으로 보인다. (www.weichert.com를 참조했다.)


- 뉴저지 덴빌에서 내가 살았던 집. 3 베드, 3 배스, 2 카 게러지에 바이레벨로 0.44 에이커의 컬데섹 집이었다. 집 뒤로 펜스가 쳐졌고, 2층에 덱이 풀 사이즈로 있었다.


오를 땐, 2~300 프로를 넘어 천 프로에 가깝게 오르던 집이 겨우 1~20 프로 내린다고 온통 난리다. 개포동의 열 몇 평(400 스퀘어 피트)짜리 주공아파트가 십억(백만불)이고, 윗층에서 소변보는 소리는 물론이고 부부생활 소리까지 들린다는 날림 아파트의 대명사 대치동 한보아파트도 십억을 넘었던 게 요즘 7억대에 경매가 되었다고, 부동산이 폭락하고 있다고 큰 일이 난 것 처럼 톱뉴스에 오르내린다.



내가 아는 한국에는 모게지 제도가 없었다. DJ시절 IMF를 극복하기 위해 부동산에 대한 모든 규제를 풀고, 부동산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모게지 제도를 도입한 모양이다. 그러나 한국의 모게지는 내가 아는 모게지와 너무 틀렸다.


- 대부분 모게지라는 것이 원리금을 함께 값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싯점까지는 이자만 낸다. 아파트 값은 무조건 오르니 모두들 집을 사라고 무책임한 장려를 한 셈이다.


- 깡통주택(언더워터)이 되어, 채무자가 집을 포기해서 차압을 당해도 그 집이 경매로 원리금을 충당하지 못하면 그 차액은 여전히 채무로 남는다. 은행 즉, 자본은 이론상 손해볼 일이 없고, 힘없는 개인은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노무현씨의 참여정부 최대 실정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는다. 그가 치솟는 부동산 가격을 잡기 위해 DJ 정부에서 풀린 규제를 잡기 위한 정책을 펼 때 마다, 시장은 정부를 비웃듯 요동을 쳤고 집없는 서민들은 아우성을 쳤다. 2006년에는 급기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미친 부동산에 대해 국민들에게 외쳤다. 지금 부동산을 사는 국민은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될 거라고.


그가 당시 진실을 이야기했는지 악에 받혀 악담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현실이 그렇게 진행이 되고 말았다. 자본의 농간에 휘둘려 막판에 집을 산 사람들은 약간 떨어진 부동산 가격에도 크게 타격을 받고 있다. 지금이라도 처분하여 이자를 줄여야 함에도, 본전이 생각나서 손절매를 못하는 사람들이 이러지 저러지도 못하여 하우스 푸어로 전락하고 있다. 잃은 본전이 아까워 도박판을 기웃거리는 전형적인 도박꾼들의 습성을 닮았다.


1조 달러(천조 원)에 이르는 가계대출이 한국경제를 옭죄고 있다. 400조 원에 가까운 돈이 주택담보대출이고 600조 원이 넘는 돈이 자영업자 및 생활대출이라고 뉴스는 전한다. 한국형 서브 프라임 모게지로 인한 시한폭탄이 터질 시간이 가까웠음을 경제에 문외한인 나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후기>

일 년에 두 번 내는 재산세가 5만 몇 천원이 나왔습니다. 두 번 낸다고 하더라도 1000cc 짜리 경차보다 세금이 쌉니다. 미국에서는 이 비슷한 콘도도 3천불이 넘었습니다. 자동차는 차 크기에 상관없이 면허세로 60불 정도 냈던 기억이 있구요. 집 가지고 살아본 사람들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미국제도가 다 옳다고는 할 수 없어도, 한국의 부동산이 왜곡될 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 노무현씨가 종합 부동산세를 만들려고 그렇게 애를 썼어도 결국 자본가인 부동산 부자들에 의해 극심한 저항을 받았었지요.


양쪽의 세상에서 살아보았기 때문이겠지만, 어떤 문제들은 그 모순점이 너무 확실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좋은 점도 많지만, 부조리나 비합리적인 것도 많이 보이고. 하나 확실한 것은 많은 부분이 미국을 닮아 있다는 겁니다. 특히 자본에게 이로운 것만 도입했다는 것이 눈에 많이 띱니다. 재벌가들의 자제들은 거의 미국에서 공부했고, 그들이 돌아와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만 미국의 것을 베끼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제가 경험한 사실들만 엮어서 무엇이 문제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게지 사태와 비교해도 한국의 부동산은 너무 정상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한국의 비정규직도 같은 일을 하는 정규직보다 더 많은 보수를 주도록 법제회 되어야 합니다. 정리해고 문제도 기업편에서만 보면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잘 나갈 때의 열매는 기업이 가져가고, 어려울 때 고통은 노동자에게만 떠 넘기는 자본의 불공정(unfair)을 좌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유럽의 프랑스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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