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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

룸메이트 이야기

(2012년 4월 18일)

 

- 아니, 장로님! 그냥 미국에 계시지 뭐가 그리 좋은 게 있다고 혼자 한국에서 외롭게 지내세요?


- 아냐, 미스터 장. 나는 이곳이 좋아요.


45년을 미국에서 사셨다고 한다. 75세이니 인생의 60%를 미국에서 사신 셈이지만, 철없는 어린아이 시절을 제외하면 살아오신 인생의 80% 이상을 미국에서 지내신 분이다. 안과 의사와 CPA인 따님 둘과 변호사인 아들을 두었는데, 특히 아들의 반대가 심하다고 한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갑자기 큰 일을 당하더라도, 법원출입 변호사인 아들이 바빠서 어떻게 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게 이유다. 사모님도 자식들 편이어서 한국행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땅끝호텔에 도착한 첫날, 모든 행사가 끝나고 방으로 들어와 씻고 인사를 나누었다.

룸메이트로 지내게 되었으니 잘 지내자며 명함을 주시는데, 나는 드릴 명함이 없었다.

눈이 내린듯 하얀 머리에 온화한 표정에서 삶의 연륜을 읽을 수 있었다. 룸메이트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 USC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는데, 1년 하다 보니까 못하겠더라구. 영어도 그렇고 못 따라가겠어. 그래서 때려치고 비즈니스를 시작했어. 하드웨어 스토어를 샀는데, 주인이 은퇴하는 일본인이야. 사고 싶다고 했더니 Do you have twenty thousand? 이러는 거야. 하드웨어는 마진이 50%야. 한 달 매출이 4만불인 가게거든. 그 땐 그랬어요. 60년대잖아! 그 후 이민자들이 몰려오면서 비즈니스 가격이 마구 오르더만.


- 힘들게 끝까지 공부해서 졸업한 친구들은 잘 되어봤자 교수잖아, 그렇지 않으면 월급쟁이고. 난 돈 많이 벌었거든. 다들 부러워했지. 그런데 돈을 벌게 되니까 욕심이 생기고 결국 욕심이 지나치고 말았어. 처음엔 조그만 상가를 샀어. 가게가 4개 짜리야. 돈은 계속 들어오지, 은행에서는 얼마든지 돈 빌려준다고 하지. 하하하, 욕심이 과했지. 큰 쇼핑센터를 사 버린거야. 그것도 두 개씩이나. 그 때 600만불의 사나이라는 TV 시리즈가 있었어. 내가 그랬어요. 너만 600만불의 사나이냐? 나도 600만불의 사나이다!


- 한 순간이더만. 추락하는 건. 다 날라갔어. 완전 빈털터리 된 거지. 가게들 문 닫지, 렌트 안 들어오지, 은행은 차압하겠다고 협박하지.


이야기에 빠진 내가 묻는다. 그게 몇 년도이었습니까?


- 79년에서 82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에요. 똥을 누면 새까만 염소 똥 같은 것이 몇 개 떨어지는 거야. 말 그대로 똥줄이 타는 거지. 죽고 싶더라고. 그 때부터 열심히 예수를 믿었어. 교회에 나가면서 하나님을 찾고 매달렸고,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자식들 스튜던트 론 없이 대학 졸업시킨 걸로 만족해요. 그러면 됐지, 뭐.


거기서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에고 난 아이들에게 스튜던트 론을 부담시켰는데......


- 경기도 양평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꼭 왕따 당하는 것 같아. 그만큼 주민들과 어울리기가 힘들어요. 엘리베이터 같은 곳에서 마주쳐도 서로 딴 데 보고 타게 돼. 그러니 내가 이곳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왔겠어요? 오면서 보니까 여기 좋더라구. 이런데서 살고 싶어요. 이런 곳에서 이민자들과 어울려 지내면 얼마나 좋겠어.


화제는 이곳에 온 목적으로 다시 돌아갔다. 이곳도 좋긴 하지만, 제 생각에는 너무 외집니다. 그래도 제주에는 가까운 곳에 대학병원이라도 있고, 서울까지 두 시간이면 충분하거든요. 비행기를 타야해서 그렇지만.


- 난, 제주는 싫어요. 대여섯번을 갔는데 한번도 재미가 없었어. 갈 때마다 바람불고 비오고. 뭔 바람이 그렇게 세. 차가 다 흔들리는 거야. 비행기 안 뜨고 배도 없고. 하여튼 난 제주는 싫어.


또 한 분의 룸메이트가 계셨다. 뉴욕에서 오신 분으로 춘천에서 거주하면서 춘천에 집을 짓고 있다고 한다. 그 분 때문에 화제가 한국국적 취득으로 바뀌었다.


- 내가 한국국적을 취득했어요. 지난 달 3월 14일에. 그랬더니 의료보험료가 확 주는 거야. 내가 8만 얼마씩 내고 있었는데, 한국국적을 취득하니까 2만원도 안 되게 나오더라구. 뭐가 잘못되었는지. 그래서 친구인 변호사에게 알아보라고 했더니, 재산이 없고 시골에서 살면 그렇게 나온다고 하더라고. 난 차도 없거든. 집이 있으니 재산은 있는데 이것들이 다 영어이름으로 등록이 되어 있어서 그런가?


- 국적을 취득할 때 인터뷰를 했어요. 외무부에서 27년 일했다는 친구가 인터뷰를 했는데, 재산이 얼마 있는지 묻더라고. 은행잔고도 묻고. 대답을 하면서 왜 묻냐고 했더니, 재산이 없으면 국적도 안 준다는 거야. 내 통장잔고를 그 자리에서 바로 확인해요. 그래서 알게 되었어요. 한국정부에서 왜 재미교포에게 이중국적을 허용하는지.


국회의원같은 고위층 친척들 때문에 허용했다고 들었는데요?


- 나도 그렇게 들은 적이 있는데, 아니라는 거야. 한국에서 빠져나가는 외화가 엄청나다고 해요. 유학간 자식들에게 하는 송금, 해외여행 경비 등등. 돈만 있으면 누구나 만불은 해외로 송금할 수 있으니까, 그 규모가 얼마나 되겠어. 그래서 정부에서 궁리한 것이 이중국적 허용이라는 거지. 오직 재미교포에게만 혜택을 준대요. 국적취득을 하게 되면 일련번호를 주는데 내가 몇 번째인지 알아요? 한번 추측해 보세요. 작년 1월 1일에 시작했으니까 얼마나 되겠어요?


......


- 이만 팔쳔 사번이에요, 내가. 28,004번이라니까. 생각해봐요. 그 사람들이 십만불씩만 가지고 들어온다고 생각해보라니까. 일년 좀 지났는데 벌써 쓰리 빌리언이 들어온 것 아니에요? 한국정부로서는 큰 외화수입이잖아요, 가만 앉아서. 즉, 정부의 고육지책으로 생긴 제도라는 겁니다.


- 미국정부에서도 이걸 알아요. 그래서 한국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고 해요. 한국국적을 회복한 시민권자의 은행계좌 정보를 요구했다는 거지. 그런데 한국정부에서 미쳤어요? 그걸 알려주게. 절대 안 알려준다는 겁니다. 최근 미국 IRS에서 외국에 있는 자산을 보고하라고 난리지만, 절대 보고할 필요가 없어요. 미국정부에서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까. 물론 시티뱅크나 미국에 영업망이 있는 우리은행같은 경우에는 미국에서 정보제공을 요구하면 안 들어줄 수 없겠지만, 다른 국내은행은 미국에서 요구한다해도 고객정보 보호차원에서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는 거지요. CPA 들이 IRS에서 시행하는 교육을 받고, 배운대로 사람들에게 그렇게 유도하는 것뿐이에요. 거기에 넘어간 사람들만 바보가 되고.


뉴욕과 캘리포니아, 처음 뵈었지만, 미국의 동부와 서부에서 오신 두 분 선배님들과 나누는 이야기는 공통 관심사가 많아 흥미진진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며칠 전보다 훨씬 짧아진 밤이 더 짧아지고 있었다.


<후기>

선배님이 하신 이야기들이 정확한 이야긴지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만, 고려한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서 잊어버리기 전에 옮겨보았습니다. 허락을 받고 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혹시라도 선배님께 누가 되는 이야기가 있을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만, 이해해주시겠지요.


선배님과 이야기하며 든 생각은 인간도 회귀본능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선배님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미국에서 더 많이 지내시긴 합니다만, 저라면 그렇게까지 하면서 한국에서 살고 싶을만큼 한국이 좋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회귀본능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회귀본능때문에 고생(?)하시는 이민 1세대 선배님들을 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 연민을 느낍니다.


어쨋거나 이런 이야기들을 저희같은 이민자끼리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듣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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