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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제주의 삶

제주를 배운다

(2011년 2월)

 

미래는 주춤주춤 다가오고,

현재는 쏜살같이 지나간다.

그리고 지나간 과거는 항상 아름답다.

 

어디에서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고등학교 때부터 외우고 다니던 싯귀의 일부분이다.

 

방 한 칸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다. 겨울이면 창호지 미닫이 방향 윗목에 둔 걸레가 꽝꽝 얼었다. 방안에서도 입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왔고, 밤중에 오줌을 싸기 위해 요강 앞에 무릎을 꿇고 뚜껑을 열면 살얼음이 보이기도 했다. 모두들 잠든 한 밤에 잠든 동생들 발치에 자리 잡고, 저녁식사 때 사용했던 밥상 앞에 책상다리 하고 앉아 담요를 뒤집어 쓴 채 밤새 시험공부 하던 중학생 시절의 모습이 가끔 떠오른다.

 

‘아이고, 내 새끼! 이태까지 공부했어? 잠을 좀 자둬야 학교에 가지?’

 

새벽에 일어난 어머니가 얼른 부엌으로 가 날계란에 젓가락으로 구멍을 뚫어 건네곤 했다. 오래되어 스크래치가 많이 난 흑백영화를 보는 듯, 빛바랜 흑백 사진을 보는 듯, 아스라한 기억 저편에 있지만, 40년이 훨씬 지났어도 내게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요, 가슴 아린 추억이기도 하다.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때가 가끔은 그립기도 하고 행복했었다는 느낌에, 돌아갈 수만 있으면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조차 드는 것은 단지 과거이기 때문일까?

 

2월로 접어들면서 날씨가 많이 푹해졌다. 한낮의 기온은 50°F를 넘는다. 군데군데 패이고 깨어진 아스팔트가 시멘트 포장도로로 바뀌기도 하면서 구불구불 좁다랗게 이어져있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고 중앙선도 물론 없다. 이런 동네 길을 제주사람들은 ‘올레’라고 하는가 보다.

 

길 양 옆으로는 밀감나무가 즐비하고 비닐하우스도 보인다. 때로는 배추나 무를 심어놓은 채소밭들도 보인다. 어쩌다 한번 지나가는 차량과 마주치는 이런 길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새소리를 벗 삼아 걷는다. 옆에서 동무하는 집사람이 덥다며 두꺼운 점퍼를 벗어 허리에 잡아매면서 ‘햐, 좋다! 이 길 참 좋다!’고 후렴을 넣는다.

 

새로 건설된 듯 하천 위로 다리가 놓여있다. 말이 하천이지 계곡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만 있을 뿐 물은 없다. 이런 하천을 건천이라고 한다. 화산섬의 특성상 비가 오면 바로 땅속으로 스며들어 제주에는 물 흐르는 하천이 거의 없다고 한다. 장마나 태풍 같이 비가 아주 많이 올 때나 건천이 하천이 된다고 한다.

 

십 수 년 만에 한국에서 맞이하는 설이지만 찾아올 사람도 없고 찾아갈 곳도 특별히 있는 것은 아니다. 간단하게 차례를 지내고 동서 댁으로 향한다.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은 젊은 사람들이 선물 보따리를 들고 맞은편에서 온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눈에 익은 풍경이다.

 

떡국을 먹고 조카의 세배를 받고 설날에 어울리게 고스톱을 쳤다. 원고, 투고, ‘못 먹어도 고’를 외치며 피박과 광박을 쓰고, 씌우며 광을 팔고 누가 잘했느니 잘못했느니 떠들면서 지내는 게 이곳의 설 풍경이다. 잡채와 녹두지지미가 얹힌 술상도 곁들여서 이야기를 나눈다. 정오도 되기 전에 마시는 술이지만 설이라는 핑계로 ‘그만 마셔, 벌써 세 병째야!’라는 처형의 외침은 댓구없는 잔소리가 된다.

 

‘동서, 이게 원래 제주 날씨야. 동서가 재수가 없어서 제일 추울 때 왔어. 나도 여기 5년 넘게 살았지만 이렇게 추운 건 처음이야. 내가 거짓말 하는 거 아니야. 제주사람들은 난방 없이도 지낸다니까!’

 

이게 원래 제주의 날씨라고 한다. 한겨울에도 제주는 이렇게 포근하다는 거다. 지난 1월의 날씨는 수 십 년 만에 처음 보는 추위라고 한다.

 

깍두기가 사각사각하니 참 맛있다. 지나다가 수확이 끝난 무밭을 보고 차를 세운 후, 못생기거나 상처가 나서 상품가치가 없는 탓에 버려진 무를 주어다 담근 것이다. 집사람이 자기 언니와 열심히 줍더니 처형이 어느새 깍두기를 담갔다. 주어온 무가 너무 많아서 다 쓰지도 못했다고 하는 등, 두 자매는 마주 앉아 앞으로 펼쳐질 재미있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제 곧 날이 따뜻해지면 냉이, 달래, 고사리, 두릅나물을 캐러 다닌다고 무용담을 펼친다. 처형은 아홉 살 어린 동생에게 얼마든지 재미있게 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운다.

 

실로 15년 만에 대하는 설날 풍경이다.

 

이어지는 설날의 취중잡담을 통해 제주에 대해 들은 내용이다.

 

- 제사상에 카스테라와 같은 빵을 올려놓기도 하는데 흉이 아니다. 옛날에는 쌀이 없으니 빵이나 잡곡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 제사지내러 간다는 말 대신에 제사 먹으러 간다고 한다. 제사 지낼 때는 일가만 모이는 것이 아니고 동네사람들을 초대하는데 초대받은 사람은 부조를 준비해 간다.

 

- 여동생 제사에 초대된 적도 있다. 만 원짜리 한 장 들고 가서 저녁으로 제사음식 먹고 왔다. 그게 이곳 풍습이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만큼 살기 힘든 역사를 가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 귀신을 섬기는 풍속은 대단하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들도 묘소에 비석을 세우고 섬기는 데는 아낌이 없다. 여동생 제사까지 지낸다. 섬 전체가 그냥 묘지다.

 

- 노인들도 눈을 감기 전까지는 일하는 곳이다. 90이 가까운 현역 해녀도 있다. 노인들도 일해야 살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노모가 아래채에 같이 살아도 노인 혼자 밥 지어 혼자 식사한다. 아들은 아들대로 제 식구들과 따로 저녁을 먹는다. 이곳에서는 이상한 게 아니다. 과거에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았으니 서로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노력의 결과다. 얼마 전에 방영한 김수현씨의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도 그렇게 표현된 것처럼.

 

제주가 내게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후기>

중블 1월 베스트 블로그 1위에 제가 쓴 글이 뽑히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10위까지의 다른 글들을 보다가 약간 놀랐습니다. 제가 역이민을 좋다고 쓴 것도 아니니, 물론 제 글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역이민에 대한 Negative성 글이 서너 개나 실렸는데 한국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보였습니다.

 

미국은 위대한 나라입니다. 20세기를 주도한 나라지요. 그만큼 살기에도 좋은 나랍니다. 어느 누구도 이 사실에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한국인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일꾼으로 이민을 시작한지 100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미국인구 3억에 한인이 200만이 넘는다고 하니 반올림하면 1%에 가깝습니다. 고홍주씨가 연방정부의 고위직에 등용된 것이 10년도 넘었으니까 이제 곧 장차관도 나오고 언젠가는 오바마처럼 대통령도 나오겠지요.

 

워싱턴 주의 상원의원인 신호범 박사의 눈물 나는 자서전을 읽어보면, 1960년대 본인이 겪은 인종차별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 부인과 팔짱을 끼고 호텔에서 나오다 백인청년들에게 폭행을 당합니다. 유색인종이 백인여자와 팔짱을 꼈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텍사스에서 군복을 입고 친구들과 레스토랑에 들어가다 입구에서 제지당합니다. 개와 유대인과 유색인종은 입장이 안 된다는 팻말을 못 보았던 거지요. 10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불과 50년도 채 안된 이야깁니다.

 

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링컨 기념관 앞에서 ‘I have a dream.'이라고 20세기 길이 남는 명연설을 합니다. 그 결과 미국은 Racism을 법으로 금지합니다. 말이 아닌 법으로 말입니다. 미국인들 법만큼은 무서워합니다. 법으로 만들어 놓으니까 꼼짝하지 못하는 거지요. 그 혜택을 현재 많은 사람들이 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흑인과 중국인들의 희생이 있었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한국인이 아닌.

 

한국에 동남아 노동자와 결혼 이민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외환위기 후부터라고 생각됩니다. 10년이 좀 넘었지요. 이들의 인구가 지금 10만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인구를 5천만으로 보면 0.2%입니다. 그동안 몽골에서 온 여인이 시의원에 당선이 되고 필리핀 여성이 경찰이 되기도 했습니다. 100년쯤 지난다면 몽골계가 혹은 필리핀계가 국회의원도 되고 대통령도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제가 지나칠까요?

 

역사적으로 보면 최소한 한국이 미국보다 차별이 심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중학생을 성인과 비교하면서 ‘이런 것도 못해!’하고 질책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삼성의료원에서 과장으로 있는 K씨.

코넬의대에서 학위를 받고 맨하탄 종합병원에서 일했었지만, 주말에 롱 아일랜드 비치에서 가족과 쉬고 있을 때, 백인들로부터 모욕적인 인종차별 발언을 듣고 영구 귀국한 것이 20년도 안된 일이랍니다.

 

지난 과거는 아름답다고 합니다. 3~40년 전에 좁은 땅덩어리에 고생스러운 한국이 싫었다고 과거까지 부인하는 일이 없으시기를, 또한 Right time, right place에 계셨던 것을 행운이었다고 생각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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