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성공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 (1)

(2011년 12월 11일)

 

K군은 대학 3년 후배이자 직장 후배로 특례보충역으로 입사를 해서, 승진은 나보다 2년이 늦었던 친구였다. 그는 입사 때부터 똑똑하다는 소문이 돌아 다른 곳에서 근무하는 내 귀에까지 들리곤 했다. 과장 승진 후에도 짧은 지방근무 후 바로 본사의 요직으로 발령 받아, 사내 전산설비 유지보수를 담당하던 나에 비해 종합조정실이라는 핵심부서에서 근무했다.

(내가 졸업할 때에는 이공계 대학생들에게는 특례보충역이 없었다. 공고 출신에게만 주어지던 혜택이 80년대에 들어 이공계 대학생까지 확대되었는데, 인생에서 운도 크게 작용한다.)

 

90년대 초 우리는 점심시간에 회사의 정원에서 만나 이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이민을 떠나야 하는지의 당위성과 이민을 가면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지 등등에 관해 의견과 정보를 교환하느라고 남의 시선을 피해 후미진 곳을 찾곤 했었는데 그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 선배, 내가 모시고 있는 N 부장 있잖아, 그렇게 지독한 일벌레는 처음 봤어. 종합조정실에 주무 부장이라 사무직 출신인줄 알았는데 기술직군이더라고. 거기다가 고졸이야. 물론 회사 다니면서 대학졸업장은 땄지만. 기술직에 고졸 출신이 기라성같은 사람들이 득실대는 종조실 부장이라는 게 상상이 가.

 

- 선배, 이 양반이 어느 정도로 일 하는 줄 알아. 지독한 워커홀릭이야. 밤 11시, 12시는 초저녁이야. 집에서 몇 번씩 전화가 와야 일어나는데 그것마저도 아쉬워 하는 눈치야. 일을 더 하고 싶은 거지. 일하는 게 그렇게 재밌나 봐. 일요일이나 쉬는 날에도 회사에 오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거야. 그래서 목욕탕에 간다고 수건하고 비누 챙겨서 나와 회사로 온다고 하니 상상이 가. 노는 날까지 회사 간다고 하면 부인이 뭐라고 하니까 쪽 팔려서 거짓말을 한다는 거지.

 

20여 년 전의 일이라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 신문에서 N부장의 이름을 보았다. 지식경제부 산하 공기업의 사장으로 취임했다는 기사가 났던 것이다. 처음에는 동명이인인 줄로만 생각했다. 그런 자리는 정치적인 배경이 없이는 불가능한 자리고 그 분이 정치적인 배경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분의 경력을 찾아 보았더니 동일인이었다.

 

그토록 일을 열심히 하는 분이니 그런 자리에 가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고 한국사회의 밝은 면을 보는 것 같아 긍지도 느껴진다. 다른 회사의 사장으로 임기를 끝내고 예순살이 넘어 한국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는 중요한 회사의 사장으로 영전한 그 분은 분명 성공한 사람이다.

 

그 후배는 나보다 먼저 이민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에는 정보통신 관련회사가 우후죽순 처럼 생겼는데, 새로 생긴 이동통신 회사에서 그를 초빙하는 바람에 1년 만에 역이민을 택했다. 그를 다시 찾은 사람은 이동통신 회사 설립에 관여한 N 부장이었다. 후배의 보스로 같이 일할 때 그 능력을 인정했던 것 같다.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그 후배는 그 회사에서도 군계일학처럼 뛰어났었다고 했다. 여러 회사에서 모인 다양한 사람들로 채워진 그 회사에서도 후배의 능력은 뛰어났고 그는 잘 나갔다.

 

그런데 IMF 이후 통신회사들이 합종연횡 하면서 이 회사는 재벌그룹에 흡수되었고, 모그룹에서 내려온 인사들 때문에 후배는 무척 힘들어 했다. 결국 그는 심한 스트레스로 심장에 문제가 생겨 큰 수술을 하게 되었다. 4~5년 쯤 전에 한국을 다시 방문했을 때 수소문해서 회사를 관두고 송파구 아파트 단지에서 그가 하고 있다는 일식집 프랜차이즈 가게를 찾아갔다. 후배는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 했다.

 

- 선배, 죽을 고비를 넘겨보니까 세상이 달라 보이는 거 있지. 그동안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게 별 게 아니고, 평소에 하찮게 보이던 것이 중요하게 느껴지는 거야. 지금까지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

 

- 그 동안은 (머리를 가리키며) 이게 고달펐잖아, 대신 몸은 편했지. 그런데 이 장사를 하고 나서는 몸은 고달프고 힘들어도 이게 편한 거야. 이 일은 짱구 굴릴 일이 별로 없거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물건 받아와 장사할 준비해 놓고 점심 저녁 한참 바쁠 때 조금 도와주면 되거든. 그런데 이게 훨씬 편하고 좋은 거 있지.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잖아, 대신 마누라는 고생을 하지만.

 

- 많은 봉급장이는 아니지만 그냥 그렇고 그런 봉급장이 생활은 되거든. 그럭저럭 한 달에 5~6 백만원 수입은 돼. 그나 저나 선배는 성공했어. 쉰 살이 넘어서도 아직 회사에 다니고 있잖아. 그것도 이민까지 가서 말야. 그러면 성공한 이민 아냐?

 

인물 좋고, 똑똑하고 일 잘하기로 일찌기 소문났던 인재가 아파트 상가의 작은 일식집 가게 주인이 되어 있었다.

 

20여 년 전, 우리는 극심한 스트레스성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다. 지금은 신도 다니고 싶어하는 직장이라는 그 회사에 대단한 야망을 가진 분을 조직의 최고 보스로 모시고 있었다. 41년 생의 J국장은 우리에게는 군주와도 같은 분이었다. 무리한 사업추진과 영역확장으로 적을 많이 만들었으나 대신 휘하의 모든 사람들은 힘들어 했다. 특히 젊고 유능한 과장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승진은 가망이 없어 보일 정도로 멀리 있었고, 가까이 있는 것은 무능하고 밀어부치기만 하는 해바라기 부장이었다. 국장이 지시만 하면 방향도 주지 않고 그저 닥달만 해대고 결과가 나쁘면 조지기만 하는 권위주의 보스들은 우리를 극심한 스트레스로 몰아 넣었다. 일이 힘든 게 아니라 사람들 비위 맞추는 것이 힘들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사무실에 일하고 있는데 부장이 전화로 기계실로 내려오라고 한다.

기계실로 들어서니 평소에 내가 앉던 소파에 부장이 앉았고, 내 부하직원 너댓 명이 머리를 조아리고 앉아 있다가 내게 자리를 내 주었다.

 

- 과장이란 놈이 뭐하는 거야. 직원들을 제대로 통솔해야 할 것 아냐? 기계실이 이렇게 지저분한데 일이 제대로 돌아가겠어?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것 아냐? 장비를 다루는 놈들이 청결은 기본 아냐?

 

그는 먼지가 잔뜩 묻은 검지를 내 코 앞에 들이대며 소리쳤다. 모뎀이라고 불리우는 장비가 얹혀있는 선반을 손가락으로 쓸었던 것이다. 그런 것은 부하직원들이 없는 자리에 불러내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이 맞는 수순 아닌가! 이건 나를 직원들 앞에서 망신을 주겠다는 것 아닌가! 그리고 전국적인 유지보수 계획을 수립하고 예산을 짜느라고 골머리를 앓던 내게 이건 정말 하찮은 일이었다. 순간 내 눈 앞에서 노란 불똥이 일었다.

 

- 당신이 그렇게 잘나고 똑똑하면 당신이 직접 하면 될 것 아냐, 뭐하러 나같은 무식한 놈을 밑에다 두고 있는 거야. 당신이 알아서 다 해!

 

<후기>

하하하, 옛날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옵니다. 지금은 오뉴월에 꼬리 내린 똥강아지 모양을 하고 있지만, 저도 소싯적엔 한 성질 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그러고 나서 얼마 있다가 그 부장 앞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세요' 하고 빌었습니다.

 

할 수 있습니까? 토끼같은 새끼가 셋이나 딸린 가장인데, 그리고 그 엄격한 대한민국의 조직사회에서 하극상을 했으니 별 수가 없었지요.

그 통에 다음날 똥물이 다 올라오도록 그날은 술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후에 내 고과가 어땠는지는 상상만 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번 서울에서 그 후배에 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가게는 나중에 잘 안 되었다고 합니다. 근처에 비슷한 게 많이 생기는 바람에 장사가 안 되었던 거지요. 그 와이프가 무슨 일을 한다고 하더군요. 딸만 둘이었는데 다 출가를 시켰답니다.

 

당시 J국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바뀌었지요. 그 분은 전무가 된 후 사장까지 바라보다가 DJ 정부가 들어선 뒤 새로 영입된 사장에게 망신을 당하고 쫓겨나고, 나중에는 감옥에 까지 가야 했습니다. 지금은 아들의 사업을 돕고 있다고 들었는데, 일흔 살이 넘긴 나이에도 젊은 사람들을 찾아 다니고, 자기 지인들에게 정보통신분야의 동향과 신기술을 소개하는 이메일을 매일 같이 보낸다고 합니다. 대단한 사람이지요.

 

머리좋은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재미있어 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합니다. N사장을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 분이 성공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저 같이 안이함만 추구하고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타의에 의해 조기은퇴를 하여 이렇게 지내는 것 또한 당연지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