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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이야기

주유소 아르바이트

(2012년 1월 29일)

 

1년이 넘는 제주생활에서 깨달은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그냥 막연하게, 중학생 정도면 수학이나 영어를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았고, 또 제주의 특산품인 밀감 관련 일을 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아이를 가르치는 일에는 나이가 문제 되었고, 밀감과 관련된 일은 힘이 부쳤다.

중앙일보 장병희 기자와 인터뷰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유소에서 펌핑하는 정도뿐이니 그 일이라도 할 것이라고 언급했었다.

 

지난 명절 직전 토요일 아침 TV에서는 고향찾아 내려가는 사람들 이야기로 설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교차로 광고를 뒤적이던 집사람이 화북에 있는 주유소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가 있다는 말에 '전화나 해봐'라고 했더니, 통화를 끝낸 집사람이 나이는 상관없다고 한다면서 전화번호와 주소를 주면서 가보라고 한다.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장을 만났다.

 

- 저희는 많이는 못 드립니다.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간당 4,300원 드립니다. 괜찮으시면 내일 나오셔서 4시간 정도 해보고 괜찮으면 설 다음날 아침 10시에 나오시면 됩니다.

 

- 젊은 사람들은 이 돈으로는 생활이 안 되기 때문에 오래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이 드신 분들은 오래 계시는 편이라 젊은 사람 보다는 50대가 넘은 분들을 주로 찾습니다.

다음날 약속된 시간인 10시에 갔더니, 주유하는 법과 휘발유와 디젤 차를 구분하는 법, 크레딧 카드 결제하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배웠다는 거 보다는 잘못해서 실수하면 큰 일 난다는 협박성 교육을 주로 받았다.

예를 들어, 기름이 넘치면 어떻게 된다든가, 휘발유 차에 경유를 넣는다든가, 세차를 잘못해서 차가 잘못되면 어떻게 된다든가 하는 공포성(?) 교육이었다.


유리문 안쪽에 앉아서 차도를 쳐다보고 있다가, 방향등을 켜고 주유소로 들어오는 차가 있으면 뛰어나가 주유기 옆에 서서 외친다.

- 안녕하세요, 어서 오십쇼. 주유구 열어주세요. 얼마나 넣어드릴까요?

- 휘발류 5만원 어치 주유하겠습니다.

-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카드 받았습니다. 5만원 사인 부탁드립니다. 카드와 영수증 드렸구요.

- 아직 주유 중입니다. 주유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내가 읊어야 하는 대사 들이다.

 

운전하다 보면 한국에서는 승용차들이 왜 이렇게 깨끗한지 의아했었다. 길도 더럽고 먼지도 많으니 당연히 차도 더러워야 하는데 지나다보면 내 차만 더러웠고 대부분 차들이 깨끗하게 세차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5만원 이상 주유하게 되면 세차는 무료였다. 깨끗하거나 더럽거나 관계없이 5만원을 주유하면 많은 차들이 세차를 했다. 세차를 하는 차들을 기다렸다가 마른 걸레로 물기를 닦아주는 일도 한다. 세차기가 오래 되어 가끔 말을 듣지 않기도 했지만, 주유기와 세차기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주유도 하고 세차기도 돌린다.

 

여러 대의 차가 한거번에 들이닥치면, 마음이 바빠져 생각지도 않은 실수를 해서 기름을 쏟기도 하고, 손님들에게 핀잔을 듣기도 한다. 지극히 단순한 일이지만, 공포성 교육 덕택에 실수할까봐 차가 들이닥칠 때마다 항상 긴장을 한다. 그렇게 5일을 계속 일했더니 단순한 일이라도 피곤을 느끼고 피곤하다고 말했더니 안주인이 말한다.

- 아무 것도 아닌데예,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예.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라예.

 

마산이 고향이라는 젊은 아낙네가 위로의 말을 건넨다.

 

풍족함이 없이 살아도 일년에 5~6백만원은 적자인 생활이다. 은행이자로 모든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는 원금이 너무 적은 탓이다. 그 적자나 메울 수 있으면 다행이다. 적자없이 3~4년을 지탱할 수 있다면 남은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하다. 지난 날 회사생활 시절의 10%도 안되는 금액이지만, 돈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스님들은 면벽수행도 한다는데, 수행한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이런 처지가 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싶다.

혹 지난 날 나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분들에게 속죄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또 평생 해보지 않은 일이니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배울 수 있으니 그만한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한 두 달이 지나,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면 일은 한층 쉬워질 것 같다. 세차비 천원을 아끼려고 3만원 주유하고도 그냥 세차하려는 사람들을 보고 쪼자분한 인생에 대해 배우기도 한다. 차가 깨끗한데도 5만원 주유하면 무료라는 것 때문에 세차하는 사람들을 보며 저런 사람들도 있구나 배운다.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어디서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배우겠는가?

 

<후기>

지금까지 책상에 앉아 머리쓰는 일로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머리쓰는 일보다는 몸을 움직여서 벌어먹고 살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했었지요.

그러나, 몸을 움직인다는 게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입에서는 쓴 내가 나고, 손은 주먹조차 쥐어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루 이틀 지나 연륜이 쌓이면 나아지겠지만, 그렇게 살기에는 너무 힘이 버거웠습니다.

 

주유소 일은 힘이 들지는 않았지만, 여러가지로 신경이 많이 쓰였습니다. 오래되어 녹이 쓴 주유기, 어떤 차는 주유하는 동안 주유기를 붙들고 있어야 하고, 어떤 손님은 외상장부를 갖다 주어야 하고, 어떤 손님은 표딱지로 계산하기도 합니다. 사실 아주 간단한 일이지만, 시간이 흘러 경험이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다 잊고 수행한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내 잘못으로 인해 내가 겪는 수행, 본의는 아니지만 나로 인해 상처받은 분들이 있다면 그 분들을 위해 속죄하는 심정으로 주유기를 잡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나로 인해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내일도 아침 7시 30분에 버스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서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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