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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제주의 삶

선과장의 개는 귤을 먹는다.

(2011년 1월)

 

- 저 식당이 괜찮아요. 손님이 오면 데리고 가기 괜찮은 식당인데, 우리는 잘 안 오게 돼, 멀어서.

- 2, 30분이면 올 수 있지 않아요. 멀지는 않은 것 같은데.

 

제주시 5일장에 가는 길에 운전을 하는 동서는 조수석의 내게 이것저것을 이야기해주었다. 이곳은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 중의 하나인데, 가로수가 잣밤나무라는 등, 저쪽으로 가면 제주에서 유명한 계곡인데, 바위가 아주 멋있다는 등의 설명이 이어졌다. 잣밤나무는 밤이 잣만 하게 열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가로수로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이 구부러진 특이한 모습이지만 겨울에도 짙푸른 색의 나무는 좁은 도로와 잘 어울렸다. 동서가 가리키는 쪽에 갈색 원목으로 독특하게 지어진 입구가 보였는데 그 위로 △△음식점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 하하하, 동서. 여기에 살아봐. 이것도 멀게 느껴지니까. 서울에서는 먼 게 아니지만, 여기서는 이것도 먼 거라니까.

 

인간이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다. 하긴 동물뿐이 아니라 모든 생물은 환경에 적응한다. 그러나 적응을 가장 잘하는 존재는 아마 약삭빠른 인간일 것이다. 귀국 후에 중고차 시장을 며칠 다녔다. 미국에서 그렇게 작아 보이는 소나타가 마치 대형차처럼 커 보였다. 적응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1998년 무렵 회사건물청소를 하던 히스패닉 가족이 있었다. 남들이 퇴근하는 오후 5시 무렵 부인과 아들딸을 데리고 출근해서 자정 무렵까지 3개 층 사무실과 화장실 등을 청소하고 퇴근한다. 오버타임을 수시로 하던 때라 나와 동갑인 그가 늦은 시간에 내 사무실을 청소하기 위해 들리면 인사를 나누곤 했다.

 

어느 날 출근하는 그를 보니 낡고 찌그러진 트럭이 아닌 새 차로 바뀌어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소나타였다.

 

호세, 너 차 새로 샀더라.

 

- 응, 새 차를 갖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 망설였거든. 그런데 가진 돈으로 살 수 있는 차가 있어서 새로 샀다.

 

너, 이거 한국 차인 거 아니?

 

- 그래, 현다이가 일본차가 아니고 한국이라고?

 

한국에서는 중산층 이상이 타는 소나타를 청소부가 - 자동차에 대한 개념이 한국과는 틀리고, 또한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것도 아니며,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을 포함해 가족 모두가 일을 하니까 새 차를 사는 게 당연했지만, 미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내 눈에는 - 타고 다니는 미국에 사는 내 자신이 스스로 자랑스러웠고, 어려움은 있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도 이민은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2002년쯤의 일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인터넷에 블로그는 없었고 신문사에서 제공하는 토론마당이 있었는데, 한 신문사의 토론마당에서 미국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올린, 산돌(living stone)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어떤 이와 논쟁이 붙었다. 그때의 토론내용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의 주장은 인종차별과 죽을 때까지 노예처럼 일해서 세금내고 보험내고 지출하다 끝나는 미국은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인종차별 모르고 사는데 당신은 어디에 사느냐? 고 묻다가 서로 뉴저지 멀지않은 동네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본격적인 토론을 하기 위해 공원에서 그를 만났다.

 

유학생으로 미국에 와서 10년 이상 살았다는 산돌은 뉴저지 메디슨 근처에 있는 유명한 신학대에서 노동신학으로 신학박사를 취득한 분이었는데, 부인도 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여성신학으로 논문을 준비중인데 학위만 취득하면 여름에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한국의 어느 신학교에 전임강사 자리가 났다는 말도 덧붙였다.

 

5월의 어느 토요일, 모리스 카운티 어느 공원의 호젓한 호숫가에서 6시간인가 7시간 동안 긴 토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없었지만, 그의 생각을 이해는 할 수 있었는데 그가 마지막 덧붙인 말은 이랬다.

 

- 딸이 하나 있는데,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갔어요. 그 아이가 유일한 걱정이에요. 년 전에 한국에 데리고 갔었는데, 놀러 나간 아이가 울며 들어와서 하는 말이 자기를 부딪친 아이들이 ‘Excuse me'를 안 한다는 거예요. 아직 어리니까 잘 적응하겠지만, 지금은 걱정입니다.

 

- 선생처럼 부부가 월급 받고 일해서 세금내면서 사는 운 좋은 한국 분들이 얼마나 되겠어요. 대부분 한국 분들은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 미국에서 10년 넘게 살면서 안 해본 일이 없습니다. 한인들이 많이 하는 세탁소 어떤지 아세요. 한국에서처럼 깨끗한 빨래만 갖고 오는 게 아닙니다. 여자들 달거리 피까지 묻은 옷들도 들어옵니다. 그런 때 자국까지 일일이 들여다보며 꼼꼼히 챙겨야 하는 일이지요. 미국 사람들이 그런 일 하겠어요? 안 합니다.

 

지금은 어느 신학대에서 교수가 되어있을 산돌을 다시 만나면 사과하고 싶다. 그날 나를 만나러 오는 길에 들린 맥도널드에서 가벼운 접촉사고까지 있었으니. 그가 타고 왔던 토러스는 한국으로 가져간다고 했었는데.

 

나 같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도 평가한다. 너무 잘 적응해서 미국이 힘들다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98년 말 집값이 뛰기 시작할 때 집을 샀고, 몸 담았던 회사는 20여명의 작은 규모에서 사업이 잘 되는 바람에 100명이 넘는 회사로 커졌다. 연봉 4만 불로 빠듯했던 살림살이는 덩달아 샐러리가 오르면서 여유가 생겼다.

 

주말이면 산수 좋은 곳을 찾아 놀러 다니기 바빴고 일 년에 한번은 휴가를 내어 일주일씩 여행도 다녔다. 플로리다 올랜도, 캐나다 몬트리올, 버지니아 비치, 윌리엄스버그, 뉴햄프셔의 워싱턴 마운틴 같은 곳을 아이들과 함께 여행했다. 한국과 같은 교통체증도 없고,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자연을 즐겼다. 구역회 때는 덱에서 바비큐를 하고, 하프 에이커에 가까운 뒷마당에서 밤하늘의 흐드러진 별을 올려다보며 미국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외로운 행복감(?)’에 젖기도 했다. 모든 것이 내가 잘 나서 누리는 줄 알았다. 아니다. 단지 'Right Time, Right Place'에 있었을 뿐이다. 소위 운이 좋았던 것이다.

 

이름도 생소한 선과장이라는 곳이 있다. 동서가 아는 분이 운영하는 곳인데, 겨울철이면 사람 손이 부족해 쩔쩔맨다고 한다. 밤을 새워 일할 만큼 일이 많다는 거다. 귤을 크기대로 선별해서 박스에 담고 저울에 달아 일정한 무게로 포장을 하는 곳이다. 산더미처럼 쌓인 귤이 컨베이어를 타고 가면서 크기가 작은 순서대로 뚫린 구멍에 빠져서 같은 크기의 귤이 모이게 된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일꾼들은 조금이라도 상처가 있는 귤들을 사정없이 한 쪽으로 던졌다. 먹어도 될 만한 아까운 귤들이 무수히 버려지고 있었다. 혹시 나중에 일하게 될지 몰라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데, 한편에서 누군가 입구에 있는 개와 강아지들에게 버려진 귤들을 까서 던져 주었고 강아지들은 그걸 받아먹는 것이었다. 귤 먹는 개를 처음 보는 터라 신기하게 생각한 나는, ‘형님, 이 개들은 귤을 다 먹네요.’ 했더니, 동서가 허허 웃으며 말한다.

 

- 선과장의 개는 귤을 먹습니다요.

 

<후기>

한국이 좋으니 미국이 좋으니 하는 것은 무모한 논쟁입니다. 귤을 먹는 개가 있고 신 김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듯이 호불호의 개인취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신 김치에 돼지고기 숭숭 썰어 넣고 끓인 김치찌개가 그 어떤 비싼 음식보다도 더 맛있을 수도, 또 그런 음식이 간절히 생각날 때도 있습니다. 물론 신 김치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요.

 

인간이란 시간에 따라 변하는 함수입니다.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바위처럼 무한정 같은 모습으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물과 같은 존재 아닐까요?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을 바꿉니다. 흐르는 강물은 항상 변합니다. 같은 모습인 적이 없지요. 그게 인간 아닐까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옛 이야기를 꺼내며 고집을 꺾지 않는 것은 추한 모습 아닐까요?

 

제주 5일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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