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하여

진실 바라보기 (5)

(2012년 7월 15일)

 

박사학위의 진실


아침에 LA 공항에 데려다 준 이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 장 부장님, 제가 난감하게 되었어요.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그만 비행기를 놓쳐 버렸어요. 솔트레이크가 한 시간이 빠른 것을 모르고 스타벅스에서 마누라와 커피 마시며 노닥거리다가 그만 비행기를 놓쳐 버렸지 뭡니까? 영어를 못하니 항공사 직원이 뭐라 카는데 뭔 소린지도 모르겠고. 여기 항공사 직원을 바꿔 줄 테니, 이야기 좀 해주세요. 짐을 제대로 찾을 수 있는지와 다른 항공사라도 관계없으니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면 시애틀에 몇 시에 도착할 수 있는지만 물어봐 주시면 됩니다. 돈은 상관하지 마시고예.


이 부장은 내가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내가 있었던 자리에 현직으로 있는 인물이었다. 옛날 직장에 있을 때, 밑에서 일하던 과장이 독립해서 회사를 차렸는데 그 친구의 전화부탁으로 이 부장의 LA 방문 때, 며칠 편의를 봐주었었다.


- 장형, 이OO가 미국 시애틀에 출장을 가는데, LA에 들리겠데요. 리버사이드 무슨 칼리지에서 딸래미가 어학연수를 하는데 미국에 들리는 김에 만나겠다는 거지. 한국은 추석이니까 연휴를 이용해서 들리는 가봐. LA에 사는 내 동생이 지금 거기에 없으니, 장형에게 부탁할 수 밖에 없어요. 걔가 내 상전 아니유?


이 부장은 안면이 있는 친구였다. 모회사 본사 과장 시절에 그는 대구 사업소의 직원이었고, 출장 가서 두어 번 본 적이 있었다. 내가 부탁 받은 것은, 공항에서 픽업해서 렌트카를 빌려주라는 것과 LA를 떠날 때, 공항까지 라이드를 주라는 것, 두 가지였다.


2009년 9월의 어느 날, 약속한 대로 아침에 공항에 나갔고 이 부장 부부를 맞이했다. 델타항공을 타고 왔는데, 싼 비행기 표를 구하느라고 시애틀에 갈 때는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트랜짓을 한다고 했다. 그가 전해주는 명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XXX 사업팀장 공학박사 이 OO


그 당시에 나는 건낼 명함도 없었지만, '공학박사'라는 큼직한 타이틀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회사는 시험으로 과장승진을 했다. 시험과목은 상식(사규), 영어, 전공학술, 전공실무 그리고 논문이었다. 나는 세 번째 시험에 패스해서 승진을 했지만, 열 번 이상 떨어진 사람들도 부지기수로 있었다. 그 승진시험에도 붙지 못한 친구가 공부해서 공학박사라는 게 신기했다.


◎ 이 부장님 보니까, 박사님이시네요. 어디서 공부하셨어요?


- 공부는요? 그냥 적당히 땃어요, 하하하


절친 중의 하나가 자기 모교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 그는 일본 게이요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에서 교수자리가 없자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의 왕립 과학기술대(Imperial College of Science and Technology)에서 연구직으로 종사하는 바람에 상당히 늦은 결혼을 했는데 그 부인이 띠동갑으로 의사다.


그 친구가 교수로 가기 전에, 대한민국 연구소가 대부분 모여있는 대덕의 모 연구소에서 실장을 할 때 그 부인은 부근의 종합병원에서 일하면서 근처 국립대학에 박사과정을 등록했다. 그 때 들은 이야기다.


- 쌍둥이 아빠, 지도교수를 인터뷰하는데, 이러는 거에요. 논문은 자네가 직접 쓸 건가? 하고 묻는 거에요, 참 내.


◎ 아니 그걸 왜 묻지요? 자기가 대신 써 주겠다는 건가요?


- 내 생각에는 현역의사들은 대부분 바쁘잖아요. 그러니 대부분 등록만 하고 학교에는 별로 나오지 않고, 논문도 적당히 대필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논문 대필료가 얼마며 얼마를 준비할 수 있는지, 뭐 그런거 이야기하려고 그러는 것 아니겠어요!


또 다른 기억


20여 년 전, 사업부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비자금을 만들어 영업한답시고 술 마시고 다닐 때 이야기다. 보통 부탁할 사람을 만나 접대하는 것도 순서가 있다. 강남의 고급 일식집에서 점잔을 떨며 폼나게 1차를 한 후, 단골 룸살롱으로 자리를 옮겨 지저분하게 2차를 하곤 했다. 1차로 들린 일식집에서 졸업 후 처음으로 대학 써클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그가 전해준 명함에는 '공인회계사'와 박사가 들어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다음날 한가한 시간을 찾아 친구에게 일부러 전화를 했다.


◎ 야, 너도 박사냐? 이건 씨X, 개나 소나 다 박사야! 박사학위 없는 놈 어디 명함 하나 제대로 들고 다니겠냐?


학창시절, 되먹지 않은 연극을 한답시고 줄창 어울렸던 기억을 되살리며 걸죽하게 시작한 내 입담에, 비슷한 농도의 입담으로 대응하는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한 달에 한 번, 지도교수에게 골프접대하고, 두어 달에 한 번 룸살롱에 데려가고, 일 년에 한 번 정도 해외여행 시켜주면 박사학위를 받는다는 거다.


- 야, 임마! 너는 편하게 직장에 다니니까 이런 거 없어도 잘 사는 거야, 새꺄. 나처럼 강남에 사무실 차려놓고 먹고 살려면 명함에 이런 게 필요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이런 거 좋아하는 골빈 놈들이 많다니까! 그런 놈들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는 거지, 내가 학교 다니면서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냐, 새꺄!


<후기>

저는 진실의 힘을 믿습니다. 미국이나 한국, 아니 이 세상 모두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진실이 밑거름이 되어야만 합니다. 자랑스러운 것만이 진실일 수는 없습니다. 부끄럽고 창피한 일도 진실로 밝혀지고 받아들여져야만이 올바른 방향으로 세상을 이끌 수 있다고 믿는 거지요.


오늘 아침 채널을 돌리다가 'jTBC'라는 종편에서 박지성 이원희 석박사논문에 관한 시사방송을 보았습니다. 한국의 축구영웅 박지성 군이 자신의 장래를 위해 명지대에서 학위를 하고 있는데 그 논문이 표절이지만, 박지성 군이 국가에 기여한 바가 크고, 또 세계적인 유명인이니 그 정도의 표절은 관행으로 얼마든지 눈 감아줄 수 있다는 식으로 지도교수가 대답하고 있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유도선수인 이원희 용인대 교수가 제출한 논문도 완전한 표절로 밝혀졌고.


몇 달 전, 문대성이라는 국회의원 후보의 논문표절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오자까지도 그대로 베껴서 '문도리코(복사기)'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얻고 새누리당에서 쫓겨났어도, 끝내 국회의원직은 고수하더군요. 아테네 올림픽에서 극적인 승리로 국민의 영웅이 된 친구라고 하는데, 그는 끝까지 표절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는 문제라는 거지요.


저는 박지성이나 이원희, 문대성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석사, 박사를 취득하는 사실을 덮고 숨기기에 급급한 이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거지요. 즉, 진실을 감추려고 한다는 겁니다. 다 까발려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석사나 박사학위를 줄 수 있고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런 대학은 어디고 안 그런 대학은 어딘지. 그리고 그게 문제가 있다고 국민이 공감하면 고쳐 나가면 됩니다.


대학시절에도 전공은 대부분 원서로 공부했습니다. 공항에서 간단한 영어 하나 구사하지 못해서 친하지도 않은 제게 전화로 부탁하는 공학박사를 어떻게 인정해야 할까요? 왜 그 창피한 부탁을, 리버사이드에서 어학공부하는 자기 딸에게 하지 않았는지 지금도 궁금입니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와세다나 게이오 같은 학교에서 문학박사나 이학박사는 많아야 일 년에 10~20명 정도 배출된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대학마다 매년 5~60명씩 쏟아진다고 하더군요.


참, 박지성, 이원희나 문대성같은 한국 체육계 인사들이 거명되었지만, 한국 체육계가 다 이런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 친척 어른을 아래에 소개합니다. 제 할머니 막내 여동생의 남편 되시는 분이니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선친의 이모부로 유일한 남한 친척이었던 분으로,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에 실린 글을 아래에 옮겼습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저서 '태권도'를 보면 이 분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도올이 아는 한, 한자에 가장 박식한 분이셨다고 합니다.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B098D604C131B1916X0
유천(流川)
생년 1916
졸년 1990
시대 대한민국
본관 나주(羅州)
활동분야 예술‧체육 > 체육

[상세내용]

나현성(羅絢成)에 대하여
1916년∼1990년. 체육학자. 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유천(流川)평안남도 대동 출생.

1938년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光成高等普通學校)를 거쳐, 1940년 경성사범학교 연습과를 졸업하였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육상선수로 활약하였다.

광성고등보통학교 재학 때인 1936년에 제3회 전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저장애(低障碍)와 높이뛰기 우승, 세단뛰기 2위, 1937년 제4회 전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고장애와 세단뛰기 우승, 높이뛰기 2위, 그리고 1937년 제3회 전조선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는 세단뛰기에 우승하는 등 광성고등보통학교의 전국제패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경성사범학교 재학중이던 1939년에는 제25회 전일본중등학교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가하여 높이뛰기와 세단뛰기 우승, 고장애 2위, 멀리뛰기 5위 등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한민족의 우수성을 자랑하였다.

1940년 3월부터 경상북도의 예안심상소학교(禮安尋常小學校)를 시작으로 평양 서성공립국민학교와 신양공립국민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광복 후인 1946년 8월, 30세의 나이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학과에 입학하여 1950년에 졸업한 뒤 선린상업고등학교(善隣商業高等學校) 교사를 거쳐, 1953년부터 서울대학교에서 체육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81년 8월에 정년퇴임한 뒤에도 명예교수로 평생을 학문연구와 육상경기 발전, 그리고 체육지도자 양성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1974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체육사연구〉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아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체육인의 대표적인 인물로 불렸다.

1962년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개최된 제4회 아시아경기대회에 육상코치로 참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 기술지도위원회 및 선수강화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육상경기 발전에 기여하였고, 대한체육회 선수강화위원회 및 훈련평가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학자로서 우리나라 체육사의 정립에도 심혈을 기울인 결과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다.

저서로는 1958년에 출간된 《한국스포츠사》를 비롯하여 《한국체육사》 (1963)‧《육상경기》(1968)‧《한국학교체육제도사》 (1970)‧《세계체육사개론》 (1976)‧《유천논설집》 (1976) 등이 있으며, 대표적인 논문으로는 〈한국 수박(手搏)‧유도(柔道)에 대한 사적 고찰〉(1961)‧〈훈련도감 설치연대에 대한 소고〉(1962)‧〈한국축국‧격구고(韓國蹴鞠‧擊毬攷)〉(1969)‧〈한국각저고(韓國角觝攷)〉(1972) 등이 있다.

이러한 연구업적으로 1967년 대한민국 체육상(연구부문)을 받았다. 그밖에 중화민국체육학회 고문, 국제보건체육학회(ICHPER)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등 우리나라 체육을 해외에 홍보하는 데 기여하였다.

체육교육분야에서는 문교부(현 교육부)장학위원회 위원, 교원자격심사위원회 위원, 교육과정심의위원회 위원 등을 맡아보면서 우리나라 체육교육의 목표설정과 방향정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공적으로 정부로부터 1963년에 문화포장, 1981년에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대한체육회50년(대한체육회, 1970)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실 바라보기 (7)  (0) 2013.11.15
진실 바라보기 (6)  (0) 2013.11.09
진실 바라보기 (4)  (0) 2013.11.09
진실 바라보기 (3)  (0) 2013.11.09
진실 바라보기 (2)  (0) 2013.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