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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나은 세상을 위하여

진실 바라보기 (2)

(2012년 5월 11일)

 

인류사회의 변화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될까?


편의상 간편하게 3,200년으로 추산해 보면, 인류는 3천년 동안 농경사회를 이루고 대가족 중심으로 살아왔다. 할아버지의 절대권위 밑에서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 고모와 삼촌 등 가까운 친인척들이 한 울타리나 한 동네에 거주하면서 희노애락을 같이 했다. 소위 1차산업인 농경과 목축이 주산업인 사회다.


인간이 기계의 힘을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James Watt가 증기기관을 발명한 1776년부터이다. 즉 3천년 동안 길들여진 생활에 변화가 왔고, 산업혁명으로 접어든 것이다. 과학과 동력의 힘을 빌려 대량생산이 이루어지고 도시가 급속히 생기기 시작했다.


앨빈 토플러가 말하는 정보화 혁명, 즉 제3의 물결 출발점을 관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나는 1951년으로 간주한다. 세계최초의 현대식 개념의 컴퓨터 ENIAC(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And Computer)은 1946년에 완성되었지만, 상업적인 목적의 컴퓨터는 1951년에 최초로 상품화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3천년의 농경·목축사회와 200년도 채 안 되는 산업화사회를 거쳐, 후기 산업화 사회, 즉 정보화사회에서 살게 된 것은 60년 정도 밖에 안 되지만, 그 60년 동안 인류가 겪은 변화가 그 전 3,200년 보다도 몇 배나 크다고 한다.


한국사회의 변화


- 얘야, 미래에는 쌀만 집어넣으면 밥이 되는 세상이 온단다! 아이고 무서라, 그런 시상이 오면 어쩐다냐? 시상이 절단나는 것 아니냐? 그런 시상이 오긴 올까?


불과 40여년 전, 충청도 부여출신인 어머니가 사투리를 섞어 학생이던 내게 했던 말이다.


1970년대 중반, 당시 4장 뿐이었던 신문의 3면에는 '해외토픽'이라는 고정란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읽었던 글을 기억에서 꺼내 본다.


- 일본의 소니와 미국의 가전업계에서는 소리뿐 아니라 TV 화면 같은 영상까지도 테잎에 녹화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앞으로 수년 내에 사람들은 보고 싶은 TV방송을 재방송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VTR이라는 기계에 녹화했다가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시대가 온다.


백년 전, 이백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3~40년 전에 있었던, 내 또래의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논픽션이다.


내 어릴 때 기억에 의하면, 어머니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하루종일 부엌에서 사셨다. 새벽에 일어나 쌀을 씻고 밥을 지었고, 밥이 되는 동안에 자식들 먹일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었고 도시락을 준비했다. 아침이 끝나면 설거지에 청소에, 빨래를 해야 했고, 점심 후에는 시장에 다녀오고 바로 저녁준비를 해야 했었다.


엄마가 부엌에서 하루일과를 끝내고 단간방으로 들어오는 시간이 언제쯤이었을까?


다이얼을 잘 돌려서 주파수를 정확히 맞추지 않으면 잡음이 지직대는 진공관 라디오에서 그 분의 유일한 낙이었던 연속극 '강화도령'을 할 때쯤이던 저녁 8시 이후이었던 것 같다. 그것도 그냥 듣지 않으셨다. 뜨게질이라도 하면서, 혹은 구멍난 양말이나 빤스를 꿰매면서.


기억 속의 엄마 모습이고 한국여인의 모습이다. 많은 내 또래가 기억하고 있드시.


다시 말한다, 백년 전, 이백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다. 50년도 안 된 이야기다. 대부분 까맣게 잊고 살지만.


내가 태어난 나라,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보자.

5천 년 유구한 역사 속에, 그 대부분을 1차산업으로 생계를 이어왔지만, 산업화 사회로의 진입을 굳이 해석한다면, 해방이후나 한국전쟁이후, 혹은 박정희 독재정권이 추진한 경제개발계획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어떻게 보던 거기서 거기다.


한국에서의 정보화 사회로의 진입은 산업화 사회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우리의 위대한 조국은 인류의 문명을 주도한 선진국에서 경험한 절차나 순서를 생략하거나 단축해가며 발전해 왔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산업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겪었던 아동학대, 노동착취, 여성차별 등 1~2 백년에 걸쳐 숱하게 양산했던 문제와 혼란들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겪고 극복해 냈다.


후진국 국가들이 통과의례 처럼 경험하는 군사 쿠데타나 군부독재도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는 30년도 채 안 되는 비교적 단시간에 치루고 넘어갔다. 물론 그 과정에는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지만, 어떤 한 두 사람의 힘이 아니라 위대한 민족의 힘이요, 똑똑한 두뇌를 가진 국민의 힘이다.


우리 세대의 변화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고, 전후 폐허에서 특별한 오락거리가 없는 우리 부모님들이 열심히 밤문화(?)를 즐긴 탓에 1년 후부터 태어난 세대를 베이비 부머라고 한다. 즉 1954년에서 산아제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3년까지 태어난 우리들이다.


이 세대들은 별명이 많다.

쉰(50대라는 뜻이나 '쉬어버린' 사람들이라는 의미) 세대, 낀 세대, 주산을 배웠던 마지막 세대, 컴퓨터를 배워야 했던 첫 세대, 부모를 모신 마지막 세대, 자식을 떠받들며 산 첫 세대라고도 한다. 100명이 넘는 콩나물 교실에서 공부하며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국민학교 때부터 입시전쟁을 치르기도 했고, 구멍난 내복을 뒤집어, 백열전구 밑에서 '이'를 잡기도 했었다. 학교에서 받은 회충약을 먹고 싼 똥에서 희멀겋게 꿈틀거리던 회충을 본 기억도 있는 세대다.


골목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딱지치기, 구슬치기, 잣치기, 말뚝박기, 술래잡기를 하며 놀았다. 잘 때는 씹던 껌을 벽에 붙여놓고 잤다가 아침에 떼어 벽지까지 같이 씹었다. 예닐곱살부터 아버지 막걸리 심부름, 담배 심부름, 동생 돌보기는 내 차지였고, 방바닥 쓸고 닦기, 이부자리 깔기도 내 차지였다. 아, 그만하자. 끝도 없지만 눈물이 날려고 한다.


직장생활에서는 어땠지? 위로는 능력에 관계없이 연수만 차면 3~4년 마다 대리로, 과장으로, 부장으로 승진한 선배들에 치여 만년 대리나 과장으로 살아햐 했지만, 'X으로 밤송이를 까라면 까'라는 무식한 말이 통했던 시대에 말단을 지냈다가,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는 인텔리라는 자부심 때문에 선배들 처럼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었다.


그래도 한 때는 자부심이라는 게 있긴 있었다. 


- 난 한눈 팔지 않고 세상을 열심히 살았고,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니까 너희들에게 그 노우하우를 전수시켜 나처럼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잘 살게 해주겠어! 이놈들아, 나같은 아빠 둔 걸 행운으로 알아! 내가 너희들 앞길은 책임져 줄게! 사랑한다, 내 새끼들아.


<후기>

글도 길어졌지만, 출근(?)채비를 해야 할 시간이 되어 여기서 줄입니다.


세상은 변하는데, 변해도 아주 빠르게 변하는데, 변하지 않는 것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내 자신.


그렇다고 다들 인정하는데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딱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내 자신.


한 때 친구들이 전부인줄 알고 친구들과 한참 어울릴 때 그들과 어울리며 자주 듣기도 하고 하기도 한 말이 있었습니다.

 

- 아, X팔, 우리 꼰데가 오늘 또 헛소리를 하는 거야. 집에 가면 뭐하냐, 꼰데에게 잔소리나 듣지.

어느날 갑자기 그 꼰데가 바로 '나'인 것을 깨닫습니다.


작년에 아들이 왔을 때도, 금년에 딸이 방문했을 때도 가장 많이 했던 말입니다.

- 아빠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세상이 변했고 또 지금도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변해야 합니다. 생존을 위해서 생각과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제 이 세상의 주인공은 바뀌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자식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입니다.

그들의 방식대로 살아가게 두는 것이,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도와주는 것이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글에서 써먹었던 싯귀를 다시 인용합니다.


미래는 주춤주춤 다가오고,

현재는 쏜살같이 지나간다.

그리고, 지나간 과거는 모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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