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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시선이 머무는 곳

속고 속이는 세상

(2011년 6월 8일)

 

- 우리는 그런 짓 안 합니다. 그런 것을 샀으니까 그런 걸 보낸 거지요.

 

○ 아니, 내가 선물로 산 건데, 그런 형편없는 물건을 샀단 말이에요. 내가 산 건 보기 좋은 한라봉이었다구요. 내가 얼마나 망신을 당한지 아세요.

 

- 하여튼, 우리는 그런 짓 안 합니다.

 

알았어요. 그럼, 이곳 시장관리사무소에 이야기 하지요.

 

제주에서 제일 큰 재래시장이 탑동 중앙로 오른편에 있다. 제주의 명동으로 가장 번화하고 오래된 길인 중앙로 끝자락에 자리한 동문시장이 그곳이다.

 

지난번 제주에서 은퇴생활을 할 생각으로 집을 사러 왔던 집사람 친구 부부와 같이 동문시장에 들렸다가 과일가게에서 한라봉이라는 밀감을 사서 서울로 택배로 보낸 적이 있었다.

 

한라봉, 천혜향 등은 일종의 개량품종의 귤로 '만종밀감'으로 불린다. 일반적인 밀감은 12월이나 늦어도 1월이면 수확이 끝나고 서울과 같은 대도시로 보내지는데,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되는 이런 종류의 개량품종은 수확시기가 4~5월로 일반 밀감의 끝물 무렵에 판매될 뿐만 아니라, 일반 귤보다 크고 향이나 단맛도 더해서 비싼 값에 팔린다. 아마 캘리포니아 오렌지보다는 작지만 비슷하게 생겨 그것과 교배종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동문시장 주차장 입구에 있던 그 가게에서 5Kg을 샀는데, 주소만 주면 택배로도 보내준다고 해서 택배료와 함께 배달 주소를 적어주고 값을 치렀었다. 5Kg이나 되는 박스를 갖고 비행기 타는 것을 귀찮아 하는 남편분을 위해 내가 아이디어를 제공해서, 집사람 친구 분이 자기가 일하는 가게의 동료들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분들이 돌아가서 보니 엉뚱한 과일들이 와 있었던 것이다. 볼품없이 작고, 크기도 균일하지 않을 뿐더러 맛도 형편없어 상품 가치가 없는 것들로 상자가 채워진 것이었다. 선물을 한 동료들에게 창피해서 혼났다는 말도 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손님들에게 바가지를 씌운 것이다. 뜨내기 손님들이니 따지러 제주에 다시 오겠느냐는 발상에서 그리했을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갔다. 단 돈 몇 만원 이익을 보기 위해서 관광객들이 쓰고 가는 비용이 도민들의 주요 수입원인 제주에서 관광객을 대상으로 속임수를 쓴 것이다.

 

그런 말을 들은 다음, 그곳을 지나는 길에 그걸 따진 것이었지만, 중년의 부부인 듯한 두 상인은 정색을 하고 시치미부터 떼고 나왔다. 증거도 있을 수 없어 더 이상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시장관리사무소에 고발하겠다는 말 밖에는 없었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도 주차장 건물 입구에 있는 그 가게 앞을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혼자 가게 앞에 있던 아주머니가 제주 사투리로 뭐라고 하며 우리를 불러 세웠다. 내용인즉슨 '그럼, 어떻게 해주면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즉 처음과는 다르게 뒤가 캥기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집사람 친구가 당한 것이지만 마치 내가 당한 것처럼 '이미 창피를 다 당했는데, 뭘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더니, 허리에 찬 돈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며 반을 돌려주겠다고 한다.

 

- 시장에서 이렇게 과일이나 팔아 겨우 벌어먹고 사는데, 사무실에 가서 이야기 하면 뭐 합니까. 그냥 좋게 좋게 지나갑시다.

 

상류층은 상류층대로 '노블레스 오블리쥬'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그 권력과 힘을 이용해 힘없는 사람을 등치고, 서민층은 서민대로 속일수만 있으면 속여서라도 몇 푼의 이익에 양심을 판다는 현실에 슬픈 생각이 들었다.

 

하긴, 누가 누구에게 침을 뱉을 수 있으랴!

나도 비슷한 짓을 하지 않았던가! 몇 년 전, 한국에서 형제들이 미국을 방문해 같이 가족여행을 다닐 때, 모텔비 몇푼 추가요금(Surcharge)을 아끼려고 여섯명이 방 두 개를 빌리면서, 네 명이라고 거짓을 말하고 체크인 했다가 발각나 망신을 당했던 일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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